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43화 (143/203)

■ 143. 성북동 가족 A □

번개 한옥을 빌리기로 하고, 우린 더 꼼꼼히 그곳을 살펴봤다.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듯 하는 전시.

관객도 없고, 평가할 교수도 없다.

그래서 다들 이것저것 더 기발하고 자유로운 생각들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나만 빼고.'

나는 시골 출신 + 아재 영혼.

상품이 걸리고 경쟁이 붙고, 감시하는 교수가 있어야 더 의욕이 생기는 것 같다.

'자, 이주원. 잘해 보자."

번개 한옥은 방 두 개와 부엌, 거실을 가진 본채.

그리고 방 하나와 창고가 있는 별채로 이뤄져 있었다.

"날씨가 좋은 날은 마당도 전시 공간으로 쓸 수 있습니다. 부피가 큰 입체라면 더욱 마당이 적당하겠죠."

옆에서 한성일이 설명했다.

물론 우리는 서양화과.

그리고 가볍게 여는 전시인 만큼, 부피가 큰 입체는 없을 것이다.

집은 적당한 넓이였고, 식탁이나 소파 같은 가구도 가정집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유나는 본채의 안방으로 들어갔다.

"벽지랑 장판이랑 전부 약간 제주도 할머니 댁에 온 기분이야. 그리고 나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정말? 벌써?"

맞장구과 호응은 노련한 남자친구의 필수 덕목.

"응"

유나는 뿌듯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기의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할머니 댁에 가면 가족사진이랑 우리 남매, 사촌 상장들을 액자에 넣어서 문 위에 걸어뒀거든. 저기 쯤에다."

유나는 안방 문 위에 천장과 벽의 경계선을 가리켰다.

"어, 맞아. 우리 할머니도 거기다 우리 상장들 걸어놨어."

수진 선배가 유나에게 동조했다.

"보통 전시장이라면 저기다가 그림을 걸진 않잖아요. 하지만 여긴 조금 특이한 장소니까, 이 장소만의 매력을 잘 살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저기처럼 방마다 올려다봐야 하는 자리에 상장들을 걸어둘 거예요."

"상장?"

"응, 상장. 대신 글로 쓰지 않고 드로잉으로 가볍게 그릴 거야. 자신에게 상을 주고 싶은 순간이나, 그때의 기분들. 아니면 아무 드로잉이라도. 뭐든지. 어차피 볼 사람도 없으니까. 가족사진을 틈틈이 섞어놔도 되겠다. 아무튼 저 자리들은 내 거에요!"

그렇게 유나가 선포했다.

그림으로 그린 상장이라······

재미있는 생각 같았다.

상장을 걸게 될 장소도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번개 한옥이 특이한 전시공간인 만큼, 번개 한옥 만의 장소의 매력을 살려야 한다는 것도 멋진 생각이었다.

"유나가 높은 곳을 다 선점했으니까, 그럼 난 벽 중앙에다 그림을 걸래. 뭘 그릴 지도 생각났어."

응? 수진 선배가 웬일로?

수진 선배는 원래 느긋한 성격.

평소엔 천천히 움직인다.

그런데 학점도 없고, 교수도 없는 오늘은 뭔가가 순식간에 떠오른 모양이었다.

"뭘 그릴 건데요?"

"그리지 않고 쓸 거야."

"그림을 글로 쓴다고요?"

"응. 유나가 상장을 그림으로 그리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난 반대로 할 거야. 영화 대본을 읽다보면, 지문으로 배우의 동작을 설명하거든. 그래서 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 그림을 그리지 않고, 지문으로 쓰면 어떨까?"

오올.

"수진 누나 기발한데요?"

내가 감탄하자, 옆에 있던 김태민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봤지? 내 여자 친구가 이 정도야.' 하는 표정.

저 녀석.

이럴 줄 알았으면 유나가 제일 먼저 아이디어를 내놓을 때, 나도 같이 뿌듯해 할 걸 그랬다.

"그치? 괜찮은 생각이지?"

"네, 언니. 재밌어요."

"응. 실은 항상 해봐야지 생각 하면서도 막상 자신이 없어서 수업 시간에는 도전해보지 못했었어. 그런데 여긴 주원이 말대로 순전히 우리를 위한 전시니까. 이번에 한 번 도전해 볼래."

수진 선배가 그렇게 말해주니 이곳을 빌리기로 한 보람이 있었다.

번개 공간이 우리에게 꽤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여긴 방 세 개짜리 가정집이잖아. 그러니 전시 공간이 되기 전에는 분명 어떤 가족들이 살고 있었을 거야. 나는 그 가족을 상상하고, 그 가족들의 일상을 캔버스에 지문으로 적을 거야."

수진 선배의 생각도 꽤 재미있는 것 같았다.

묘하게 유나의 아이디어와 이어지는 것 같기도 했고.

유나의 상장들도, 수진 선배의 지문 그림도 전부 가상의 어떤 가족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럼 난 이렇게 할래요!"

이번에는 김태민이었다.

어?

이 사람들이 왜 이러지?

유나로 시작해서 김태민까지.

나는 아이디어의 남자, 이주원.

회귀자다운 다양한 경험과 노련함으로 가장 먼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곤 한다.

그런데 오늘.

세 사람이 나를 추월했다.

"넌 뭘 할 건데?"

"응. 누나는 이 집에 사는 가족들을 지문으로 적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사실 그 가족은 고양이를 기르는 가족이었던 거야. 난 고양이를 그릴 거야."

이 녀석.

잊고 있었다.

김태민의 필살기, 고양이.

'군대를 갔다 와서도 여전하구나.'

역시 이번에도 고양이는 만능이었다.

김태민의 고양이는 언제 어디서나 써먹을 수 있구나.

이른바 고양이 만능론.

"유나는 천장과 벽의 경계. 누나는 벽 중앙. 그런데 원래 고양이는 예상 못한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동물이잖아. 난 고양이 그림을 그려서 집의 여기저기다 그냥 흩어서 놓아둘 거야. 정말 고양이가 그러는 것처럼."

"괜찮은데?"

보통 전시는 그림들이 정해진 곳에만 걸려 있다.

하지만 김태민의 고양이 그림들은 집 산책하는 고양이처럼 뜻밖의 곳에 걸릴 것이다.

재미있는 발상.

정말 부담이 없는 전시라 모두들 재미있는 생각을 내는 것 같았다.

'물론 나만 빼고.'

김태민이 계속 계획을 이야기했다.

"누나는 글로 쓰고, 유나는 그리겠다고 했으니까 난 글로도 쓰고, 그림도 그릴래."

"고양이를 글과 그림으로 묘사한다? 만화나 일러스트 같겠다. 태민이 솜씨니까 기대도 되고. 재미있을 것 같아. 고양이 그림이 예상 못한 장소에서 날 쳐다보고 있으면."

먼저 자기의 계획을 이야기한 유나가 홀가분하게 김태민의 아이디어를 칭찬했다.

'잠깐, 그럼 이 집에 벽의 위, 벽 중앙, 구석구석까지. 세 사람이 다 차지했잖아. 그럼 난 어떡하지?'

물론 장소야 많다.

하지만 나 역시 세 사람처럼 좀 특이한 방식을 찾고 싶었다.

"그럼 주원아, 너는?"

"나?"

"넌 뭘 할 건데?"

나는 좀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원래 전시 공간을 보면, 며칠 생각을 해 봐야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게 정상이다.

이 세 사람이 오늘따라 유난히 컨디션이 좀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곧바로 아이디어가 떠 오른 모양인데, 내가 정상이고 이 세 사람이 비정상인 것이었다.

"그래, 주원아. 천천히 생각해 봐."

김태민이 상냥하게 말했다.

하지만 자격지심인지 왠지 살짝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야. 주원이가 얼마나 기발한 아인데. 벌써 뭔가, 우리 모두 깜짝 놀랄만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거야."

수진 선배 왜 그래요.

"어서, 말해 봐. 주원아. 생각난 거 있으면."

유나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김태민과 달리 유나는 나를 놀리는 게 확실했다.

으음.

"그래, 주원아. 넌 뭘 할 건데?"

"으으. 주원이 생각 기대 된다."

이 사람들이······

"뭔가 생각나긴 했는데, 지금은 말할 수 없어요. 나중에 말해 줄게요."

"그래? 진짜? 기대할게."

* * *

그날 저녁.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번개 한옥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저예산으로 만든 전시 공간인 만큼 번개한옥 홈페이지도 싸구려 냄새가 진동했다.

'이것도 직업병인가?'

나는 일류 웹디자이너.

그래서 번개한옥의 홈페이지를 보고 있으니 괴로웠다.

그리고 내가 전시할 작품에 대해 고민했다.

내 작품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유나, 태민, 수진 선배의 작품들과 자연스레 이어질 것.

공동 전시니까.

모든 작품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전시의 재미가 완성된다.

'하필 내가 제일 마지막이라니.'

그러니 세 사람의 아이디어들을 모두 고려하고 확장해서 내 작품에도 이어나가야 했다.

2. 세 사람의 작품은 내적으로는 모두 성북동에 살았던 어떤 가족을 다루고 있다.

'그럼 내 작품도 주제는 결정 난 셈이군.'

나 역시 전시 공간에 살았던 '어떤 가족'을 다룬다면 내용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다.

3. 세 사람의 작품은 외적으로는 가볍고 편하게 그려진 작품, 그리고 번개 한옥의 벽이나 구석에 그림이 걸릴 예정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가볍고 편하게 만들어진 작품이 좋겠어.'

그렇게 한다면 전시의 작품의 밀도가 균형이 맞게 될 것이다.

물론 전시에서 작품의 밀도야 일부러 맞출 필요는 없다.

전시의 작품들이 균일해야 한다는 규칙도 없고, 특히 이번 전시는 보러 오는 사람도 딱히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정말 내 마음대로 하면 된다.

'하지만 애초에 편하게 여는 전시로 마음먹었으니까.'

나도 이번에는 힘을 빼고 싶다.

그래서 나도 가볍고 편하게 작품을 준비할 생각이다.

그리고 작품이 진열되는 방식.

'유나와 태민이가 기발하게 작품을 배치하기로 했으니까.'

나 역시 조금 기발하게 가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한 가족에 대해 쉽고, 기발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한 가족이 성북동의 낡은 개량 한옥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족은 집안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기르고 있었다.

그 집의 아이들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서 이것저것 상도 많이 탔다.

'관객에게 이 가족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해 줘야 해.'

성북동에서 가족이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나는 인터넷에서 번개 한옥 주위의 지도를 검색했다.

그리고 번개 한옥 주위를 살펴봤다.

'상을 많이 탄 아이들은 학교에 다녔겠지.'

지도를 찾아보니 마침 번개 한옥 옆에는 초등학교도 있고, 중학교도 있었다.

'아이들은 엄청 먹으니까 엄마와 아빠는 부지런히 장을 봐서 냉장고를 채웠을 거야.'

다시 지도를 찾아봤다.

근처에는 재래시장도 있었고, 대형 슈퍼마켓도 보였다.

대학 근처라 그런지 식당도 꽤 많았다.

'아마 한 달에 한두 번 외식도 했겠지.'

그리고 어른들은 직장에 다녔을 것이다.

근처에는 지하철역도 있고, 도로들도 많았다.

지지징. 지이이잉.

나는 인터넷에서 찾은 번개 한옥의 지도를 인쇄했다.

그리고 형광펜으로 학교와 시장, 문구점과 약국 등등.

그 가상의 가족들이 다녔을만한 장소와 길에 색칠을 했다.

'그 가족이 움직였을 동선.'

감을 잡지 못할 땐 직접 발로 뛰자.

그림은 발로 뛰며 그리는 거라고 배웠지.

나는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성북동으로 향했다.

* * *

시간은 이제 저녁을 지나 밤을 향하고 있었다.

재래시장은 벌써 닫았지만, 시장 주위의 식당들은 환하게 불을 켜고, 술손님들을 받고 있었다.

활기차고 즐거운 분위기.

찰칵. 찰칵.

나는 식당들을 사진 찍었다.

그리고 마트와 약국들.

늦은 시간이지만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왁자지껄 떠들며 지나가는 대학생들.

찰칵찰칵.

모두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초등학교와 주변의 문방구들.

까맣게 불이 꺼져 있었지만, 나름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여긴 낮에 한 번 더 와야겠군.'

그리고 가끔.

가족 단위로 손을 잡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자식들이 부모보다 키가 훌쩍 더 커버린 제법 오래 된 가족도 보였고.

유모차를 밀면서 산책하는 어린 가족도 보였다.

밤의 성북동은 한가롭고 즐거워 보였다.

찰칵. 찰칵.

'사람들의 모습은 한걸음 물러나 본다면, 그냥 그 자체로 예술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

그 자체로 예술이라고?

나는 가방에서 형광펜으로 칠한 지도를 꺼냈다.

'이 지도와 사진들을 그냥 늘어놓는 것만으로 관객들은 성북동의 어떤 가족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번개 한옥에는 식탁이며 소파, 탁자들까지 원래의 가구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 지도와 사진들을 식탁이나 탁자 위에 그냥 펼쳐두면?'

그렇게 한다면 세 사람의 작품과 배치 역시 겹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 난 이걸로 하자.'

* * *

맴맴맴.

매미가 시끄럽게 우는 여름.

우리 넷은 성북동 번개 한옥에 모여 곧바로 전시 준비에 착수했다.

더워서 대청마루의 모든 창문은 다 활짝 열었다.

그랬더니 온통 매미 소리가 들렸다.

주택가라 근처에 큰 나무는 보이지 않았는데, 매미 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시간도 느긋하고, 평가하는 교수도 없다.

보러 오는 사람도 아마 없을 테고.

그리고 우리는 신나게 전시를 준비했다.

유나는 색연필로 드로잉을 했다.

'확실히 유나도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이제 3학년.

유나는 1학년 때도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이제 더 잘 그리게 되었다.

가볍게 쓱쓱 긋는 선도 뭔가 느낌이 담겨 있었다.

유나는 인터넷으로 옛날식 플라스틱 액자를 여러 개 주문했다.

그리고 맘에 드는 드로잉은 곧바로 액자에 넣었다.

'그런데 자꾸 액자가 늘어나는 느낌이야.'

편하게 열기로 한 전시.

그런데 왜인지 계속 추가로 액자를 주문하는 모양이었다.

'이 액자 개수라면 절대 편하게 여는 전시가 아닌데?'

이대로라면 방 세 개에 모두 액자들을 가득 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유나 역시 한부지런하는 성격이라 점점 더 욕심이 나는 모양이었다.

김태민도 마찬가지.

김태민은 고양이를 그리고, 거기다 글자를 적어 넣었다.

처음엔 '으르르', '털이 날린다.' 이런 식으로 고양이 그림 옆에 설명을 적었다.

그리고 가끔은 그림은 그리지 않고 글로만 적기도 했다.

[ 주인을 쫓아다니며 받아낸 간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고양이 ]

[ 기분이 좋아서 꼬리를 흔들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얼룩이 ]

이런 식이었다.

김태민도 유나처럼 그림이 마음에 들면 곧바로 액자에 넣었다.

그런데 김태민도 점점 고양이가 너무 늘어나고 있었다.

'대체 이 집은 고양이를 몇 마리나 기르는 거야.'

원래라면 따질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예술가.

세상에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우겨야 하는 사람들.

게다가 김태민의 고양이 그림은 정말 고양이처럼 묘한 매력이 있어, 계속 보게 되었다.

이런 그림이라면 많을수록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번개 한옥도 좁지 않으니까 문제 될 것은 없다.

"아이스크림 사왔어요!"

세 사람이 번개 한옥에서 자기 집처럼 편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을 동안.

나는 더운 여름 날.

카메라를 들고 땡볕 아래에서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번개 한옥에 갈 때는 세 사람을 위해 간식과 아이스크림들을 사서 돌아갔다.

'왜 나만 손해 보는 느낌이 들지?'

아무튼.

끼이익.

번개 한옥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 외쳤다.

"간식 사왔어요!"

"와아! 스크류바 내꺼!"

수진 선배는 정말 자기 집처럼 바닥에 배를 붙이고 누워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느긋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제일 먼저 달려와 간식 봉투를 낚아챘다.

나는 간식 봉투를 넘기고 집에 쌓인 작품들을 둘러봤다.

'그런데 어째 작품들이 다들 괜찮은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친구들에게 너무 관대한 건지도 모르겠다.

모두 놀이처럼 설렁설렁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작품들이 내 눈에는 전부 꽤 좋아 보였다.

"맞다. 나 전시 제목 생각났어요."

나는 이주원.

아이디어의 남자.

그래서 전시의 제목을 생각해봤다.

"뭐?"

유나가 구구콘 포장을 벗기며 성의 없이 물었다.

그래. 어차피 보러 오는 사람도 없을 전시니까.

그러니 전시제목보다는 눈앞의 구구콘이 더 중요하겠지.

살짝 외로웠지만 나는 크게 외쳤다.

"성북동 가족 A"

연극이나 영화에 단역들을 인물 A, 남자 B, 그런 식으로 부르곤 한다.

이번 전시도 마치 단역처럼, 흔하고 평범한 한 가족을 묘사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성북동 가족 A라고 부르면 어떨까?

"괜찮은 생각인데?"

와사삭.

김태민이 한 손에는 탱크보이를 들고, 한 움큼 고소한 맛 꼬깔콘을 입에 넣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래, 이런 전시의 제목이 뭐가 중요하겠어.

날씨가 더우니까, 눈앞의 탱크보이가 더 중요하겠지.

그렇게 만장일치로 우리 전시의 제목은 '성북동 가족 A'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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