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이갈량(1) □
유나, 김태민, 장현우 셋은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유나는 스크린에 자신이 준비한 파워포인트를 띄웠다.
유나보다 나이 많은 장현우도 있었지만, 유나가 직접 발표할 모양이었다.
'그만큼 진검 승부란 말이겠지.'
솔직히 아주 조금 서운한 생각도 들었다.
'그깟 소원이 뭐라고.'
그냥 들어주고 말지.
이렇게 이기려고 애쓰다니.
'하긴 그게 유나다운 거겠지.'
아무튼 유나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한 편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도 재밌지만, 두 편의 닮은 영화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고른 영화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와 홍콩 영화 '무간도'입니다."
응?
대부와 무간도.
두 편의 느와르 영화.
내가 본 적이 있다면 일단 엄청 유명한 영화다.
하지만 스무 살 여대생이 발표하기엔 살짝 어색할 지도 모른다.
'설마?'
이준성 교수 때문일까?
이준성의 성향과 나이를 생각했을 때 분명 대부와 무간도는 어필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분명 그랬을 거야.'
유나의 조는 반드시 이기기 위해, 자신들의 취향이 아닌 이준성 교수의 취향을 고려한 것이었다.
"대부는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족인 콜레오네 가문의 암흑가 행보를 다룬 누아르 영화입니다.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은 물론 의상상과 편집상까지 수상한, 미술적으로도 높은 완성도를 지닌 영화입니다. 그리고 무간도는 홍콩 경찰과 범죄 조직의 대결을 다룬 영화로······"
유나는 간단히 두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했다.
두 영화는 다르면서도 무척 닮아 있었다.
대부의 배경은 1940년대의 미국과 이탈리아.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의 혼란한 시대 상황과 군인과 마피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마이클 콜레오네의 삶을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무간도.
양조위는 경찰이지만 범죄 조직에 잠입하고 있었다.
유덕화는 조직원이지만 경찰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중국 반환 직후, 혼란스러운 홍콩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의 내적 갈등을 다루고 있었다.
결국 시대와 국가는 다르지만, 두 영화 모두 혼란한 사회 속에서 방황하는 주인공을 다룬 범죄 느와르.
꽤 잘 고른 조합이었다.
"한 편의 영화는 자신의 주제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사용합니다. 강렬한 액션을 선택할 수도 있고, 몰입감 있는 서사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러 방법 중에서도 저희 조는 영화가 가진 색에 집중해 보았습니다. 은유적 표현이 아닌, 컬러, 진짜 영화 화면이 가진 색에 집중해 영화를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스크린에는 그들이 캡쳐한 영화의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화들은 각자의 고유한 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 색은 영화의 배경을 말해주기도 하고, 영화의 정서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그 점은 그림과 유사하다.
그림 역시 자기만의 색을 가지고 그림의 분위기와 주제를 설명한다.
'색'을 통한 영화의 해석.
꽤 재미있는 주제였다.
"색은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2시간 동안 어두운 극장 안에서 큰 스크린에 비춰지는 색은, 과장되게 말하면 영화가 관객의 감정을 지배하는 수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영화 대부의 색을 보시죠. 대부의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50년대의 뉴욕. 블랙, 브라운, 베이지를 사용해 당시의 뉴욕의 정서와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특히 범죄를 다루는 장면은 대부분 밤으로, 빛을 최소화해서 긴박함과 위기감, 고조된 내면의 갈등을 전달합니다. 또 하나의 배경은 이탈리아의 시골, 뉴욕과 대조적으로 환한 빛과 ······"
유나의 열성적인 발표.
유나의 설명을 듣다보니 대부의 장면 하나, 하나가 무척 아름답고 섬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유나의 발표를 들으면서 공격할 포인트를 찾아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유나의 발표에 몰입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소원 절대 들어주기 싫어' 모드의 한유나는 그만큼 강력했다.
"그리고 두 번째 영화인 무간도. 무간도는 1997년 홍콩 반환 후, 급격히 변화하는 홍콩을 배경으로 합니다. 사회가 변하는 속에서 같이 흔들리는 두 남자의 내면을 블루, 블랙, 그레이 세 컬러를 중심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블루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색으로 우울, 혼란, 광기, 도시, 젊음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유나가 듣기 좋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해주는 두 영화.
나는 방학이 되고, 영 아트까지 마무리 되면 꼭 두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마지막 그림을 소개할 차례.
"저희는 대부와 무간도. 두 영화가 색을 다루는 방식을 단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두 영화의 명장면을 색을 바꿔서 그려보았습니다. 대부의 장면은 블루 계열로, 무간도는 브라운과 블랙 계열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김태민과 장현우가 각기 50호 사이즈의 유화 두 점을 앞에 걸었다.
김태민은 푸른색을 메인 컬러로 사용한 앉아있는 알 파치노를 그렸다.
그리고 장현우는 무간도의 한 장면을 브라운 베이스로 그렸다.
솔직히 두 그림의 수준 차이가 꽤 컸다.
그래도 장현우 역시 나쁘지 않은 편.
나는 유나의 발표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려던 계획은 이제 포기했다.
그리고 그림에 집중했다.
특히 김태민이 그린 그림.
'저게 유나와 태민의 합작이란 말이지.'
재미있는 시도.
그리고 꽤 멋들어진 그림.
푸른색을 사용하자 대부의 장면이 굉장히 젊어졌다.
그리고 현대적이고 도회적으로 변했다.
50년대의 뉴욕이 아니라, 2000년대의 LA 같았다.
물론 나는 두 도시 다 가본 적 없는 촌놈이다.
아무튼 그랬다.
'하지만 생각만큼 강렬하진 않아.'
뜻밖에 김태민과 유나의 조합은 생각만큼 파괴적이진 않았다.
어디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나도 유나처럼 과장되게 설명한다면.
김태민의 그림은 90%의 잘그림과 10%의 신비로움.
유나의 그림은 80%의 잘그림과 20%의 바다 소녀의 감수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둘이 함께 그린 그림은 그냥 100%의 잘그림만으로 채워진 것 같았다.
김태민의 것도 유나의 것도 아닌 그냥 아주 잘 그린 그림.
'물론 발표를 보완하기 위해서, 보조적으로 그린 영화의 한 장면일 뿐이니까.'
나의 해석이나 감상이 지나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확신이 들었다.
'이 정도 그림이라면 우리도 비벼볼 만 해. 계획대로만 된다면 분명 이길 수 있다.'
그것과 별개로 이 발표가 끝나면 김태민과 유나가 같이 그린 이 그림에 대해 두 사람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솔직히 유나와의 작은 내기도 중요했지만, 나는 두 사람의 그림을 보는 것도 중요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어느덧 내게 가장 중요한 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내가 진짜 미대생이 되어가고 있는 기분이야.'
아무튼, 변변찮은 공격 한 번 찔러보지 못하고 유나 조의 발표가 마무리 되었다.
"흐흐흐, 아주 잘 봤다. 특히 대부와 무간도, 둘 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영화다. 정말 재미있게 봤지. 정작 교수인 나는 별 생각 없이 봤는데, 학생들은 영화를 분석하며 봤구나. 너희들의 발표를 보니 영화가 다시 보이는 군."
유나의 작전은 제대로 먹힌 듯 했다.
"그리고 너희들이 가져온 그림도 무척 괜찮았다. 특히 색만으로 영화의 정서 자체가 달라지는 실험은 무척 즐거웠다. 발표도 훌륭했고, 그림도 훌륭했다. 1학년이 이런 발표를 하다니. 정말 더할 나위 없었다."
이준성 교수의 칭찬에 주먹을 쥐고 기뻐하는 유나.
마치 벌써 소원에서 해방된 것처럼 보였다.
"예스."
그리고 작은 목소리지만, 김태민도 같이 환호했다.
항상 설렁설렁하는 김태민이 이준성 교수의 칭찬에 이렇게 기뻐하다니.
새로운 모습이었다.
우리 태민이가 달라지고 있었다.
여운이 길게 남는 3조의 발표.
그 여운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2조의 발표도 끝나고 어느새 우리의 차례가 되었다.
우리 세 사람.
일종의 외인부대.
고 2 겨울방학부터 입시 미술을 시작한 포항 촌놈인 나.
모두가 적당히 포기하라고 말해도 혼자 고집 부리고 한국대에 도전한 26세 남동민.
그리고 대성 병지 김대성.
'만약 우리 한명 한명이 김태민과 1:1 그림으로 겨룬다면?'
1학년이 끝나가는 지금.
솔직히 지금이라면 우리가 김태민을 이길 가능성은 아주 적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3:3의 조별 과제.
우리는 각자의 장점을 살리고, 우리에게 맞는 영화를 고르고, 상대의 전략을 분석했다.
게다가 어쩌면 오늘이 1학년의 마지막 실기 과제일지도 몰랐다.
1학년이 끝나기 전, 평범한 우리 세 명이 천재를 꺾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지금 이 순간만은 우리 셋은 뜨겁게 뭉쳤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동민은 강의실 뒤에 세워둔 신문지로 가려둔 100호 캔버스를 가져왔다.
나는 내가 준비한 피피티 자료를 컴퓨터로 옮겼다.
그리고 오늘의 발표는 바로 김대성.
우리의 대성 병지였다.
"흐흐흐. 반장 네놈이 발표냐? 정말이냐?"
이준성 교수가 시작도 하기 전에 김대성을 놀렸다.
하지만 예전의 김대성이 아니다.
김대성은 이준성의 일관된 압박에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오, 늙은 놈. 100호 캔버스라고? 그걸 또 신문지로 가려왔냐? 웃긴 놈들. 교수 짓을 제법 오래했는데, 조별과제에 이렇게 불타는 놈들은 오랜만이군. 흐흐흐. 기대해보마."
100호 캔버스는 크다.
정말 크다.
서양화과에서 저학년이 100호 캔버스를 그린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학대였다.
'가끔 자신을 괴롭히고 싶을 때. 아니면 나태한 자신을 벌주고 싶을 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을 때.'
아무리 남동민이라도, 짧은 시간동안 100호 캔버스 그림을 밀도 있게 그리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비장했다.
마지막으로 PPT를 짧게 확인하고, 김대성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제 드디어 승부의 시간이 온 것이다.
후우.
짧은 숨을 뱉고, 드디어 김대성이 강의실의 학생들을 한 번 쳐다봤다.
그리고 드디어 김대성이 발표를 시작했다.
"영화라는 과제가 주어진 이후, 너무 당연하게도 우린 어떤 영화를 고를 지에 대해 회의를 했습니다."
딸깍.
컴퓨터 앞에 앉아 내가 파워포인트의 첫장을 넘겼다.
"아주 긴 회의였죠. 그리고 우리 셋 중 하나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이왕이면 우리 셋과 닮은 영화가 어떨까? 그런 영화를 고른다면, 우린 더 진솔하고 즐거운 발표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평소의 그와는 다른 차분하고, 진정된 목소리.
"물론 이것은 평범한 조별과제일 뿐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과제일 수도 있었죠. 하지만 우리는 선택을 했습니다. 우리를 닮은 영화를 고르기로. 그리고 최선을 다해 발표하기로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우리가 특별히 더 얻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아, 살짝 미안했다.
나는 예외다.
나는 특별히 얻는 것이 있다.
바로 유나의 소원 두 개.
그것은 정말 특별한 것이다.
남동민과 김대성이 뭘 얻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최선을 다 했다.
그게 중요한 것이다.
어쨌든 김대성의 발표는 계속 이어졌다.
"그렇다면 우리 세 사람을 닮은 영화는 어떤 것일까요?"
김대성의 갑작스런 질문.
넓지 않은 강의실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김태민을 닮은 영화는 찾기 쉬울 것이다.
이준성 교수를 닮은 영화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에 비하면 우리 셋을 닮은 영화는 좀처럼 찾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딸깍.
내가 파워포인트의 다음 장을 넘겼다.
그러자 화면에 어둡고 우울한 포스터가 떠올랐다.
"저희가 고른 영화는 플라이, 바로 파리입니다. 우리가 아는 그 엥엥 거리는 지저분한 곤충이죠. 1986년 개봉한 공포영화로 아카데미 분장상을 수상했습니다."
플라이.
잔혹하고 괴기스런 공포영화였다.
우리 세 사람이 무섭다는 게 아니라, 너무 진지하고 유명한 영화보다는 구석에 감춰진 작은 주제의 영화가 우리와 맞을 것 같았다.
거기다 다소 엉뚱하고, 저예산에, 매니악한 공포영화라면.
더욱더 우리와 맞을 것 같았다.
잠깐 영화 플라이를 살펴보면.
영화의 주인공은 소심한 과학자.
거기다 엄청 특이하게 순간이동 장치를 연구 중이다.
주인공 브런들은 한 기계에서 다른 기계로 세포를 분해해 전송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직접 순간이동 장치에 넣고 전송하는데.
마침 그 기계 안에는 파리 한 마리가 같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전송된 주인공은 파리와 육체가 뒤섞이게 된다.
"우리 세 사람은 이 영화를 보며 계속 토론했습니다. 우리의 질문 중 하나는 왜 하필 파리였을까? 였습니다. 다른 곤충도 많았을 텐데요. 왜 주인공은 하필 파리와 섞이게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우린 역사적, 문학적으로 파리의 의미를 조사했습니다. 파리는 부패와 질병, 추한 욕망과 악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 영화는 한 인간이 파리로 변해가는 과정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마주하는 과정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보았습니다."
김대성은 원래 드라마 대사를 읊듯이 과장된 제스처와 목소리로 발표를 한다.
평소대로라면 웃겼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준비한 탄탄한 발표문과 흥미로운 영화의 이야기로, 김대성의 제스처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것 역시 내 전략의 일부였다.
오늘만큼은 김대성이 우리 셋 중, 제일 발표에 어울렸다.
"그리고 인간이 곤충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변신'의 주제 역시, 곤충으로 변한 한 사람을 통해, 인간의 진정한 의미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와 남동민은 김대성에게 엄청난 연습을 시켰다.
덕분에 김대성은 여유롭고 당당하게 발표를 이어나갔다.
웃기면서도 뭔가 멋있는 풍경.
남동민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대성의 능수능란한 발표를 감상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저요! 질문이 있습니다."
발표의 도중, 유나가 번쩍 손을 들었다.
'드디어 시작된 건가?'
유나는 어떻게든 이기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러니 유나가 절대 우리의 발표를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유나의 질문은 분명 날카로울 것이다.
아무리 크리틱의 달인인 나라도 유나의 질문은 방심할 수 없다.
하물며 김대성이라면?
남동민과 나의 얼굴에 희미한 긴장이 떠올랐다.
그리고.
"네, 말씀하시죠."
김대성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유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fly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