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08화 (108/203)

■ 108. 옷 포장 □

만화책, 귤, 아이스크림, 군고구마.

버터구이 오징어와 캔맥주.

그리고 유나가 좋아하는 소주까지.

한아름 안고 집에 도착했다.

아직 유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마음이 변한 건 아니겠지?'

아니길.

아닐 거다.

원래 여자는 오래 걸리니까.

유나를 기다리며 나도 샤워를 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길고 힘든 하루였다.

샤워를 마치고, 거실에 향초를 피웠다.

그리고 노트북으로 음악도 틀었다.

똑똑.

왔다.

드디어 기다리던 유나가 왔다.

문을 열자 유나는 양손 가득 많이도 싸왔다.

"집에 있는 반찬이랑 조미료들 챙겨왔어. 엄마가 보내준 젓갈도 있어. 아직 마트가 안닫았길래 콩나물이랑 생선이랑 두부도 사왔어."

유나가 뿌듯해하며 말했다.

내일 아침에는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

마음속이 행복으로 차올랐다.

"나 빨리 만화책!"

유나는 패딩과 모자를 벗고 츄리닝 차림으로 이불 위에 뛰어올랐다.

"아, 진짜 푹신해. 새 이불 사각거린다. 너무 좋아."

그리고 배부른 강아지처럼 이불 위를 뒹굴었다.

"이불 맘에 들면 너도 사. 너도 이제 부자잖아."

유나와 나는 하이 유나를 반반씩 가지고 있다.

쇼핑몰이 너무 커져 버려서 직원도 늘어났고, 옷을 들여오는 단위도 커졌다.

그래서 회사에는 거액의 현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충분한 현금을 비축하고도 아마 12월 정산을 하면 유나와 내가 각각 1~2천만 원은 거뜬히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아앙. 몰라. 내 방은 나중에 생각할래. 지금은 새 이불에서 뒹굴며 만화책 볼래."

이렇게 좋아하다니.

처음 자고 가라고 말했을 때, 나를 죽일 것처럼 노려봤었다.

역시 여자들은 다 거짓말쟁이다.

그렇게 한 두 시간.

우린 캔맥주를 홀짝 거리며, 쥐포와 오징어를 먹고, 귤도 까먹고.

그동안 강백호는 리바운드도 하고, 틈틈이 슛 연습도 했다.

"으으"

엎드려서 만화책을 보니까 목이 아픈지 유나가 인상을 썼다.

유나도 아침부터 계속 나랑 같이 청소하고 돌아다녔으니 꽤 무리한 셈.

나는 노력상점의 [안마]를 구매했다.

"유나야. 내 앞에 앉아. 너는 만화책 보고, 내가 어깨 주물러 줄게."

타닥타닥.

향초의 나무심지가 타고.

토닥토닥.

나는 유나의 어깨를 두드리고.

사락사락.

유나는 만화책의 책장을 넘겼다.

평생 이렇게 지낼 수 있으면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사귀자고 말해야 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시작할 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유나는 원래 그런 성격도 아닌데, 가끔 나한테 유독 사납게 굴기도 한다.

그건 그만큼 어색한 걸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떻게 해야 친한 친구에서 애인으로 어색하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까?

한마디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 한마디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맞다. 주원아."

"응?"

"너 월말에 나한테 거액을 입금할 거라고 했잖아."

"응."

"그 돈 나한테 주지 말고 네가 관리해주면 안 돼? 내가 돈 필요할 때마다 용돈처럼 조금씩 주고."

"왜?"

"그냥.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어. 아직 그 숫자들을 보고 싶지가 않아."

"부모님은? 부모님한테 관리해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 아빠 엄마도 마음의 준비가 안 되셨을 거야. 내가 갑자기 큰돈을 건네면 우울해하실 거야. 우리 딸이 갑자기 커버렸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런가?"

돈을 건네면 우울해진다고?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 유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런데 날 믿을 수 있어?"

"당연히 믿지."

그 말에 기분이 좋아서 헤벌쭉 웃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유나야,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어떻게?"

"우리 쇼핑몰이 계속 잘 되면, 내가 관리해야 할 네 돈이 계속 많아질 거잖아. 그리고 우린 회사를 반씩 가지고 있는데, 회사가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그러니까 우리가 그냥 이참에 사귀어 버리면 어떨까?"

잠시 유나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스으윽.

여고생 귀신처럼 유나의 목이 나를 향해 돌아갔다.

유나는 이마를 찡그리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이랑 돈 계산하기 편하도록 사귀잔 말이야?"

"그런 이점도 있고. 또 우린 말도 잘 통하고, 만화책 취향도 비슷하고, 입맛도 비슷하고, 학교도 같으니까 사귀면 여러 모로 편하지 않을까."

"거절한다. 이주원."

"아니, 그게 아니라. 유나 네가 너무 예쁘고. 또 나한테 너무 소중하니까······"

"늦었어. 이주원. 오늘은 끝났어. 나는 이제 잘 거야."

그렇게 첫 고백은 까여버렸다.

그래도 다행히 유나가 화나거나 한 것 같진 않았다.

잠시 후.

유나는 양치도 하고, 자명종을 맞춘 후 이불 안에 들어갔다.

"이주원. 나쁜 생각 안 하기로 약속한 거 잊으면 안 돼. 나 잘 거니까, 불 꺼."

난 불을 끄고 유나 옆에 누웠다.

"유나야. 그러지 말고 이제 곧 크리스마스니까······"

"시끄러. 나 잠 들었어. 쿨쿨."

"유나야. 제발."

"나랑 사귀고 싶으면 정말 감동적인 고백을 다시 준비해 와."

"그럼 사귈 거야?"

"그때 봐서. 아무튼 오늘은 끝났어."

유나는 단호했다.

"그럼 오늘 밤 안고 자는 건?"

"그것도 안 돼. 발도 안 돼."

"그럼 자기 전에 이마에 뽀뽀하는 건?"

"안 돼. 전부 안 돼."

안 되기는.

난 유나의 작은 머리를 두 손으로 쥐고 내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따뜻한 이마 위에 내 입술을 꾸욱 눌렀다.

* * *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원래 연말과 연휴는 극단들의 성수기였다.

하지만 올해는 경기 탓인지, 아니면 공연 탓인지 좋은 친구들의 티켓 판매는 저조했다.

대형 극단의 연극이나, 아이돌이 출연하는 뮤지컬들은 연일 만원 사례였다.

연극 쪽도 빈익빈 부익부는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극단 좋은 친구들의 회식날.

하지만 1차에서 끝났다.

재작년까지는 2차, 3차 계속 달렸다.

그리고 큰 금액은 아니라도 연말 보너스도 있었다.

"우리 이제 뭐하냐."

"그러게."

김영오, 박승건, 최진호는 터덜터덜 밤길을 걸었다.

집에 들어가 봤자 차가운 자취방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밤거리에 할 일이 남은 것도 아니었다.

주머니도 텅텅 비었고, 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때.

김영오의 전화기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아, 영오씨. 저 박경원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예. 심사위원님."

"심사위원은 무슨. 너무 늦게 전화했나요? 아니죠? 극단 사람들은 원래 아침에 자잖아요."

"네. 그렇죠. 괜찮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좋은 소식이 있어서 빨리 말해주고 싶어서 곧바로 전화했어요. 극단 햇살 알아요?"

"햇살이요?"

햇살이라면 영화배우 출신의 극단주가 꾸리는 꽤 대형 극단이었다.

김영오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직접 이력서를 낸 적도 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내가 거기 대표랑 잘 아는 사이거든요. 이번에 거기 미술팀에 티오가 있대요. 그래서 내가 영오씨 소개를 했더니 면접을 보고 싶다고 하네요."

"저만요?"

"아뇨. 티오는 두 갠데, 일단 원하는 사람 다 데려와 보래요. 내가 전화 번호 찍어줄 테니까 내일 전화해서 약속 잡으면 될 거예요. 난 그냥 소개만 해주는 거니까, 면접 떨어져도 원망하기 없깁니다."

"물론, 물론입니다."

예전에 이력서를 냈을 때는 답도 없던 곳이었다.

김영오는 면접이 잡힌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올랐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김영오는 몇 번이나 자리에 서서 전화기를 쥐고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야?"

옆에서 박승건과 최진호가 궁금한 듯 쳐다봤다.

"그게······"

설명을 하려는 찰나.

띠리리리.

또 한 번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엔 아는 번호였다.

"어, 주원씨. 웬일로 이 시간에······"

"아, 너무 밤에 전화했나요? 아니죠? 다른 게 아니라 혹시 김제우 영화감독 아세요?"

"예? 알죠. 알죠.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네. 그분이 영화사 마당이라고 제법 큰 영화 제작사를 경영하시거든요."

"네······"

"다름이 아니라 그 영화사 산하에 세트팀과 미술팀을 충원하신다고 해서요. 제가 그쪽 일은 잘 몰라서, 연극이랑 영화랑 얼마나 다른지는 잘 모르거든요. 그런데 아무튼 형들을 추천했어요. 그래서 혹시 면접을 보실 수 있나 싶어서요."

이주원은 술자리에서 김영오 일행의 사정을 자세히 들었다.

그래서 원디자인의 단골이자 팬인 김제우 감독에게 요청한 것이었다.

"아, 예. 면접 보겠습니다!"

김영오는 전화기에 대고 크게 외쳤다.

영화 미술과 무대 미술은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겹치지 않으면 어때.

김영오는 모텔 청소부터 지하철 청소까지, 돈이 되는 일은 가리지 않고 했었다.

그러니 영화 미술 일이라면 감지덕지였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당겨 받은 걸까?

막막하던 연말에 갑자기 면접 풍년이 터져버렸다.

* * *

"안녕하세요. 팀 수진의 이수진입니다."

이수진은 TJ 미디어 로고가 찍힌 소형 카메라를 쥐고 있었다.

이제 다음 주부터 일반인 출연자와 시드 배정자가 겨루는 이른 바 본선 무대가 펼쳐진다.

그전에 출연자의 일상을 담아달라는 방송국의 요청이 있었다.

"음, 아시다시피 저는 서양화과 학생이고요, 쇼핑몰에서 알바를 하고 있습니다. 저희 학교는 내일 보여드릴게요. 방학이라서 팀 수진은 모두 쇼핑몰에 출근했거든요."

그리고 이수진은 카메라를 들고 쇼핑몰 사무실로 들어갔다.

"저희가 왜 쇼핑몰을 시작했냐면요. 저기 보이는 주원이가 원래 홈페이지 제작 알바를 했었거든요. 그리고 저기 있는 유나가 원래 옷을 좋아했대요. 그래서 둘이 동대문에 자주 놀러갔는데, 그러다 그냥 일을 저질러 버린 거죠. 참고로 둘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싸우는 사이입니다."

이수진은 넓은 사무실을 빙 둘러가며 촬영했다.

"저랑 정화는 일을 도와주러 왔다가 여기 눌러앉아 버렸어요. 태민이는 그냥 이유 없이 눌러앉았고요. 오, 마침 태민이가 옷을 포장하고 있네요."

그리고 이수진은 김태민에게 다가갔다.

"어, 누나?"

"태민아, 나 쳐다보지 말고 하던 일 계속 해. 내가 질문하면 대답만 해."

"네."

"태민이는 저희 쇼핑몰 옷 포장 에이스입니다. 새로운 직원이 들어올 때마다 태민이랑 1:1 승부를 하는데 지금 무패를 기록 중입니다. 김태민군. 옷 포장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어요?"

"넵. 먼저 스카치 테이프로 먼지를 떼어냅니다. 공장에서 갓 나온 옷은 생각보다 먼지가 많거든요. 그냥 손님께 보낼 수도 있지만, 새 옷을 받았을 때 손님의 설레는 기분을 지켜드리고 싶거든요. 그리고 쪽가위로 실밥을 제거하며 확인합니다. 혹시 불량은 없는지."

"김태민씨는 빠른 속도로 정확한 포장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비결이 있습니까?"

"네, 여러 옷을 다루다보니, 옷 종류에 따라서 계속 같은 자리에 불량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오, 그렇군요. 쇼핑몰에는 여러 일이 많은데, 왜 하필 포장을 선택하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옷을 포장하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석유에서 옷감과 실과 단추와 염료를 뽑아서 옷을 만들죠. 석유는 공룡의 뼈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구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한 벌의 옷이 됩니다. 한 벌의 옷 안에는 긴 시간이 담겨 있는 셈이죠. 그래서 옷을 포장하고 있으면, 옷과 나는 왜 하필 여기에서 만난 것일까. 대체 여긴 어디일까. 또 내 손을 떠난 이 옷은 어떤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일까."

김태민의 이야기를 듣던 이수진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같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이 옷들은 대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이수진! 태민이한테 휘말리지 말고 촬영 계속해!"

그러자 이수진이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들으셨죠? 방금 소리친 사람은 팀 수진의 다른 멤버인 김정화입니다. 항상 저를 감시하고 잔소리하는 나쁜 사람이죠. 대체 누가 쟤를 데려갈지 정말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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