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06화 (106/203)

■ 106화 생명 □

시간은 정신없이 흘렀다.

일주일은 짧은 시간.

무대 미술은 원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 같은 초보가 일주일 안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꼼꼼히 기본에 충실하기로 했다.

대신 할 수 있는 것에는 최선을 다했다.

예를 들어, 창문을 그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일일이 만들어 붙였다.

소품들도 발품을 팔아 정성들여 골랐고, 필요하면 리폼도 했다.

김태민이 스케치하면 내가 톱질을 하고, 수진 선배가 페인트를 칠했다.

일을 해보니 목공은 약간 남자들의 로망같았다.

소매를 걷고, 무거운 각목 묶음을 옮기거나, 두꺼운 각목을 톱질해서 잘라내면 자신이 원시시대의 강한 수컷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김태민도 마찬가지 인 듯.

"으랏챠!"

김태민이 큰 소리를 내며 무거운 판자를 들어 옮겼다.

"와! 태민이 터프해!"

정화 선배와 수진 선배가 박수를 치자 김태민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가끔 김태민이 순수한 소년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네버.

김태민도 알 거 다 알고, 여학생들의 환호를 좋아하는 똑같은 남자였다.

"야, 이주원. 딴생각 하면서 혼자 실실거리지 말고, 톱질할 때는 정신 똑바로 차려."

사납긴 하지만 역시 날 걱정해주는 사람은 유나 밖에 없다.

그리고 김태민은 방송국의 조명 감독에게 조명도 배웠다.

평소 연극에 관심이 많았는지, 김태민은 눈을 크게 뜨고 부지런히 배웠다.

김태민이 뭔가에 이렇게 집중하는 것은 옷 포장할 때 말고는 오랜만에 보는 듯 했다.

"나도 대학 다닐 때 연극부였다고. 어차피 복잡한 기술들은 배워도 지금 써먹지 못할 테니까, 조명으로 인물 따라가는 방법만 가르쳐 줄게. 연극에서 조명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야. 관객들의 시선이지."

옛날 생각이 나는지 조명 감독도 김태민을 열심히 가르쳤다.

우리가 무대를 만드는 동안, VJ들은 우리를 따라다니며 열심히 촬영했다.

[ 엄마, 만약 그 옷을 못 사면, 난 평생 시인의 옷을 가질 수 없게 돼요.]

[ 알겠다. 엄마가 바느질 일을 해서라도 그 옷을 사 줄게.]

수진 선배와 정화 선배가 미완성 무대 옆에서 연극을 연습했다.

연극이라는 게 원래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엔 망설이던 두 사람도 배역을 맡고 막상 연기에 들어가자 누구보다 신나게 연극에 몰입했다.

특히 수진 선배가 압권.

꼬마처럼 머리를 묶고 대사를 외치면 VJ들도, 스탭들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곤 했다.

김수희 작가가 웃으며 다가왔다.

"연극까지 하겠다니, 정말 멋진 발상이에요. 이게 방송에 나가면, 인터넷이 또 한 번 난리날 거예요. 이것 때문에 대본을 각색하겠다고 했군요."

김수희 작가는 우리의 대본 한 부를 받아서 꼼꼼히 읽어봤다.

"이걸 형원씨가 썼다고요? 대단한데요. 고생 좀 했겠어요."

"알아주시니 영광이네요."

원래 형원 선배는 여자가 말 걸어주면 좋아하는 습성이 있다.

"진심이에요. 제가 극작과 출신이거든요. 정말 깔끔하게 잘 썼네요."

"그래요? 극작과였군요. 그럼 절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형원 선배의 눈이 반짝였다.

이제 곧 형원 선배는 졸업하게 된다.

그리고 며칠 후면 크리스마스.

솔로인 남자 대학생이 가장 다급해질 시기였다.

"실은 제가 거의 완성한 장편 소설이 하나 있거든요. 이제 곧 공모전에 응모할 생각인데 한 번 읽어주시겠어요? 제가 커피를 살게요."

단지 소설을 읽어줄 사람이라면 나도 있고, 한철이도 있는데?

과연 형원 선배의 시도는 성공할 것인가?

"커피요? 장편을 읽어주는 대가로, 겨우 커피요?"

훗.

형원 선배의 얼굴 가득 번지는 미소.

"커피로 부족하다면 제가 술 한 잔 살게요."

김수희 작가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죠? 영 아트 촬영 중에는 출연자와 개인적으로 만날 수는 없어요."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형원 선배의 얼굴이 급 시무룩해졌다.

괜찮아요, 형원이 형.

크리스마스에는 우리랑 함께 보내요.

나도 있고, 한철이도 있고.

소설?

제가 얼마든지 읽어드릴게요.

그럼 저한테는 뭘 사주시겠어요?

그때 김수희 작가가 웃으며 한 마디 더 보탰다.

"영 아트 끝나면 생각해볼게요."

다시 한 번 형원 선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희망은 잔인한 법.

형, 속지 말아요.

그냥 형의 반응을 즐기는 거예요.

이리 와요.

형의 충실한 동생 이주원과 김한철이 있으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지났다.

아, 그리고 영 아트 2회가 방송되었다.

정작 출연자인 우리는 무대를 만드느라 방송을 보지도 못했다.

반응은 이번에도 대단한 모양.

시청률은 그냥 준수한 정도였지만, 출연자들은 또 한 번 화제가 되었다.

특히 우리들.

이번 방송은 벽화 그리기의 마무리 편.

형원 선배의 근사한 멘트와 고마워하는 달동네 주민들이 방송에 나왔다.

그리고 얼굴에 페인트를 묻히고 그림을 그리는 유나 등등.

하이 유나의 매출은 또 한 번 폭발했고, 직원들이 야근까지 해서 겨우 배송을 맞출 수 있었다.

* * *

이미연은 정기적으로 꼼꼼히 영 아트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기획한 프로그램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영 아트의 메인 PD인 김우철과 메인 작가인 최희영이 이미연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어때요? 그 한국대 팀은 4회전에 무사히 나가겠어요?"

"네,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한국대 팀이 아주 효자입니다. 지금 방송에 나간 1, 2회 에서도 반응이 아주 뜨겁습니다. 그리고 편집중인 2회차 경연에서도 압도적으로 이겼습니다."

1회차 벽화 그리기에서 김태민은 그림은 안 그리고 쓰레기만 날랐다.

그 생각을 하니 이미연은 또 한 번 부아가 치밀었다.

"3회전은요? 지금은 잘 하고 있대요?"

"네, 그 꼬마들이 아주 영리하더라고요. 상대편이 무대를 만들라고 했더니, 직접 극본까지 각색해서 연극까지 올리겠다고 했답니다."

"연극을요? 연기를 한다고요?"

최희영 작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직접 연기까지 하더라고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그 동화를 각색한 건데, 현장 분위기도 좋고, 꽤 볼만 합니다. 그 팀이 다 비주얼이 괜찮잖아요."

'하긴 태민이가 훤칠하게 잘 생겼지.'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라면 주인공이 어린 남자아이였다.

이미연은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주원이라고 했나? 확실히 영리하군. 태민이가 좀 아이 같은 그런 이미지가 있지. 모성본능을 자극한달까. 태민이가 무대에 오르면 난리 나겠군.'

이미연이 만족스런 미소를 짓자, PD인 김우철이 신나서 말을 보탰다.

"게다가 상대편이 우중충한 아저씨들이라 한국대 팀이 훨씬 주목받을 겁니다. 잘 편집하면 또 한 번 대박이 터질 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도 편집본을 미리 보내드릴까요?"

"아니에요. 이번엔 PD님을 믿을게요."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그래요. 최선을 다 해 주세요."

그리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 * *

"자! 드디어 세 번째 경연의 마지막 대결을 시작하겠습니다. 팀 수진 대 무대 인생! 먼저 팀 수진의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진행자인 김경아가 외쳤다.

이곳은 영 아트의 메인 스튜디오.

우리는 7일째에 여섯 명의 심사위원 앞에서 짧은 공연을 했다.

그리고 그 심사 결과가 오늘 스튜디오에서 발표된다.

먼저 팀 수진의 영상이 스크린에 흘러 나왔다.

시작은 우리가 무대를 만들고, 대본을 연습하는 부분부터.

그리고 곧 영상 속에서 우리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먼저 우리가 만든 무대.

완벽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

그리고 수진 선배와 형원 선배가 무대에 등장했다.

"뽀르뚜까 아저씨. 아저씨가 정말 내 친구라면 왜 우리 아빠에게서 나를 사지 않아요?"

"너를 사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조그만 악마예요. 그래서 가족들 모두 나를 싫어하는 걸요. 내 친구는 뽀르뚜까 아저씨 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단다. 너의 가족은 모두 너를 사랑한단다."

"아니에요. 우리 아빠는 나를 신나서 팔아넘길 거예요. 만약 아빠가 너무 비싼 값을 부른다면 내가 나중에 일해서 갚을 게요. 제발 나를 데려가 주세요."

형원 선배는 뽀르뚜까 아저씨.

정화 선배는 엄마.

수진 선배는 제제.

유나는 제제의 동생 루이스.

수진 선배와 유나는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분장을 하자 정말 남자 꼬마 아이처럼 보였다.

두 사람이 대사를 주고받자 스튜디오 안이 순식간에 흐뭇한 미소로 가득 찼다.

솔직히 수진 선배 말고는 모두 연기가 많이 어설펐다.

'하지만 뭐, 우리의 목적은 무대를 잘 보여주는 거니까.'

이걸로 충분했다.

오히려 살짝 어설픈 쪽이 시청자들에게 호감을 살지도 몰랐다.

나와 김태민은 배역을 맡지 않았다.

나는 무대 배경을 옮기는 일과 잡일 전부를 맡았고, 김태민은 조명을 담당했다.

그리 길지는 않은.

약간 영화의 예고편이랑 비슷한 우리의 짧은 연극이 끝나고, 우리 팀의 영상이 마무리 되었다.

영상이 끝나자 잔인한 공격으로 유명한 평론가 하종호가 마이크를 붙잡았다.

"분명 상대편의 요구는 '무대 만들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팀 수진은 연극까지 했죠. 시험으로 치면 정답 외에 추가로, 필요도 없는 긴 풀이까지 적어둔 겁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렇게 관심을 받고 싶었습니까?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상대를 이기고 싶었습니까? 한국대 생들은 역시 욕심이 많군요."

하종호의 날카로운 공격.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분명 우리에겐 그런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형원 선배가 있다.

형원 선배 출격!

"하종호 평론가님이 잘못 알고 계시군요. 우린 무대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무대는 연극을 올리기 위해 만들어집니다. 연극이 올라갈 때, 진짜 살아있는 무대가 되는 것이죠. 심사위원에게 보이기 위해 만든 무대는 죽은 무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쯤에서 형원 선배는 카메라를 쳐다보며 애수어린 표정을 지었다.

"겨우 일주일을 함께 했지만, 우린 우리의 무대에게 진짜 생명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설퍼도 직접 연극을 한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무대는 끝까지 미완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무대에게 미안했을 것입니다."

역시 형원 선배.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럴듯한 말을 지어냈다.

'우리가 그런 이유로 연극을 했었나?'

같은 편인 나조차 속아 넘어갈 뻔했다.

형원 선배의 답변에, 공격했던 하종호조차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형원 선배는 사실 그림을 그렸어야 했던 게 아닐까?'

형원 선배라면 점 하나 찍고 그림을 파는 일이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나도 형원 선배의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습니다. 무대 만들기는 원래 어려운 일이고, 또 저희는 한 번도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대 인생팀이 발 벗고 나서서 저희를 도와주셨습니다. 만약 무대 인생팀이 없었더라면 저희는 무대를 완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꼭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형원 선배만 너무 멋있으면 안 되니까.

나도 살짝 멋을 부려봤다.

그리고 꼭 공개적으로 무대 인생팀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그러자 하종호가 이번에는 무대 인생팀에게 물었다.

"상대편을 도왔다고요? 이 대회의 상금이 얼마인지는 알고 있나요?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이 방송을 존중하는 게 아닌가요? 경쟁에 임하는 성의가 없는 게 아닌가요? 항상 이런 식입니까?"

그리고 무대 인생팀의 리더인 김영오의 얼굴이 대형 스크린에 떠올랐다.

김영오는 형원 선배처럼 유창하게 답변하지 못했다.

그래서 머뭇머뭇 느리고 답답하게 대답했다.

"그게 원래······예술은 경쟁이 아니니까요. 예술은 그저······ 자기에게 충실해지는 과정이죠. 우리는 우리에게 충실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큰 도움을 준 것도 아닙니다. 그냥 팀 수진이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화려한 언변은 아니더라도, 진심이 담긴 말은 힘이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김영오에게 집중되었다.

"힘든 무대일을 팀 수진이 저렇게 열심히 해줘서 고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때 우리가 생각나기도 하고. 우리가 할 땐 힘들기만 하던 일이,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보니까 꽤 근사한 일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김영오가 더듬더듬 자기 생각을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심사위원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진심으로 그들을 향해 박수를 쳤다.

박수가 끝나자 김경아가 다시 쇼를 진행했다.

"훈훈하네요. 아마 이런 모습이 우리 영 아트가 추구하는 방향이겠죠. 그럼 이제 무대 인생팀의 과제를 보시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