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종강 파티 □
그렇게 쓸쓸한 홀애비 생활에 적응할 무렵.
나는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다.
학교에서 공익 근무도 열심히 하고.
하이 유나와 5DE, 원 디자인까지.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공부까지 했다.
'바빠서 차라리 다행이군.'
그렇게 열심히 살다 잠깐 쉴 때.
어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1년이 참 길구나.
1년도 아니다.
이제 7~8개월만 참으면 공익도 끝나고 유나도 돌아온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으면 다시 유나랑 같이 학교도 다닐 수 있고, 졸전도 할 수 있겠지.
그때였다.
띠리리링.
'어? 이 인간이 왜?'
전화를 건 사람은 뜻밖의 남자.
바로 김대성이었다.
"어, 대성이 형. 웬일이에요?"
"웬일은 무슨. 전화할 수도 있지."
전화야 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딱히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허전한 건지, 오늘은 솔직히 김대성도 반가웠다.
"주원아, 됐고. 나와라. 지금 종강 파티 중이거든."
"종강 파티요?"
그러고 보니 지금은 6월이었다.
한창 종강 파티할 시즌.
참고로 김대성은 벌써 군대를 다녀와서 지금은 3학년이었다.
"응. 지금 같이 수업 듣는 후배들이랑 술 마시다가, 내가 너랑 친하다고 했거든. 같이 조별과제도 하고, 방송에도 나가서 내가 돕기도 하고 그랬잖아. 그렇게 말했더니 후배들이 너 보고 싶다고 난리야. 너 후배들 대면식 때도 한 번도 안 왔잖아."
대면식?
한국대 서양화과에서 거기 가는 사람도 있나?
그나저나 김대성과의 술자리라니.
아마 평소라면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나는 외로운 기러기.
수진 선배는 연기하느라 바쁘고.
김태민은 현역 복무중이고.
한철이는 진짜 한국대 생이라 바쁘고.
정화 선배는 졸전과 일을 병행하느라 바쁘고.
그래서 결국 김대성의 종강 파티로 향했다.
'뭐, 나도 후배들 좀 알고는 있어야 하니까.'
또 어떤 어린 그림쟁이들이 입학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차피 내가 사는 곳이 학교 근처라서 그들이 있는 곳이 멀지도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술집.
"와아! 진짜다, 진짜 오셨다! 주원 선배님!"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어서 여기 앉으세요!"
"안녕하세요! 방송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미남이세요!"
이런.
후배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나는 호프집 소파의 중앙 상석에 앉았다.
'내가 이런 자리에 앉다니.'
게다가 선배님, 오빠라고 부르며 친하게 구는 어린 후배들.
두 번의 생을 통틀어 처음 겪는 낯선 경험이었다.
이주원, 참 많이 컸다.
"거 봐. 내가 말했지? 내가 부르면 내 절친 주원이가 달려온다고."
'이 인간 나를 팔고 있었구나.'
게다가 절친이라니?
절친은 아니고 그냥 친으로 하자.
김대성이 거만하게 말하자, 후배 하나가 김대성의 잔에 맥주를 채웠다.
"안녕하세요. 오빠. 제 이름은 이정원이고요, 영 아트 때부터 오빠 팬이었어요. 전설의 선배님을 직접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귀엽게 생긴 여학생이 자기소개를 하며 내 잔도 채웠다.
그런데 내가 전설이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오빠들은 전설 맞죠. 그리고 우리 학교의 영웅이에요."
"영웅? 내가?"
"그렇죠. 원래 사람들이 한국대 서양화과를 뒤에서 까잖아요. 이론만 빠삭하고 실기는 약하다고. 그리고 그림 천재들을 뽑아서 바보를 만들어 졸업시킨다고 하잖아요."
확실히 그런 말이 있긴 했다.
한국대 서양화과는 들어가기는 정말 빡세다.
하지만 아웃풋은 입학 때만큼 화려하진 않았다.
"하지만 태민 오빠랑 주원 오빠랑 팀 수진이 방송에 나가서 이 학교, 저 학교, 다 무찌르고, 기성 예술가들도 무찌르고 떡 하니 우승까지!"
"맞아요. 저는 오빠들 보려고 일부러 대면식까지 갔는데, 만나지도 못하고."
"팀 수진 언니들도 너무 예쁘잖아요. 저 진짜 하이 유나 단골이에요! 보세요! 제 파우더도 5DE에요!"
"그거 아세요? 우리 학번 남학생들 중에는 오빠들이랑 같이 졸전하고 싶다고 군대 미루겠다는 애들도 있어요."
방금 전까지 나는 여자 친구를 미국에 보낸 쓸쓸한 기러기 공익이었다.
하지만 나도 역시 인간.
갑자기 귀여운 후배들이 술까지 따라주며 사방에서 찬양을 퍼붓고 있었다.
그러자 조금씩 내 마음에도 봄바람이 불었다.
'귀엽긴 귀엽구나. 나랑 유나도 이렇게 풋풋할 때가 있었지.'
그때였다.
"너희들 말이야. 그걸 알아야 해. 주원이가 방송에서 보여준 모습은 진짜 주원이의 극히 일부일 뿐이야. 내가 직접 겪은 주원이 일화를 하나 말해 줄까?"
김대성이 목소리를 깔고 폼 잡으며 말했다.
나의 일화?
이 인간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나도 궁금했다.
"네! 말해주세요! 빨리요!"
아기 참새 같은 귀여운 후배들이 일제히 짹짹거리며 김대성의 이야기를 재촉했다.
"좋아.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내가 처음 주원이를 만난 건 이준성 교수의 수업시간이었어. 참고로 이준성은 교수의 탈을 쓴 악마라고나 할까? 너희들도 그 이름을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김대성은 마치 전설을 읊는 음유시인처럼 느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한국대 서양화과는 선배나 후배 관계를 별로 중요시하지 않지. 중요한 것은 오직 능력. 그래서 나와 주원이의 첫 만남은 썩 유쾌하진 않았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경쟁은 우리의 숙명 같은 거니까, 선배인 내가 이해 해야지.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이준성 교수가 조별 과제를 선언한 거야."
어허, 이 인간이 자기 기억을 조작하고 있구나.
김대성과 나의 첫 기억이 유쾌하지 않았던 것은 절대 나의 경쟁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김대성이 대성병지이기 때문이었다.
난 애초에 김대성을 경쟁상대로 여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꿋꿋하게 김대성은 자기 이야기를 이어갔다.
"특히 이준성은 악랄하게 학생들을 경쟁시키는 것으로 유명하지. 우리의 상대 조는 그 유명한 김태민과 한유나. 너희들도 알고 있겠지? 너희들이 방송에서 본 그 팀 수진의 주력 2명이지."
"네! 알아요. 태민 오빠랑 유나 언니!"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빨리 말해주세요!"
후배들의 리액션이 상당히 훌륭했다.
교수들에게 예쁨 받겠군.
역시 대학을 다니면 결국 리액션이 늘게 된다.
"김태민이야 원래 유명하지. 너희들도 김용철 작가를 알고 있겠지? 하지만 김태민 못지않게 한유나도 위험한 녀석이야. 너희들은 한유나를 쇼핑몰 모델로만 알고 있겠지. 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사실 한유나는 그림 실력과 성깔로도 유명하지. 김태민과 한유나. 김태민이 그림의 사자라면, 한유나는 그림의 암호랑이야. 나와 주원이, 그리고 동민이 형은 함께 팀을 이뤄 이 두 그림괴물과 싸워야 했던 거야."
상당히 조작되고 편파적인 기억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지난 이야기를 들으니 감개무량했다.
게다가 비록 김대성의 목소리로 듣긴 했지만, 유나의 이름을 들으니 무척 반가웠다.
"사실 주원이도 꽤 실력파야. 방송에선 잘 안 나왔는데, 주원이는 김태민과 한유나를 상대로 몇 번이나 1위를 찍었지."
"오올, 역시 주원 오빠."
"오빠, 멋있어요."
내가 1위를 하긴 했지.
후배들의 열광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처음엔 이준성의 성향을 이해 못했지만, 결국 나도 1위를 먹었지. 그러니까 주원이와 나, 김대성은 사실 이준성 교수의 에이스, 이준성 교수의 예술적 아들들이라 볼 수 있었지. 뭐, 동민이 형 실력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 세 사람은 그 동안의 경쟁심을 잠시 접어두고, 그림괴물들과 싸우기 위해 잠시 단결했던 거야."
나는 그렇게 김대성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에 온갖 헛소문들이 어떻게 퍼져 나가는지를 알게 되었다.
강남 학원의 전임강사 남동민을 '그럭저럭'으로 만들어버리다니.
그래도 세상물정 모르는 후배들에겐 김대성의 허풍이 통했는지, 술자리는 계속 길어졌다.
그렇게 김대성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주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호프집의 카운터로 가서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할게요."
돈 잘 버는 전설의 선배니까, 후배들 종강 파티 비용 정도는 계산해 줘야지.
그리고 유나가 없어서 울적했는데, 잠시 기분 풀이도 되었다.
하지만 이런 떠들썩한 자리는 내게 맞지 않았다.
그리고 어린 후배들의 찬양으로는 유나의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았다.
"오빠, 벌써 가시게요?"
"응?"
누군가 했더니 아까 자기를 소개했던 이정원이라는 아이였다.
"오빠, 더 있다 가시면 안 돼요? 저도 그렇고, 제 친구들 전부 주원 오빠 보려고 이제까지 기다린 건데. 먼저 들어가시면 어떡해요. 같이 놀아요."
"아니야. 난 들어가 봐야지."
"오빠, 그러지 말고요. 같이 놀아요. 네?"
"다음에 학교에서 보자. 술 너무 먹지 말고."
난 그렇게 요란한 술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학교 이야기를 들으니 반갑구나.
조만간 김태민 면회나 한 번 더 다녀와야겠다.
그렇게 터덜터덜 혼자 쓸쓸히 집으로 걸어가는데.
응?
누군가 익숙한 실루엣이 내 집 앞에 서 있었다.
'어떻게 지금 여기에······'
유나였다.
유나가 캐리어까지 끌고 내 집 앞에 서 있었다.
어떻게?
왜 지금 유나가 여기 있는 거지?
미국에 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한유나?"
"주원아!"
그리고 유나가 내게 달려와 안겼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여기 있어?"
"몰라. 너무 보고 싶어서. 어떻게 며칠 연휴가 만들어 지길래, 그냥 무작정 들어와 버렸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매일매일 이렇게 유나가 나타나줬으면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이렇게 거짓말처럼 유나가 정말 와주다니.
"잘 왔어."
"뭐야? 미국서 달려왔는데 반응이 겨우 그게 다야?"
나는 대답대신 유나를 한 번 더 끌어안았다.
유나를 사귀면서 지금이 제일 행복한 순간이었다.
"잘 왔어. 사실은 너무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어."
"나도."
그리고 우린 그렇게 한참 끌어안고 있었다.
겨우 며칠 쉬는 동안 나를 보러 이렇게 멀리 바다를 건너 날아오다니.
꽤 힘들었을 텐데.
비싼 비행기 티켓 값도 조금 아깝긴 했지만.
'뭐, 그 까짓 거. 옷 몇 벌 더 팔면 되지.'
그때 문득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유나야. 너 한국에 온 거 유미가 알아?"
"응? 유미? 모르지. 말하고 들어오면 엄마한테 야단맞을까봐 몰래 들어왔어."
그렇다면?
"유나야. 어서 우리 집으로 들어가자. 넌 지금 미국에 있는 거야."
그동안 유미의 감시를 피해 몰래몰래 유나를 만나느라 참 감질났었다.
하지만 유나가 아직 미국에 있는 걸로 하면 우린 며칠간 마음껏 같이 지낼 수 있었다.
유나는 곧 내 의도를 알아챘다.
"이주원, 천잰데? 지금 기분이라면, 한 달 정도는 네 빌라에 숨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한 달은 너무 했고, 며칠만 같이 지내자.
"나 공익도 휴가 낼까?"
"휴가 낼 수 있어?"
그렇게 우린 사이좋게 집으로 들어갔다.
만약 내가 김대성과 후배들과 술자리에 남아서 노는 것을 선택했다면?
그랬다면 유나와 보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뺏겼을 것이다.
남들에겐 대단한 일이 아닐지 모르겠지만.
나는 유나와 함께 보낼 수 있는 며칠이 세상 어떤 것보다 소중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