■ 142. 관객 없는 전시 □
"나 매일 미국 음식만 먹어서 조금 살쪘어."
유나가 내 팔을 베고 말했다.
그랬었군.
어쩐지 안으면 품에 꽉 차는 느낌이었다.
나는 역시 아재라서, 너무 마른 것보다 지금이 더 좋았다.
'어학연수가 좋은 점도 있구나.'
그리고 태연히 대답했다.
"진짜? 전이랑 똑같은데? 전혀 몰랐어."
회귀자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거짓말도 잘한다.
대체 회귀자가 못하는 게 뭘까?
이주원은 이제 거의 완벽한 인간이라 볼 수 있었다.
"이번 어학연수 끝나면 어디든, 다시는 너 혼자 오래 안 보낼 거야."
"그래. 나도 담부턴 혼자 어디 안 갈래."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열렬히 좋아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뜨거울 수 있을 때 허풍을 잔뜩 쳐둬야지.
아무튼.
우린 며칠간 행복하게 잘 지냈고, 유미에게도 들키지 않고 유나는 무사히 잘 돌아갔다.
그리고 우린 잘 견뎌냈다.
'하긴, 한 두 해 사귀고 말 것도 아닌데.'
어학연수 정도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면 말도 안 되지.
그렇게 시간은 잘 흘렀다.
곧 유나의 어학연수도 끝났고, 김태민도 제대했고, 내 공익근무도 끝났다.
"이 선생님. 혹시 학교 근처에 지날 때면 꼭 들러주세요. 우리 학교에 복무하러 오는 분들 많았지만, 이 선생님처럼 열심히 해주는 분은 처음이었어요."
"학생들도 진짜 섭섭해 하겠다. 학생들 울면 안 되는데. 이제 이 선생님 없으면 우린 내일부터 어떡해요. 연락하고 지내요. 자주 놀러 오시고요."
나는 그냥 노력상점의 노력 시간을 채우려한 것뿐이었는데.
내 복무가 끝나는 걸 이렇게 모두가 아쉬워해주니 오히려 내가 고마웠다.
'전생에선 사람들이 내게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지.'
2년간 열심히 복무한 나 자신이 대견했다.
* * *
그리고 또 시간이 빠르게 지났다.
1년 반이 슈웅 지나갔다.
정화 선배는 졸업했고, 유나와 나, 김태민은 3학년 1학기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수진 선배가 영화를 두 편 조연으로 찍었고, 나는 건물 2개를 추가로 사들였고, 경매로 48평 아파트도 한 채 샀다.
뭐, 지금 당장 생각나는 변화라면 이 정도?
물론 48평 아파트는 내가 들어가 살진 않았고 세를 줬다.
그런데 부자가 되긴 했지만 아직, 내 영혼은 가난한 모양이었다.
48평 아파트의 내부를 보자마자 처음에 이런 생각을 했다.
'와, 여긴 청소를 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겨울 난방비 장난 아니겠다. 대체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돈에 익숙해지는 속도가 돈을 버는 속도를 못 따라오고 있었다.
그래도 뭐, 인생은 기니까.
나중에 천천히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면 되겠지.
'아니면 계속 가난한 영혼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지도.'
그리고 정화 선배는 하이 유나의 파트너가 되어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정화 선배는 의욕이 넘쳤다.
"그림이야 나중에 언제든 그릴 수 있지만, 하이 유나는 하나뿐이니까. 젊었을 때 바짝 벌어둬야지."
나야 고마울 따름.
덕분에 유나와 나는 학교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다른 경력직 직원에게 대표를 맡기고 하이 유나의 홈페이지에서 유나와 이주원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그래도 여전히 일할 거리는 많았다.
쇼핑몰의 반복 업무에서는 빠져나왔지만, 재산이 계속 늘면서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은 계속 늘어났다.
아, 그리고 수진 선배도 우리와 같이 수업을 듣는다.
'영화 촬영 때문에 수업을 많이 빠져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연기보다는 김태민에게 맞추느라 그런 것 같았다.
* * *
똑똑.
나는 한국대학교 서양화과 과사무소의 문을 두드렸다.
"동민이 형, 저 찾았어요?"
"어, 주원아. 어서 들어와."
지금은 5월 말.
기말고사도 하나씩 끝나고,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직전.
대학생들이 가장 설렐 무렵이었다.
남동민은 벌써 졸업하고, 우리 학교의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서양화과 조교가 되었다.
'남동민은 나이도 많고, 사람도 성실하니까.'
물론 월급이야 강남의 학원이 훨씬 비쌀 것이다.
하지만 조교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일하기도 좋고, 또 다양한 인맥을 쌓기도 좋다.
이 바닥에서 인맥은 중요하니까.
"형, 무슨 일이예요?"
"아, 학과 일은 아니야. 다른 건 아니고 이 전단지 좀 봐볼래?"
[ 전시 공간 : 번개 한옥 ]
전단지에 큼지막하게 촌스런 폰트로 적혀 있었다.
번개 한옥?
특이한 이름이었다.
"이게 뭐죠?"
"그게······ 내 친구들이 만든 대안 공간 비슷한 허름한 소형 갤러리야."
"형 친구들이요? 갤러리를 만들었다고요?"
"응. 절대 대단한 곳은 아니야. 내 친구들도 대학원생이거든. 다른 학교긴 하지만."
남동민은 과사무소 냉장고에서 차가운 캔녹차를 꺼내 내게 건넸다.
예전 수업시간에는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는데, 이제 나한테 녹차를 주다니.
3년 반이란 시간이 정말 길구나.
"번개 한옥은 대학생이나 대학원생들이 편하게 전시하도록 내 친구들끼리 만든 곳이야. 그런데 그게, 요즘 거기 운영이 좀 어렵나 봐. 그래서 내가 조교니까, 나보고 우리 학교에 혹시 전시할만한 사람들이 없는지 물어보더라고."
"아······"
어떤 곳인지는 대강 알 것 같았다.
서울에는 찾아보면 이런 소규모 전시 공간들이 꽤 있었다.
구석구석.
상가나 주택가 사이에 이런 작은 갤러리들이 숨겨져 있다.
마치 보물찾기처럼.
그리고 그런 곳 중에서 아주 가끔은 운 좋게 재미있는 전시를 만나기도 한다.
아니면 전시 자체는 재미없더라도 감춰진 장소를 찾아보는 재미?
가끔 애인이나 친구와 색다르게 시간 보내기에는 나쁘지 않은 곳들이었다.
물론 전생에는 그런 재미를 누려보진 못했다.
하지만 이번 생은 나도 여친이 있다.
'여친 만세!'
성공적인 미대생이 되려면 전시를 자주 봐야 한다.
그리고 전시를 자주 보려면 애인이 필요하다.
고로 훌륭한 미대생이 되려면 여자 친구는 필수 인 것이다.
'사실은 내가 유나를 사귀는 것도 전부 좋은 예술을 위해······'
남동민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 주위에는 너희들이 딱인 것 같아서."
"우리들요?"
"응. 너네는 넷이 항상 같이 다니잖아. 태민이랑, 수진이, 유나랑 너. 아무래도 학부생이 혼자서 이런 전시를 준비하기는 어려우니까. 4학년은 이제 졸전이니까 바쁠 테고. 1,2 학년은 너무 어리고. 또 다른 3학년 중에는 너희들처럼 몰려다니는 녀석들이 없잖아. 게다가 너희라면 실력도 있고. 그러니까 한 번 생각해 봐주라."
나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이제 곧 3학년도 절반이 지났다.
다른 학과는 잘 모르겠는데, 미대는 1,2,3 학년과 4학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1,2,3학년은 자신과 예술에 대해 여러 가지를 배우고, 4학년은 그동안 배운 것들을 증명해야 한다.
미대는 거의 단 한 번의 졸전을 위해 4년을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6개월 뒤, 4학년이 시작된다.
한 번 이쯤에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전시라······번개 한옥······재미있을 것 같기는 한데, 친구들한테 한 번 물어볼게요."
"그래. 부탁할게."
남동민도 나이를 먹으면서 성격이 많이 순해졌다.
까칠하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부탁하니까 왠지 더 거절하기 어려웠다.
* * *
"번개 한옥?"
우린 이제 부자가 되었고, 또 수진 선배는 유명해졌지만 여전히 대학 학식을 먹었다.
싸고, 맛있고, 편하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대학생이란 사실을 떠올려 준다.
그렇게 학식을 먹으며 내가 가져온 전단지를 보여줬다.
"그러니까 만약 전시를 하게 되면 전부 우리가 기획하고, 전부 우리 마음대로 하는 거야?"
유나가 물었다.
"그렇지. 교수도 없으니까. 전부 우리끼리 우리 맘대로."
"끌리는데?"
우리는 지난 3년간 열심히 그리고 만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자유롭게 작업한 적은 별로 없었다.
전부 교수가 주제를 주면 거기에 맞춰 고민해야 했다.
"저기 그런데 말이야."
전단지를 노려보던 김태민이 심각하게 말했다.
"응?"
"번개 한옥이란 이름이 대체 무슨 뜻일까?"
"으음······그게 말이야."
나는 사실 대강 감이 왔다.
아마도 작고 접근하기 쉬운 전시 공간이니까 번개 미팅을 하듯, 가볍게 전시를 하는 공간······
그런 뜻이 아닐까?
하지만 김태민을 보면 놀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게 인지상정.
"전시 공간이 오래된 한옥인데, 아마 번개를 맞은 적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러자 옆에 있던 수진 선배가 놀라서 되물었다.
"진짜? 집이 번개를 맞았다고? 그러면 안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김태민을 낚으려 했는데 수진 선배가 낚이다니.
수진 선배는 너무 착해서 낚시를 하면 죄책감이 든다.
"그나저나 우리가 직접 번개 한옥을 찾아가서 확인해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전시하고 싶어도 장소가 별로면 전시를 못하는 거니까. 또 장소가 마음에 들면 꼭 전시를 하고 싶어질 수도 있으니까. 장소를 먼저 보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응, 그러자. 나는 찬성."
유나가 먼저 찬성.
수진 선배와 김태민도 찬성.
이제 곧 방학이지만, 두 사람은 원래 느긋한 성격이라 아직 방학 계획을 세우진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거의 3학년 초까지 회사와 학교를 병행 하느라 정신없이 지냈다.
3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 이제 겨우 숨통이 트인 정도.
그래서 유나와 나도 아직 방학 계획이 없었다.
그러니 방학을 맞아, 가볍게 전시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우리 넷은 성북동의 '번개 한옥'을 찾아갔다.
* * *
"안녕하세요. 한성일입니다."
"전 김선영입니다. 동민이랑은 J대 조형예술학과 동기예요. 우린 우리 학교에 만족했는데······ 동민이 놈은 우릴 배신하고······ 그래도 계속 연락하고 지내다가 이번에 부탁하게 되었어요."
성북동 H대 역 앞의 주택가.
우리가 들어간 곳은 조그만 마당도 있는 오래된 개량 한옥이었다.
전혀 전시 공간처럼 보이지 않고, 그냥 보통 일반 주택이었다.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 있는 동네였는데, 옆집도, 그 옆집도 그냥 일반 가정집이었다.
"보통, 대학원생들이나 아니면 학부생들은 좀처럼 전시장을 찾기가 힘들잖아요. 괜찮은 전시장은 대관료도 비싸고, 무료 공간을 제공하는 곳도 경력이나 포트폴리오 심사가 까다롭고요."
정말 그랬다.
그리고 그런 심사를 통과하더라도, 무료 전시관이라면 일정을 전적으로 전시장에 맞춰야 했다.
'이러니 한국에서 미술가로 살아남으려면, 점점 더 학벌에 집착할 수밖에.'
한성일이 다시 설명했다.
"그래서 친구 네 명이 모여 여기를 만들었습니다. 우린 이 집을 반전세로 빌렸습니다. 자취방 보증금을 뺀 친구도 있고, 부모님한테 돈을 빌린 친구도 있습니다."
반전세는 말 그대로 반 전세.
보증금을 많이 내는 대신 월세가 낮아지는 임대 방식이었다.
"복잡한 심사를 받는 대신, 우리가 직접 전시 공간을 만들자. 그리고 우리가 전시를 하지 않을 때는 월세만 받고 전시 공간을 남에게 빌려주자. 그게 우리의 처음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우리도 실컷 전시를 할 수 있고, 또 전시를 하고 싶은 사람들도 저렴한 가격에 전시를 열 수 있고. 모두에게 윈윈이 아닐까."
"괜찮은 아이디어 같은데요?"
하지만 한성일과 김선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되지는 않더군요."
하긴 세상은 언제나 생각처럼은 되지 않는다.
"가난한 미대생들은 이곳 월세도 부담되나 봐요. 그리고 전시를 하려면, 조금 유명한 곳에서 해야 이력서에 한 줄 더 적을게 생기는데, 우리 같은 신생 공간은 아무래도······자랑스럽게 이력서에 적어 넣을 곳은 아직 안 되니까."
"그래도 처음 몇 달은 우리 취지에 공감하고 전시를 하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지인 찬스도 몇 번 썼고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여긴 평범한 주택가고, 찾는 사람도 많지 않은 곳이니까요. 아무래도 관객이 없는 전시를 굳이 고생하면서 열고 싶지는 않은가 봐요."
우린 고개를 끄덕이며 번개 한옥을 둘러봤다.
텔레비전 연속극에 서울 어느 구석으로 등장할 것 같은 정감 있는 개량 한옥.
유나는 생글거리는 눈빛으로 번개 한옥을 구석구석 둘러봤다.
'이제는 눈빛만 봐도 알지.'
유나는 이 곳이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김태민은 집 구석구석을 열심히 살펴보더니, 한성일을 붙잡고 물었다.
"그런데 번개를 맞은 곳은 어디죠?"
아, 태민아.
번개를 맞아서 번개 한옥이 아니라······
내가 태민이의 팔을 붙잡고 설명해 주려는 찰나.
한성일이 대답했다.
"번개를 맞은 곳은 저기 별채의 옥상입니다. 올라가보면 검게 그을린 자국이 있을 겁니다."
어? 진짜 번개를 맞은 거였어?
후다닥.
한성일의 설명에 김태민과 수진 선배가 별채의 옥상으로 뛰어갔다.
"오오······"
그리고 둘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두 사람은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하하하. 저는 번개처럼 빠르게 전시하는 곳이라서 번개 한옥이라고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자 김선영의 표정이 변했다.
"괜찮은 생각인데요? 성일아, 어때?"
"아, 진작 그 생각을 했으면 홍보 전단지에 그렇게 적어 넣을 걸."
이 사람들이······
"집 주인 아저씨가 여길 빌려주면서 그랬거든요. 번개를 맞은 집은 행운이 따른다고. 그래서 기분 좋게 2년 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가는데, 전시를 하겠다는 사람을 못 구해서 벌써 적자입니다. 행운은 무슨. 어휴."
한성일과 김선영이 크게 한숨을 뱉었다.
"그래서 여기 대관료는 얼만데요?"
"한 달에 80, 보름에 40만원입니다. 이 집 월세가 보증금 5000에 월 60만원이거든요. 월세와 최소한의 관리비만 대관료로 측정했습니다."
음.
80이라······
80만원이면 내 한 시간 시급도 안 되는 돈.
월세 60짜리 집을 80만원에 빌려준다면 정말 양심적인 요금이라 할 수 있었다.
양심적인 젊은 예술가들이 돈 걱정을 하면서 한숨 쉬는 게 뭔가 안타까웠다.
다행히 유나, 태민, 수진 선배 모두 이곳에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나는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내 생각을 말했다.
"우리, 전시 하자. 어차피 사람들도 잘 오지 않는 외진 곳이니까, 우리끼리 맘 편하게 놀 듯이 전시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 어차피 사람들도 잘 오지 않는 곳.]
옆에서 내 말을 듣고 있던 한성일과 김선영이 더 큰 한숨을 뱉으며, 울상을 지었다.
사실이긴 하지만, 조금 미안했다.
"그래, 하자. 재미있을 것 같아."
다행히 친구들 모두 찬성.
"저희가 한 달 빌릴게요."
"한 달이나요?"
무심코 팩트 폭행을 날려서 조금 미안한 마음에, 여유롭게 한 달을 빌리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