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새 집 □
김대성의 강렬한 카리스마와 함께 무대 인생팀의 일주일이 스크린에 재생되었다.
"으으······"
나는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저었고, 유나와 수진 선배는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무대 인생팀도 일주일간 열심히 과제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여섯 명의 심사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대 서양화과 학생들과 크리틱을 했다.
김대성, 남동민, 이혜란 등등이 우리를 돕기 위해 출연했다.
'아쉽군.'
생각보다 무대 인생팀의 과제는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다.
그림을 포함해 몇 개의 과제를 해왔지만, 대부분 진부하고 촌스러웠다.
오랫동안 유화를 그리지 않았고, 일에 치여 살았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에겐 잘 된 일인데, 썩 기쁘진 않았다.
크리틱의 마지막 차례.
스크린 안에서 무대 인생팀의 리더인 김영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대 인생팀은 어떤 과제는 같이 하고, 어떤 과제는 각각 했는데 마지막 발표는 김영오 혼자인 모양이었다.
"제가 한 과제는 '인생 그림 계획'입니다. 그러니까 저한테는 '인생 무대 계획'이겠죠. 저는 이제 곧 서른이 됩니다."
김영오는 약간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사실 저도 목표가 있었습니다. 서른 살이 되면 괜찮은 직장을 갖고, 결혼할 사람도 구하고, 전세방도 구하고 그렇게 안정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무대를 쫓아다니는 삶은 서른까지만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해가 바뀌면 서른인데, 생각대로 이룬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김영오는 PPT를 띄웠다.
거기엔 김영오가 이제까지 살아온 과정이 간단히 적혀 있었다.
"그래서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대체 난 뭘 했길래 이 나이가 되도록 하나도 이룬 게 없을까? 무작정 연극이 좋아서 연극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난 미대생이니 연기가 아니라 무대 미술을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더 많은 무대 일을 찾아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저를 받아주는 곳은 별로 없었습니다. 제대로 돈을 주는 곳도 별로 없었고요."
PPT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건설현장], [중국집 배달], [세차장], [편의점], [목욕탕 청소]
[지하철 터널 청소], [모텔 청소]
등등 거기엔 십여 가지의 아르바이트가 적혀 있었다.
"극단의 일정에 맞춰야 하니까 한 가지 일을 오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돈이 필요하니까 6년간 거의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 김영오는 제법 부지런히 살긴 했구나. 멍청해서 이룬 게 없어서 그렇지, 게을렀던 건 아니구나. 제법 잘 살아왔구나."
거기까지 말하고 김영오의 음성이 떨려 왔다.
"원래는 서른까지만 하고 답이 보이지 않으면 극단 일을 관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대 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을지, 이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어디선가 최선을 다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계획을 세울 만큼 영리하진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대신 지금까지의 저를 믿기로 했습니다. 이게 제 인생 무대 계획입니다. 그리고 그건 저희 무대 인생팀 모두 비슷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친구가 되었겠죠."
여기까지가 무대 인생팀의 일주일이었다.
영상이 끝나고 스튜디오의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무대 인생팀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다섯 명의 친구들은 뭔가 후련한 표정이었다.
"네, 두 팀의 영상을 잘 봤습니다. 두 팀 모두 수고하셨고요. 그런데 저는 교수님 역할을 해주신 한국대 학생 분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네요. 일단 제가 한국대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모든 선입견을 그분이 한방에 날려버렸네요."
대성 선배가 한 건 했다.
시청자들이 한국대에 대해 오해하면 안 될 텐데.
'시청자 여러분, 김대성은 아주 특수한 경우입니다.'
김경아가 웃으며 다시 영 아트를 진행했다.
"그럼 박경원 큐레이터님이 두 팀의 심사평을 말씀해주시겠습니다."
영 아트의 메인 심사위원은 세 사람.
유예철 교수, 박경원 큐레이터, 국선정 교수.
그 중 박경원은 한국에서는 세 손가락에 꼽히는 전시 기획자였다.
"일단 두 팀의 발표 모두 즐겁게 봤습니다. 어차피 이번 주제는 '상대의 분야를 배우기'였습니다. 처음부터 높은 완성도를 기대하기는 힘들었겠죠. 그래도 두 팀은 끝까지 최선을 다 해주었고, 그래서 우리 심사위원들도 무척 만족스러웠습니다. 일단 무대 인생팀."
박경원이 호명하자 다섯 명의 남자가 클로즈업 되었다.
"김영오씨. 자기를 믿겠다고 하셨죠. 예술가는 늘 불안과 싸웁니다. 불안은 매번 다른 이유, 다른 모습을 하고 찾아옵니다. 하지만 이겨내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바로 자신을 믿는 것이죠. 김영오씨. 앞으로도 응원하겠습니다."
이번엔 화면에 우리 여섯 명이 잡혔다.
"그리고 팀 수진. 예쁘고 귀여운 팀이었죠. 무대를 만들라고 했더니 연극까지 만들어 올렸죠. 맞아요. 연극이 올라가지 않은 무대는 좀 슬프긴 해요. 뜬금없지만,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인간이 처음 그림을 그린 지, 수천 년이 지났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동안 거의 대부분의 예술적 시도가 전부 이뤄졌을 겁니다. 앞으로의 예술은 진부한 과거의 답습일 뿐일지도 모르죠."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박경원은 유명한 평론가답게 길고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래서 우리가 과거로부터 한 걸음 더 나가려면, 치밀하게 고민하고 또 욕심을 부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팀 수진이 보여줬습니다. 보다 나은 것을 향한 욕심. 완성을 향한 욕심. 저는 팀 수진의 그 욕심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박경원은 우리가 무대에서 끝내지 않고, 연극까지 올린 점을 높게 평가했다.
국선정 교수가 박경원의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저 역시 팀 수진의 발표를 즐겁게 봤습니다. 팀 수진은 아주 영리해요. 자기들이 가진 장점과 매력을 잘 알고, 그것을 적재적소에 이용할 줄 알아요. 그리고 힘든 과제에 서로를 응원하며 즐겁게 임했고요. 예술가는 영리해야 해요. 그리고 즐거워야 하죠. 그럼 벌써 다 된 거나 마찬가지죠. 지난주에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한 번 더 하겠습니다. 팀 수진 여섯 명의 앞으로가 더욱 기대됩니다."
드디어 김경아가 결과를 발표했다.
심사위원 평가 5:1.
우리의 승리였다.
결과가 발표되자 김영오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위로했다.
'역시 전생의 나보다 나아. 그것도 훨씬.'
전생의 나는 매번 좌절하면서도 마음껏 울지도 못했었다.
마음껏 울려면 그전에 먼저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늘 지쳐 있었고, 미리 겁을 냈다.
그래서 시원하게 울 자격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울어도 위로해줄 친구가 없었다.
무대 인생팀은 울 수 있는 자격도 있고, 위로해줄 친구도 있으니까 나보다 훨씬 나았다.
그러니 분명 자기들의 자리를 잘 찾아갈 것이다.
* * *
녹화가 끝나고 팀 수진 여섯 명은 각자 집으로 가서 푹 쉬었다.
일주일간 힘들었으니 휴식도 중요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혼자 새집을 청소했다.
짐이라고 해봤자 가방 몇 개가 전부라서 이사라고 부를 것도 없었다.
띵동.
문을 열자 유나가 서 있었다.
"왜 벌써 왔어? 점심이나 같이 먹자니까. 아직 청소도 다 못했는데. 집에 가서 좀 더 자."
"그래서 일찍 왔지. 바보야. 청소 도와줄게."
유나가 의리가 있었다.
덕분에 청소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15평 빌라.
부엌 하나, 거실 겸 방 하나. 그리고 침실 하나.
대단한 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스무 살 자취생에겐 제법 근사한 공간이었다.
원래는 휴학하고 포항에 내려갈 생각이었지만, 서울에서 공익으로 근무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구한 전셋집.
제법 뿌듯했다.
"주원아."
"응?"
"이제 가구 사러 가자."
"가구?"
지난 생의 나는 가난했으니까 가능한 짐을 만들지 말자는 주의였다.
"너 이제 돈도 많잖아. 매일 일, 학교, 일, 학교 그렇게 살았으니까. 가구도 갖춰 두고 집에서는 사람답게 살아."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내가 너 이럴 줄 알고 일찍 나온 거야. 어서 일어나. 살림살이 사러 가자."
하긴 집이 텅 비어서 우리의 목소리가 동굴처럼 울리고 있었다.
사람답게 산다?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먼저 가구점에 가서 옷장과 책장을 주문했다.
"이 티 테이블 예쁘다. 이것도 사자."
과연 나를 생각해서 가구를 사러 온 걸까?
아니면 단순히 유나 자기가 가구 쇼핑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구 배달 시간을 확인하고 다음은 전자 대리점.
전자레인지와 커피 메이커, 토스터기와 냉장고, 세탁기도 주문했다.
전생의 나는 가전제품은 항상 가성비를 따지고 샀었다.
그래서 딱히 고를 여지가 적었는데.
하지만 오늘은 유나가 꼼꼼히 살펴보고 디자인까지 비교했다.
"이제 믹스커피 말고 커피 내려서 마셔."
"토스트는 잘 먹지도 않는데."
"이제 아침 굶지 말고 빵이라도 먹으라고."
"여자친구분이 참 꼼꼼하세요. 남자친구가 행운아시네요."
나름 유명인인 우리를 못 알아보고 전자대리점의 판매원이 유나를 칭찬했다.
그리고 백화점으로 가서 냄비들과 식기도 샀다.
지난 생에 잡화는 항상 천원샵이었는데.
유나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그릇들을 색깔을 맞춰 골라 담았다.
그런데 의문이 생겼다.
"유나야. 그릇이랑 수저랑 슬리퍼까지 왜 항상 두 개씩 사? 하나는 내 꺼, 하나는 니 꺼야?"
"아니. 너랑 태민이 꺼야."
쩝.
결국 수건이랑 식탁보랑 냅킨이랑 꽃병까지 샀다.
남자의 자취방에 꽃병이라니.
그리고 이불가게.
유나는 요와 이불과 베개를 골랐다.
"열다섯 뼘이요. 음, 한 번 보자. 내 손이······"
유나는 언제 창문 크기까지 재었는지 내 방의 커튼도 주문했다.
"그런데 왜 다 네 취향으로 골라?"
"어차피 너는 꾸미고 살 생각이 없었으니까, 하는 수 없이 내가 골라 주는 거야."
내가 소심하게 항의했지만, 유나는 가볍게 무시했다.
분명 나를 걱정해주는 척하며, 집 꾸미기 놀이를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무튼 저녁 무렵에 주문한 짐들이 도착하고 집이 차기 시작했다.
이제는 우리 목소리도 울리지 않았고, 유나 말대로 사람 사는 집처럼 보였다.
유나를 믿고 맡기길 잘했는지 집이 제법 근사해졌다.
"나도 네 방처럼 야광별 사서 붙일까?"
"아니. 여긴 천장이 넓으니까 빔 프로젝트를 사. 그래서 누워서 영화를 봐."
그렇게 내 방 천장의 용도까지 유나가 결정해 버렸다.
길고 피곤한 하루였지만, 그래도 꾸며진 집을 보니 꽤 보람 있었다.
그래서 뜬금없이 질러 버렸다.
"유나야. 오늘 여기서 자."
유나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새 집이라서 너무 낯설어서 그래."
유나는 나를 때릴 것처럼 주먹을 쥐었다.
좋다. 얼마든지 맞아주마.
나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
"오늘 진짜 춥잖아. 이 집이랑 네 자취방 따로 보일러 돌리면 난방비도 두 배로 나가고, 그만큼 환경도 오염되고······"
푹.
기어코 유나의 주먹이 내 어깨에 꽂혔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수진 선배도 없는데 혼자 네 방에서 뭐하게? 여기 뽀송뽀송한 새 이불에 누워서 같이 만화책 보자. 네가 고른 이불이 어떤지 직접 테스트는 해 봐야지."
유나의 얼굴에 살짝 갈등이 비쳤다.
나는 공격의 피치를 올렸다.
"너 슬램덩크 9권 보다가 잠 들었잖아. 슬램덩크는 10권부터가 진짜야. 강백호와 이정환이 본격적인 정면 승부를 벌이거든. 그리고 귤이랑 아이스크림도 사올게. 귤을 먹다 질리면 아이스크림을 먹고. 아이스크림 먹다 텁텁하면 다시 귤을 먹는 무한 반복에 빠지는 거야."
유나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이윽고 유나가 말했다.
"베리베리랑 자모카 아몬드, 민트 초코 넣어서 하프 갤런으로 사 와."
"예스!"
맘속으로 조용히 외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유나가 나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네가 만화책 빌리는 동안, 난 집에 가서 좀 씻고, 옷도 갈아입고 다시 올게. 그리고 아침 장도 봐올게."
얼마든지.
"같이 나가자."
"그런데 너, 진짜 나쁜 생각 하면 안 돼."
유나가 마지막으로 내게 다짐을 받아내려 했다.
나쁜 생각? 그게 뭐죠?
"안심해. 발만 잡고 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