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밤 인사 □
안마는 열심히 일하는 동료의 피곤을 풀어준다.
그리고 동료와 짧은 대화의 시간을 갖게 해주는 노력하는 리더에게 유용한 스킬이다.
나는 노력 상점의 안마를 잘 활용해서 회사를 발전시키고, 돈도 많이 벌어서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할 생각이다.
"잠깐만."
유나가 내가 안마하기 좋도록 머리를 묶었다.
그렇게 드러난 유나의 하얀 목.
부드러운 솜털.
귀여운 어깨.
음······
내 손가락은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처럼 현란하게 날아다녔다.
라흐마니노프가 누구냐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잠시 후.
푸욱.
유나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후우.
그리고 촉촉한 한숨을 뱉었다.
유나는 한참 만에 힘없이 말했다.
"너 안마 진짜 잘한다."
"그래?"
"응. 아, 너무 시원해. 목뼈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야. 안 그래도 목이 뻐근했는데 너무 좋다."
역시 노력상점은 배신하지 않는다.
유나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내 정신이 또렷해진 것은 왜일까?
항상 유나를 안마하면 내 피로가 풀린다.
"그거 알아? 발 마사지는 어깨 마사지보다 다섯 배의 효과가 있대."
"정말이야?"
유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날 쳐다봤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내 안마의 포로.
약간 믿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이지. 몸이 천 냥이면 발이 구백 냥이란 말도 있잖아."
유나는 대답할 기운도 없어 보였다.
"안되겠다. 오늘은 들어갈래. 몸이 노곤해서 일을 더 못하겠다."
그리고 유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나의 집은 무척 가깝지만, 그래도 밤에는 바래다주는 것이 남자의 도리.
잠깐 만에 도착한 유나의 자취방은 밖에서 보니 까맣게 불이 꺼져 있었다.
'그렇군. 오늘은 수진 선배가 집에 없는 날이군.'
수진 선배는 오랜만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김태민이 데리고 가버렸다.
'역시 김태민, 최고의 친구.'
"바래다줘서 고마워. 안마 받으니까 너무 졸린다. 빨리 자야지.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유나는 꾸벅꾸벅 감기는 눈으로 간신히 말했다.
"그래. 언제든 피곤하면 참지 말고 말해. 내가 안마해줄게."
"아, 맞다. 우리 내일 1시 수업이잖아."
내일은 오전 수업이 없는 날.
"그래서?"
"내일 11시 쯤 우리 집에 와. 밥 차려 줄게. 너도 안마해줬으니까."
유나가 웃으며 말했다.
와, 신난다!
오랜만에 자취방에 유나 혼자 남은 덕분에 유나가 차려주는 밥을 먹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고사리나물도 실컷 먹어야지.'
그리고 노력상점의 밤 인사를 클릭했다.
[ 밤 인사 : 다정하고 친근한 밤 인사를 건넬 수 있습니다. 인사를 받은 이는 숙면을 취할 수 있으며, 잠들기 전 나에 대해 좋은 기억을 떠올립니다. 인사를 받은 이의 피로 회복도가 100% 증가합니다. ]
역시 팀을 이끄는 리더에게 도움이 되는 능력이었다.
[ 4코인을 지불하였습니다. ]
"그래. 잘 자. 유나야."
내 인사에 유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안마를 받으니까 귀가 이상해졌나. 너 목소리 되게 듣기 좋다. 그럼 내일 봐, 주원아."
그리고 유나는 혼자 들어갔다.
철컹.
무거운 문이 닫히는 소리.
괜찮아. 괜찮아, 이주원.
큰 욕심을 버리면 작은 일에도 행복할 수 있는 법.
'내일 유나한테 계란 후라이도 해달라고 하자.'
그렇게 바보처럼 실실 웃으며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즐겁게 보내고, 노력 상점도 업그레이드 되었다.
유나의 집밥도 약속받았고.
마음 한구석이 알싸하긴 하지만, 그래도 꽤 멋진 하루였다.
* * *
김영오는 지방 미대를 다녔다.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연극동아리를 찾아갔는데, 배우가 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어, 미대네. 금손이잖아. 넌 무대 미술 담당이다."
그렇게 운명이 결정되고 말았다.
무대 배경을 그리기도 하고, 작은 소품도 만들고 조명도 설치했다.
처음엔 불만이 많았지만, 차츰 적응하게 되었다.
일단 무대 미술을 담당할 사람이 자기 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금씩 보람도 느끼게 되었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실력도 쌓이고 발언권도 커졌다.
"어이, 연출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배경을 생각해서, 배우 동선이 잘못 되었잖아."
그러다 졸업할 때 쯤에는 무대 미술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김영오는 졸업하자마자, 가진 것 하나 없이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박승건과 최진호는 같이 소극단을 전전하며 만난 친구들이었다.
박승건은 자신처럼 미대를 나왔고, 최진호는 무대 미술이 좋아서 어깨너머로 배운 친구였다.
그래도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실력도 괜찮았다.
하지만 이제 점점 힘에 부쳤다.
그동안 실력은 늘었지만, 소극단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보수도 제자리였다.
한 번은 호기롭게 창업을 해 본 적도 있었다.
그간의 경험을 살려 수제 가구를 만들어 인터넷 판매를 했었다.
좋은 후기도 몇 개 있었지만, 수지가 맞지 않았다.
"젠장, 진짜 다른 업체들은 저 가격에 어떻게 맞추는 거야!"
결국 손해만 실컷 보고 접었다.
그들은 밤에는 작은 극단의 무대 미술을 맡았고, 낮에는 다른 아르바이트를 했다.
박승건은 미술학원 강사였고, 최진호는 숯불갈비집에서 일했다.
김영오는 공사 현장에서 일했다.
공사장 일을 잘해서 일당도 올랐고, 더 큰 현장에서 스카웃 제의가 올 정도였다.
하지만 무대 일을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꾸준히 할 수는 없었다.
"승건아.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내가 만약 지방대를 다니지 않고 서울에 있는 학교에 갔더라면? 학생 때부터 서울에서 무대 쪽 인맥을 쌓고, 미술 학원에서 편하게 알바하면서 준비했더라면? 그럼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그러지 않았을까? 웃기지 않아? 따지고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그림을 못 그렸을 때가 입시생일 때였어. 그런데 그때의 실력으로 우리 인생이 결정되어 버린 거잖아."
다른 모든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미술계 역시 학벌이 중요했다.
아니, 다른 분야보다 훨씬 더 학벌이 중요했다.
한 번 타고나면 바꿀 수 없는 혈통처럼, 그들이 나온 대학이 평생 화가들을 따라다녔다.
"야, 이것 봐봐."
최진호가 인터넷 화면을 가리켰다.
"뭐야, 이 병맛 같은 프로그램은? 예술로 경쟁한다고? 대체 얼마나 머리가 비었으면 이런 발상을 다 하는 거지?"
김영오는 투덜댔다.
하지만 최진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야, 니들은 진짜 금손이잖아. 저것 봐. 상금이 3억이야. 1인당 대체 얼마인거야?"
김영오는 피식 웃었다.
최진호는 미대를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나 박승건이 그림을 그리면 언제나 존경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김영오는 소주를 마시며 모니터를 다시 읽어봤다.
[ 유학 지원, 레지던시 입주 기회 부여 ]
'유학이라고? 진짜?'
어쩌면 평생 자신을 따라다니는 학벌을 세탁할 수 있는 기회일 지도 몰랐다.
물론 우승할 때 이야기이긴 하지만.
최진호는 홈페이지 하단의 출연자 인터뷰를 클릭했다.
가장 위쪽에 있던 한국대의 팀 수진의 인터뷰였다.
가장 위쪽에 있기도 했지만, 썸네일에 있는 수진의 얼굴이 제일 예뻤기 때문에 클릭한 것이기도 했다.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화면을 가득 채운 수진의 얼굴.
예쁘긴 진짜 예뻤다.
그리고 이어지는 형원의 얄미운 인터뷰.
"한국대라고 특별한 장점이 있냐고요? 전혀요. 캔버스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자식."
김영오는 자기도 모르게 욕을 뱉고 말았다.
'개자식. 나이도 어린 놈이 지가 뭘 안다고. 니가 평등을 알아? 니가 차별을 알아? 니가 노가다 뛰면서 그림 그려본 적은 있어?'
그리고 자기 친구들에게 말했다.
"야, 저런 애들이 경쟁자면 우리도 해볼 만 하지 않냐? 저 여자애는 스물 한 살이래. 우리가 돈은 못 벌었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힘들게 굴렀잖아. 실력 하나는 진짜잖아."
박승건도 모니터 앞에 다가왔다.
이제 화면에는 김태민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다.
"레알 금수저네. 우리 셋이 이제까지 번 돈 다 합쳐도 쟤 아버지 그림 한 점 못 사겠지? 그래. 나가자. 우리라고 평생 이렇게 살라는 법은 없잖아?"
셋은 홈페이지를 뒤져서 지원 절차까지 알아봤다.
"서류 심사도 있네."
그래도 그건 자신 있었다.
자기들이 가진 것은 없어도, 그래도 열심히 살아온 것만은 진짜였다.
30세 이하의 나이제한.
그들은 곧 서른이 된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김영오가 자기 주머니를 뒤지자 9만 5천원이 들어 있었다.
최근 극단 일이 바빠서 공사 일을 나가지 못해 가진 돈의 전부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서른이 되어도 지금처럼 답이 보이지 않는다면 연극 일을 그만둬야 할 지도 몰랐다.
"그래. 이거 지원하자. 그리고 화끈하게 우승까지 먹어보자."
"그래, 해보자. 너희 둘과 함께라면 할 수 있어!"
김영오와 박승건, 두 미대생을 존경하는 최진호가 진심으로 외쳤다.
그리고 김영오가 자기 가진 돈 전부인, 9만 5천원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
"자, 배수진을 치는 의미에서 오늘 내가 전 재산을 걸고 쏜다. 오늘 화끈하게 마시면서 출정 기념식을 하자고. 진호, 너 불막창 먹고 싶다 그랬지? 배달 시켜! 자, 우리끼리 불막창 먹으면서 뜨거운 밤을 보내자!"
"그래! 불막창!"
"유후!"
다음 날 셋은 같은 일을 하는 동료 둘을 더 꾀었다.
그리고 다섯이서 영 아트 코리아에 지원했다.
며칠 후, 그들은 합격 통보와 함께 인터뷰를 위해 방송국에 나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첫 녹화가 잡혔다는 것과 세세한 주의 사항까지 통보 받았다.
정말 기회가 눈앞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 * *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첫 녹화일이 되었다.
인터뷰야 이제까지 수도 없이 했지만, 진짜 방송 녹화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첫 경연.
한정된 시간 안에 과제를 마치고, 경쟁자들과 겨뤄야 한다.
그리고 이번 경연은 전문 평론가들이 맡는다.
이제까지 크리틱은 자주 했지만, 교수들과 평론가는 다르다.
교수는 그래도 우릴 보듬어주고, 우리의 성장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평론가들은 작품의 허점을 찾는 하이에나들.'
그들은 예술가의 감정에는 관심이 없다.
온갖 화려한 말의 포장으로 관객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애쓸 뿐이다.
예술 작품에 꼬여드는 또 하나의 관종일 뿐.
나는 그 피 튀기는 전장으로 스무살 짜리 동료들을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다.
끼이이익.
오피스텔 앞에 방송국에서 보낸 커다란 승합차가 도착했다.
원래 방송국에서 차를 보내주는 지, 우리만 특별대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팀 수진은 모두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
차에 오르기 전 짧은 시간.
"자, 잠깐. 모두들 저를 봐주세요."
팀 수진 멤버들이 나를 중심으로 둥글게 섰다.
쇼핑몰의 대표이긴 하지만, 팀 수진에서는 내 서열이 높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서열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서로 믿고 의지하는 동료가 되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생각이 그대로 전해졌는지, 둥글게 서서 서로의 얼굴을 보자, 모두의 얼굴에 약간의 안도가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사진의 이해 시간에 얼떨결에 팀 수진이 결성되고, 그동안 우리는 많은 일을 해왔다.
어찌 보면 대단한 일들이 아닐지 몰라도 우리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노력상점을 열고 '환기'를 클릭했다.
[ 환기 : 내 근처 2미터 안에 신선한 공기가 휘몰아칩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신 사람들의 영감이 상승하고, 두통이 해소되며 피로가 풀립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의욕과 용기가 고취되며, 같은 공기를 마신 이들에게 강한 유대감이 생성됩니다. ]
역시 리더의 상품.
나는 망설이지 않고 5코인을 지불했다.
"첫 녹화지만 긴장할 필요 없어요. 우린 이제까지 잘해왔고, 또 쇼핑몰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주문이 넘치고 있어요. 그러니까 오늘 떨어져도 아무 상관없어요. 이 방송이 아니더라도 우리한테는 계속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이 생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 하던 대로 즐기면서 적당히 열심히 하고 오면, 그걸로 충분해요. 자, 모두 손을 모으고 파이팅이라도 한 번 하죠!"
그리고 우린 가운데 손을 모았다.
"수진아. 팀 수진의 대표니까 너도 한 마디 해야지."
정화 선배가 수진 선배를 놀렸다.
이제 다시 장난칠 만큼 여유가 생긴 것이다.
수진 선배는 가볍게 정화 선배를 노려봤다.
"너, 진짜. 두고 봐. 그래요. 모두 내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 최선을 다하세요!"
수진 선배의 귀여운 격려까지.
우린 모두 파이팅을 외치고 웃으면서 오피스텔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