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이갈량(2) □
유나가 김대성에게 또박또박 질문했다.
"카프카의 변신은 저도 한 번 읽어본 적이 있는데요. 난해하고 어려운 소설이었습니다. 한 번 읽어서는 이해가 안 되고, 두 번 읽기엔 망설여지는 소설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화 플라이는 헐리우드의 상업 영화인데요. 두 편이 닮았다는 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이 어떻게 이 공포영화와 닮았는지, 얼버무리지 말고,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유나는 분명 영리하다.
유나의 날카로운 공격은 김대성이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발표 곳곳에 미끼를 숨겨둔다면?'
나는 유나의 성향을 잘 알고 있다.
아마 유나의 가족을 제외하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알 것이다.
그러니 발표 곳곳에 유나의 의욕을 자극하는 허술한 지점을 심어두는 것은 딱히 어려운 게 아니었다.
김대성이 카프카를 언급하면서 대강 얼버무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김대성이 유나를 향해 빙그레, 느끼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군요.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간단히 설명해 드리죠. 일단 작품 내적으로는 젊은 남자가 곤충으로 변하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는 점이 닮았습니다."
뜻밖에, 평소의 김대성이라면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유창한 답변이 쏟아졌다.
"그리고 작품 외적으로, 카프카가 변신을 발표한 시기는 1915년. 약혼녀와 파혼한 후, 직업적으로도 방황하던 시기였습니다. 체코에 사는 유대인으로, 작가로 인정은 받지 못하지만 글을 포기할 수 없었던 카프카. 그의 방황이 고스란히 담긴 소설이 바로 변신입니다. 영화 플라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유부단한 주인공이 파리로 변해가는 과정인 동시에, 연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재산과 명성을 얻고 싶은 욕망, 자아에 대한 갈구가 곳곳에 남겨져 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절대 간단하지 않은 답변.
으악.
아무리 유나라도 결국, 쏟아지는 숫자와 역사적 사실에 반격할 의지를 잃고 말았다.
'후후, 한유나. 쉽게 포기하지 말라고. 계속 질문해 보시지?'
나는 삼국지를 참 좋아했다.
물론 한 번에 끝까지 다 읽은 적은 없지만, 어쨌든 나같은 중년의 아재라면 누구나 삼국지를 좋아할 것이다.
그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적벽대전 파트.
주유와 제갈량은 강적 조조를 앞에 두고서도, 서로의 자존심을 앞세우며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유는 제갈량을 골탕 먹이기 위해 한 가지 지시를 내린다.
"본격적인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의 물자가 부족하오. 그러니 공이 열흘 내로 화살 십만 개를 구해오도록 하시오."
"하하하. 열흘은 너무 깁니다. 삼일 안에 화살 십만 개를 구해 오겠습니다."
그리고 제갈량은 안개가 자욱한 밤, 배에 짚단을 싣고 조조의 진영을 찾아간다.
제갈량을 두려워한 조조는 제갈량의 배들을 향해 화살 세례를 퍼붓고, 제갈량은 손쉽게 십만 발의 화살을 손에 넣는다.
'이미지라는 게 참 무섭지.'
만약 내가 발표를 했다면?
나는 이미 크리틱에서 여러 사람을 물고 뜯은 경력이 있다.
그래서 내 발표에 학생들은 감히 강한 질문을 던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멋들어지게 받아쳐 봤자, 늘 보던 장면이니까 임팩트도 약할 것이다.
'하지만 발표자가 김대성이라면?'
오늘은 바로 내가 이갈량이었다.
그리고 김대성은?
'짚단을 가득 실은 통통배지.'
똑같은 말을 해도 김대성이 하면 의심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허술해 보일 것이다.
역시 유나를 비롯해 여러 학생들이 김대성의 발표 곳곳에 손을 들고 끼어들었다.
하지만 김대성은 매번 얄밉게 미소 지으며, 미리 외워둔 유창한 답변으로 모두를 찍어 눌렀다.
당연히 그것은 우리 셋이 미리 치밀하게 준비한 답변.
그리고 김대성은 부지런히 외웠다.
결국 김대성을 공격한 학생들은 모두 허무하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김대성은 여유롭게 발표를 이어갔다.
김대성은 영화 플라이의 여러 장면들의 특수 효과와 의미를 설명했다.
"B급 영화라는 말은 모두 들어보셨을 겁니다. 세상엔 여러 종류의 영화가 있습니다. 어떤 영화는 인간의 가치를 모색하고, 어떤 영화는 감독 개인을 위해서 만들어지고, 또 어떤 영화는 상업적 성공을 위해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영화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조금 작은 예산으로 마이너한 관객을 위해 만들어지는 영화가 바로 B급 영화입니다."
이제 슬슬 발표를 마무리할 차례.
"물론 플라이는 평범한 B급 영화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하지만 B급의 정서는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 역시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A급 그림이 있다면, 가끔 B급 그림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예술은 어차피 유희적 활동입니다. 그러니 즐거움이라는 목적에 조금 더 솔직한 그림도 가끔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김대성의 발표에 맞춰, 남동민이 신문지를 찢고, 자기가 그려온 그림을 앞에 걸었다.
남동민이 그린 것은 바로 영화 플라이의 주인공.
파리 인간이었다.
피부는 검게 변해 문드러졌고, 징그러운 털이 숭숭 솟아났고, 얼굴엔 커다란 파리의 눈알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벌어진 입으로 끈적이는 타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얼굴이 찌푸려지는 징그러운 그림이었다.
'거기에 100호 사이즈에서 풍기는 위엄까지.'
앞서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남동민의 스킬은 일류.
100호 캔버스에 남동민의 사실적 묘사가 꼼꼼히 채워져, 파리 인간은 보는 것만으로 충격이었다.
'이것은 1학기 때, 유나가 포토 리얼리즘 시간에 깨진 유리를 그린 것과 살짝 비슷한 원리지.'
징그러운 그림은 보는 것만으로 관객을 압도하고 들어갔다.
꼼꼼히 살펴보고 자신의 서재에 걸어둘 그림을 고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조별과제에 잠시 스쳐 지나는 그림이라면?
오늘 걸린 모든 그림 중에 남동민의 파리 인간이 제일 임팩트가 강할 것이다.
나는 재빨리 이준성 교수의 얼굴을 살폈다.
씨익.
이준성 교수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천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겼어. 멋진 승부였다. 자, 한유나. 순순히 나의 유나곤 볼이 되어라.'
"여기까지가 저희의 발표입니다."
학생들 얼굴에 스치는 감탄.
이준성 교수의 미소를 감상하며, 나와 남동민은 우리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리고 발표를 마치며, 제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일까 합니다."
응?
김대성이 갑자기 툭, 대본에 없는 대사를 던졌다.
나와 남동민은 다급히 김대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이, 김대성.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하지만 김대성은 우리의 영혼의 절규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설마, 김대성. 또 다시 골대를 벗어나 달리려는 거냐? 아니,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오늘 넌 충분히 주목 받았잖아!'
그랬다.
나와 남동민은 김대성의 영혼에 잠재한 병지 본능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김대성은 한 번 흥분하면 죽을 줄 모르고, 하프라인을 향해 달려가는 한 마리 불나방이었다.
'김대성, 그만해! 정신 차려!'
하지만 강의실에 김대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차피 우리를 닮은 영화를 고르려다 찾은 게 이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내가 정말 파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제가 한국대 생이라고 말하면, 대단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파리처럼 느껴집니다. 계속 그림을 그릴수록, 내 그림은 형편없고, 앞으로 또 뭘 그려야 할지는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중엔 이미 주목받는 학생도 있고, 꽃처럼 빛나는 학생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파리일 뿐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어엌.
김대성의 진지한 자기 고백에 나와 남동민은 할 말을 잃었다.
강의실은 갑자기 숙연해진 분위기.
"하지만 이번 과제는 정말 즐거웠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그냥 파리가 앵앵거리는 것으로 끝날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학생으로 지내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저는 최선을 다 할 생각입니다. 이번에 같이 과제를 해준 동민이 형과 주원이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대성의 오글거리는 고백.
그리고 쏟아지는 박수소리.
나에게 고맙다고 말해줘서 나도 조금 고맙긴 했다.
어쨌거나 김대성은 이번에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앞으로는 이런 고백은 절대 사양이다.
아무튼.
"흐흐흐. 역시 웃긴 놈들. 그래 잘 봤다."
이준성 교수가 박수를 끊고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다.
"플라이, 나도 알고 있는 영화다. 공포 영화의 걸작 중 하나지. 공포 영화를 고르고, 그 안에서 여러 상징과 다른 예술과 연결 고리를 찾은 것도 참신했다. 그리고 늙은 놈의 그림도 맘에 든다. 맞다. 네놈들 말대로 가끔 B급이 필요할 때도 있다. 가끔 이렇게, 고민이나 반성을 내려놓고 순수하게 즐기기 위한 그림을 그리는 것도 꽤 도움이 된다. 잘했다. 너희 셋, 오늘 최고였다."
유나의 조는 '더할 나위 없다'는 평을 들었다.
그리고 우린 '오늘 최고'라는 말을 들었다.
과연 영화표의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
유나와 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이준성 교수를 쳐다봤다.
"그리고 하나 더. 반장에게 할 말이 있다. 어쩌면 너희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일 수도 있다. 나 역시 내가 파리처럼 하찮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지."
이준성 교수는 강의실에 앉아있는 김태민을 가리켰다.
"저기 잘생긴 놈의 아버지. 용철 형님 때문에 자주 그랬다. 김용철 작가는 어디서나 당당하고 주목 받았지. 언제나 나보다 몇 걸음씩 앞서 나갔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힘들었던 과거가 떠오르는지 이준성 교수는 애수어린 눈빛을 지었다.
"지금도 변변치 않은 화가인 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이젠 먹고 살만 하다. 이 나이까지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도 자랑스럽고, 그 잘난 한국대에서 강의도 맡고 있다. 반장, 네 말이 맞을 거다. 넌 분명 파리 같은 놈이다. 하지만 정말 원하는 게 있으면 최선을 다해라. 그럼 결국 갖게 될 거다. 또 다른 파리였던 내가 그 증거다."
이준성 교수와 김대성이 잠시 그윽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두 파리 같은 남자의 교감.
절대 둘 사이에 끼고 싶지 않은 눈빛이었다.
그리고 이준성 교수가 학생들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오늘 이 영화 티켓의 주인은 저 세 놈이다. 모두 동의할 거라 생각한다. 다른 조들도 훌륭했지만, 저 놈들의 발표가 제일 인상 깊었다. 늙은 놈, 반장, 그리고 웃긴 놈. 잘 했다. 나와서 이 티켓을 가져가라."
예스!
나는 앞으로 달려가 여섯 장의 영화표를 냉큼 받아들었다.
이준성 교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과제도 잘했고, 오랜만에 강의를 하는 보람을 느끼게 해줬다. 역시 나의 욕 강의는 언제나 잘 먹힌다. 반장이 이런 발표를 하다니. 오늘 반장을 보며, 앞으로 너희 후배들에게는 더 심한 욕을 퍼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우리 외인부대의 승리였다.
김태민은 조금 애석해하며 박수를 쳤고, 유나는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후후, 나의 유나곤 볼.'
한 개만 해도 감지덕지인 소원이 두 개로 변해 버렸다.
이제 진지하게 소원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김대성은 마치 결승골을 넣은 축구 선수처럼 우리를 향해 팔을 벌렸다.
뭐, 오늘 멋있긴 했지만, 포옹까지 할 생각은 없다.
'그냥 각자 기뻐하자고.'
그래도 오늘의 김대성은 최고였다.
'뭐, 김병지도 가끔 골을 넣긴 하니까.'
어쨌든 김대성과 조별 과제는 이제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한 번 골 맛을 본 이상, 김대성은 틈만 나면 폭주할게 분명했다.
다음 학기부터 김대성을 멀리 피해 다니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어쨌든 우리 셋은 강의실 앞에 서서 다른 학생들이 보는 가운데 마음껏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