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업그레이드 □
11월이 지나고 있었다.
이제 곧 2학기도 끝난다.
원래 옷장사는 계절이 바뀔 때 가장 바쁘다.
당연한 이야기.
거기다 우리는 방송 출연이라는 이벤트까지 발생했다.
우리의 인터뷰가 몇 번 방송을 타고, 쇼핑몰은 난리가 나버렸다.
하지만 나의 노련한 지휘.
거기에 열정적인 팀 유나의 자발적인 참여까지.
우리는 부지런히 움직였고, 우리의 노력에 비례해 쇼핑몰의 매출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새 시즌을 대비한 겨울 상품도 넉넉히 올렸고, 그 바쁜 와중에 자체 생산도 추가했다.
포장과 배송, 고객 상담을 도와줄 알바를 세 명이나 더 뽑았다.
그리고 쇼핑몰 업무 전반을 도와줄 경력직 직원도 1명 추가.
경력직 직원이 재빨리 업무를 정리해줘서 나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오피스텔에는 우리 상품들이 차곡차곡 빼곡히 쌓여 있었다.
일부러 넓은 곳으로 골랐던 내 오피스텔이 이제 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장인 내 입장에서는 보는 것만으로 배가 불렀다.
그리고 드디어 영 아트 첫 녹화 일정이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아직 방송이 시작도 안 했는데 이 정도라면.'
방송 후에는 진짜 전쟁이 시작될 지도 몰랐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많이 달라질 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잠깐 짧은 휴가를 갖기로 했다.
"자, 그 동안 고생했으니까 오늘은 팀 수진 회식입니다. 오늘은 모두 먹고 싶은 것 하나씩 의무적으로 말해 주세요. 제가 다 사드릴게요."
그렇게 팀 유나 세 명과 태민, 형원 선배까지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한철이는 바빠서 저녁에 합류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린 평소에는 가보지 못하던 조금은 비싼 곳에 가서 저녁도 먹고 가볍게 술도 마셨다.
형원 선배가 나를 향해 씨익 웃었다.
"내가 재밌는 걸 말해줄까? 실은 어제 길에서 여고생 두 명이 날 알아봤어. 그래서 내가 싸인까지 해줬지. 오빠, 너무 멋있어요. 꼭 우승하세요, 이러는 거야. 아무래도 방송이 내 체질인 것 같아."
훗.
귀여운 양반.
형원 선배가 쓰는 글은 진지한데, 형원 선배 자체는 참 순수하다.
글과 작가가 많이 다르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때 형원 선배를 향해 김태민이 가볍게 웃었다.
"어? 왜 웃는 거야?"
"형, 전 이제까지 열 명도 넘게 사인해줬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수진 선배가 귀여운 아이들을 지켜보는 어른의 미소를 지었다.
팀 유나는 이제 알아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거리 촬영은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래서 당분간 스튜디오 촬영을 하기로 하고, 고가의 조명과 스크린을 주문해뒀다.
그리고 그때 한철이가 도착했다.
최근 돈을 많이 번 나는 한철이에게도 비싼 안주를 마음껏 고르도록 해줬다.
"으으, 여기 오니까 진짜 살 것 같다."
"왜? 요즘 무슨 일 있어?"
"컴공과에 잘나가는 선배들이 많잖아. 대기업 간 선배들도 있고, 창업한 선배들도 있고. 종종 우리들 불러서 술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그러는데, 진상들이 어찌나 많은지. 대화의 절반이 돈 자랑이랑, 여자 이야기야. 얼마 전에는 팀 수진 동영상에서 나를 봤다며, 수진 누나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는 선배도 있었어."
으으.
우리는 다 같이 몸서리를 쳤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전생의 나는 어땠을까?
나 역시 나이를 먹고,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상을 부리고 있지는 않았을까.
아무튼 방송 탓으로 팀 수진이 너무 유명해졌다.
어떻게든 유나와 두 선배를 우리가 잘 지켜야 했다.
"아, 맞다. 한철아. 그 조소과 누님은 어떻게 지내셔? 요즘 자주 만나?"
한철이는 대답대신 소주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 혼자 쭈욱 들이켰다.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그리고 정화 선배가 술잔을 들었다.
"자자, 그런 점에서 하이 유나는 최고의 아르바이트 같아. 이상한 사람도 없고, 친구들끼리 즐겁게 일할 수 있고, 근무 시간도 수업에 맞춰 주고, 심지어 학교에서도 가까워. 우리에게 근사한 일자리를 준 이주원 사장님을 위해 건배하자!"
"와아!"
그리고 일제히 모두가 술잔을 들었다.
'우와.'
정화 선배의 말이 진심처럼 들려서 너무 기뻤다.
직원들이 만족하는 회사를 내가 만들다니.
기적 같은 일을 해낸 것 같았다.
아, 그리고.
하이 유나는 유나와 내가 반반씩 가진 회사지만, 그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그냥 밝히기가 좀 어색했다.
사람들이 짐작은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공식적인 대표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캬아."
오늘은 술이 달았다.
건배한 잔을 내려놓고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좋은 사장님이라고 해서 말인데요. 실은 여기 나오기 전에 여러분들 급여 계좌로 보너스를 입금하고 왔어요. 나중에 한 번 확인해보세요."
와아!
또 다시 터지는 환호.
최근의 매출 성장은 팀 수진이 방송에 출연한 덕분이니까, 이익을 나누는 게 당연했다.
나는 마음을 비우고, 상당한 거액을 보너스로 입금했다.
훌륭한 리더는 작은 욕심은 부리지 않는 법.
"한 잔 더 해!"
"우리 사장님 최고!"
하지만 이 정도로 기뻐하면 안 된다.
"이제 곧 방송에 나가잖아요. 거기에 맞춰 우리 신상품 촬영도 다 끝났고. 그러니까 팀 수진은 며칠 동안 푹 쉬세요. 며칠 동안 휴가입니다. 그리고 즐겁게 쉬라고 내가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늦게 온 한철이까지, 모두에게 에스테틱 스파 이용권을 한 장 씩 나눠줬다.
안마와 스파, 피부 관리까지 여왕님처럼 즐길 수 있는 꽤 고가의 이용권이었다.
"끼야아약!"
팀 유나 세 명이 동시에 원숭이 같은 소리를 내며 기뻐 날뛰었다.
세 사람은 최근 방송이 시작되기 전 겨울 신상 등록을 마치기 위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생을 했다.
그러니 이 정도 사치는 누릴 자격이 있었다.
동시에 방송을 앞두고 관리를 좀 받아둔다면 더 예뻐 보일 것이다.
'이것은 직원 복지인 동시에, 앞날을 위한 투자지.'
역시 나는 치밀한 남자였다.
태민이와 형원 선배는 이게 어떤 이용권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형도 가서 푹 쉬고 와요. 그동안 어두운 방에서 소설 쓴다고 고생 많았잖아요."
그리고 2차로 노래방까지.
내가 2차까지 따라간 적은 없었지만, 오늘은 맘 편히 즐기기로 했다.
먼저 수진 선배가 마이크를 잡았다.
'수진 선배는 노래도 잘하는 구나.'
엄청 잘하는 건 아니고, 노래도 얼굴처럼 예쁘게 불렀다.
하긴 수진 선배 정도 외모면 그냥 입만 벙긋 거려도 귀가 알아서 화음을 넣을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나의 노래.
"어?"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고 말았다.
정말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유나였다.
안 그래도 유나는 엄청 예쁜데, 노래까지 잘하니까, 정말 술이 다 깰 만큼 예뻐 보였다.
다만, 역시 모범생이라서 춤은 진짜 못 췄다.
무슨 마네킹이 걸음마 연습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형원 선배, 정화 선배, 한철이는 신나게 노는 타입.
마지막으로 김태민이 마이크를 붙잡았다.
"다행이다."
김태민도 못하는 게 있었다.
그렇게 김태민도 인간이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어려지고 노래방은 처음이었는데, 이렇게 즐거울 줄 알았으면 종종 올 걸 그랬다.
이렇게 2차에서 끝난 술자리.
저녁과 가벼운 술, 노래방이 전부였지만, 우리에겐 나름 최선을 다해서 열정적으로 보낸 하루였다.
"수진 누나. 나 오랜 만에 집에 갈 건데 같이 택시 타요. 빨리 짐 챙겨 와요."
"그래."
김태민과 수진 선배는 집이 같은 방향.
정화 선배는 한철이가 바래다주고.
형원 선배도 다시 어두운 동굴방으로 돌아갔다.
"유나야. 너도 들어가."
"됐어. 사무실 같이 가. 아직 할 일 많이 남았잖아. 같이 하자."
쇼핑몰의 일은 밤낮이 없다.
동대문 시장은 밤에 열린다.
그래서 저녁에 주문을 마감하고, 대행업체에 사입 해야 할 옷의 명단을 보내야 한다.
예전엔 몇 십 벌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하루 천 벌을 우습게 넘긴다.
거기다 낮 동안 들어온 상품 문의나 교환 신청에도 전부 응대해야 했다.
그래서 유나가 도와준다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와 유나는 밤늦게 사무실로 돌아왔다.
정말 오랜만에, 아무도 없이 단 둘이었다.
* * *
밤 11시.
두 시간 동안 정신없이 일했다.
타닥. 타닥.
사입 리스트를 정리해서 대행업체에 문자로 보내고 고개를 드니, 유나가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으앙. 답글 달고 돌아서면 또 새 글이 올라와 있어."
유나가 우는 소리로 말했지만, 사실 쇼핑몰 운영자에게는 행복한 비명이었다.
"이제 그만해. 내일 마저 하면 되니까."
"조금만 더 하고."
그러면서 유나는 자기 뒷목을 눌렀다.
아무래도 미대생은 등이며 목이 많이 아프다.
불편한 이젤 앞에 앉아서 계속 그려야 하니까.
거기다 유나는 쇼핑몰 일까지 하니까 더 무리가 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
나는 유나 옆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이리 와 봐. 어깨랑 목 주물러 줄게."
"너 안마 잘 해?"
유나가 못 미더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믿고 맡겨 봐."
회귀한 이후, 다시 고딩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꾸준히 안마해드렸다.
효심으로 익힌 안마 스킬.
다른 건 몰라도 어깨랑 목은 자신 있었다.
유나는 여전히 못 미더운 얼굴로 내 앞으로 의자를 밀었다.
그리고 토닥토닥.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며 안마를 시작했다.
조용한 밤의 사무실.
적당히 남아있는 옅은 술기운.
그리고 은은하게 풍겨오는 유나의 샴푸향기.
꽤 만족스러운 밤이었다.
나는 정성들여 유나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다.
"태민이 1학년 마치고 휴학할 거래. 군대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가봐. 지금 신청하면 얼추 방송 끝날 때랑 적당히 날짜가 맞나 봐."
"진짜?"
"응. 그래서 나도 같이 휴학할까 생각 중이야. 태민이랑 같이 졸전하고 싶어서. 나랑 태민이는 복무 기간이 살짝 다른데, 복학은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음. 나도 같이 졸전하고 싶은데."
1년 정도 휴학은 흔했지만, 유나가 우리와 같이 졸전을 하려면 2년이나 휴학해야 했다.
게다가 우린 쇼핑몰도 있으니 상황이 단순하지는 않았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한 번 고민해 봐야겠다. 아, 아파, 바보야."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네 몸이 굳어서 그런 거야."
우리가 크리틱 때 치열하게 싸우긴 했지만, 사실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
괜히 승부욕을 자극하지만 않으면 사실 유나는 안전하고 친절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띠디디디디디디디디디.
내 머릿속에 알 수 없는 기계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분명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소리.
'대체 뭐지? 무슨 소리였지?'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한 이 소리.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 소리는?
그리고 눈앞에 익숙한 화면이 펼쳐졌다.
[ 노력 상점의 이용 실적이 누적되어 노력 상점이 업그레이드 됩니다. 아래와 같은 추가 상품이 생성됩니다.
알래스카 얼음 호수 산책 (5코인)
환기(5코인)
안마 (5코인)
밤 인사 (4코인) ]
어어어어어어!
드디어!
나의 노력 상점이 업그레이드 되었다.
이제까지 노력 상점을 충분히 이용했지만, 업그레이드는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었다.
'설마 유나 안마가 필수 조건이었나? 아닐 거야. 어쩌면 영혼의 만족도가 정점에 올랐을 때 업그레이드 되는 게 아닐까? 오늘은 하루 종일 즐거웠으니까.'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노력 상점이 레벨 2가 되었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모의고사 성적이 주욱죽 오르고 있던 시점이라, 꽤 만족도가 높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노력 상점에 새 상품이 무려 4개나 등록되었다!
'알래스카 산책? 이건 또 뭐야? 그 추운 곳을 왜 산책해?'
그리고 환기, 안마, 밤 인사는 내가 아니라 타인에게 쓰는 스킬 같았다.
'이 상품들을 쓰면 더 좋은 리더가 될 수 있을 거야. 설마 노력 상점도 내 사회적 위치에 따라 같이 성장한 걸까?'
그리고 전체적으로 노력 상품들의 가격이 올라갔다.
'아마 그만큼 효과도 좋겠지.'
코인이야 어차피 넘쳐나니까 별 상관없었다.
오히려 효과만 좋다면 더 환영이었다.
그런데 새로 등록된 상품 중에 '안마'라는 스킬이 있었다.
'안마'를 클릭하자 상품 설명이 떠올랐다.
[ 안마가 필요한 부위를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습니다. 손가락이 신들린 듯이 움직여 근육은 물론 영혼의 피로까지 해소합니다. 안마를 받은 이와 친밀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
'친밀도가 크게 상승한다고?'
마침 유나가 내 앞에 있었다.
신상품을 시험해볼 절묘한 찬스였다.
"뭐야? 안마 끝난 거야? 나 그럼 다시 일한다."
내가 잠시 멍하니 있자 유나가 다그쳤다.
"아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할 거야."
노력 상점에 대한 내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자, 한유나씨. 기대해도 좋습니다.'
[ 5코인을 지불해 안마를 구매합니다. ]
지이이잉.
내 눈이 환하게 빛나고 유나의 어깨가 시야에 잡혔다.
그리고 안마가 필요한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내 눈에 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