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천치적 단역 시점 (외전) □
그의 이름은 이강민.
한국대 법대생이다.
'훗, 한국대라고 다 같은 한국대가 아니지. 우리와 겨룰 수 있는 학과는 의예과정도? 의예과를 더 쳐주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착각이야. 내 목표는 대한민국의 정점에 서는 것. 그래서 수학도 잘했지만 일부러 인문계로 왔지.'
다른 한국대생과 마찬가지로 이강민은 자신에 대한 긍지가 상당했다.
그의 키 174.
얼굴은 준수한 편.
'이제 3학년이 되면 슬슬 고시도 준비해야 하고, 더 바빠지겠지. 올해가 놀 수 있는 마지막 시기라고나 할까.'
이강민은 그런 생각으로 디자인사 수업을 신청했다.
'디자인이라...왠지 괜찮은 여학생이 많을 것 같은 느낌.'
그의 패턴은 단순했다.
먼저 호감 가는 외모와 예의바른 태도로 접근한다.
그리고 은근슬쩍 자신의 학교와 학과를 흘린다.
여학생은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이강민은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며 원하는 것을 얻는다.
하지만 정식으로 사귀진 않는다.
'고시에 패스하면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데, 굳이 피곤한 관계를 만들 필요가 없지.'
사실 고등학생 시절, 이강민은 공부만 잘 하는 사회성 없는 전교 1등이었다.
공부도 잘하면서 성격도 좋은 수재도 많았지만, 이강민은 아니었다.
그는 중, 고등학교 6년 동안 거의 왕따였다.
하지만 대학 합격 이후 인생이 바뀌었다.
주위에서 언제나 환영받았고, 여자도 제법 만나봤다.
'사회성? 그런 건 한심한 약자들에게나 필요한 거야. 맹수는 늘 혼자 다니지. 얼룩말처럼 나약한 인간들이나 사회성이 필요한 거야.'
그렇게 고독한 맹수 이강민은 디자인사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사냥감을 탐색했다.
'오, 전방 7시. 괜찮은 여자가 보이는 군. 상당히 예쁜데? 청순하고 하얀 얼굴에 몸매도 괜찮은 것 같고, 잘 웃는 스타일. 맘에 드는 군. 청바지에 묻은 건 물감인가? 그럼 미대쪽인가?'
이강민은 다른 대학의 미대생은 몇 번 만나봤다.
'하지만 수준 차이가 너무 났어. 한국대생이 아니라 그런 건지, 아니면 미대생이라 그런 건지. 뭐, 그래도 예뻤으니까 데리고 놀긴 좋았지. 한국대 미대생들은 어떨까?'
그런데 하얀 얼굴 앞에 예쁜 여학생 하나가 또 등장했다.
똘망똘망한 눈에 묶은 머리.
둘이 꽤 친한지 바로 옆에 딱 달라붙어 앉았다.
'오호, 미녀 옆에 또 미녀라. 디자인사, 과연 선택하길 잘했군.'
그날 이후, 수업시간에 이강민은 은근슬쩍 두 사람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귀를 세우고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먼저 정보를 충분히 수집하며, 조금씩 다가간다. 그러다 결정적 타이밍을 포착하면 나를 드러낸다. 마치 사자가 단번에 얼룩말의 목을 물어뜯는 것처럼.'
이강민은 그렇게 자신이 입수한 정보를 정리했다.
먼저 하얀 얼굴.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쁘군. 특히 눈웃음. 웬만한 연예인 뺨치게 예쁜데.'
그녀의 이름은 이수진.
서양화과 2학년.
굉장히 잘 웃고, 또 순수한 성격이었다.
'이 정도라면 정식으로 사귀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보고만 있어도 피로가 풀리는 타입이야.'
그리고 똘망똘망.
그녀의 이름은 한유나.
서양화과 1학년.
역시 굉장히 쾌활하고, 때로는 자기가 언니처럼 굴기도 했다.
'예쁘고 성격도 좋군. 수진이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라면 유나는 연애하고 싶은 타입? 그런데 둘이 같이 산다고? 그럼 동시 공략은 힘들겠군. 둘이서 나 때문에 싸우면 어떡하지? 둘이 자기 전에 내 이야기를 나눌지도 몰라. 여자들은 친구의 평가에 민감하니까 당분간 둘한테 다 잘해줘야 겠군. 후후후.'
그렇게 이강민은 혼자 상상을 하고 혼자 행복해했다.
그는 무려 한국대 법학과!
이강민은 단 1%도 자신의 실패를 예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강민의 시야에 두 명의 방해물이 나타났다.
이강민은 곧 그들의 정보도 수집했다.
정보 수집이라고 해봤자, 그냥 귀를 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게 전부였다.
남들이 보기에 한국대 법학과는 초인적인 수재들, 미래의 지도자들의 집합이었지만, 이강민은 지금 남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 두 방해물은 바로 이주원과 김태민.
사실 그 둘은 강의 첫날부터 유나와 수진과 함께 있었다.
다만 이강민이 두 여학생에게 심취해 남학생 둘의 존재를 몰랐을 뿐이었다.
'먼저 이주원. 약간 어리버리하게 생김. 못생긴 건 아닌데 저 세 명이랑 어울리니까 초라해 보이는군. 분위기를 보니까 셋의 부하 역할인가?'
이주원은 특히 매일 한유나 옆에 앉았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나쁜가 보군.'
"됐거든?"
"웃기시네."
"싫은데?"
이주원이 뭐라고 말할 때마다 한유나가 쏘아붙였다.
'후후후, 불쌍할 정도군. 이주원 이 한심한 친구야. 올라갈 수 있는 나무를 노려야지. 네 얼굴에 한유나같은 초절정 미녀를 노리다니. 계속 들이댄다고 사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여자가 저렇게 싫다고 하는데.'
이강민은 이주원을 동정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주원을 응원하기도 했다.
'그래, 네가 계속 한심하게 굴어야 내가 등장했을 때 왕자님처럼 돋보이겠지. 후후. 계속 들이대고, 거절당해라.'
그리고 김태민.
'저 자식은 뭐야?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어. 모델이나 하지, 학교는 왜 다니는 거야?'
이강민은 자신의 키에 살짝 콤플렉스가 있었다.
지금도 작은 키는 아니지만, 키만 더 컸으면 자기가 완벽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관찰한 이후, 김태민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태민은 이주원을 대할 때나 여학생들을 대할 때나 태도의 변화가 거의 없었다.
'아니야, 어쩌면 저런 타입이 진정한 고수일지도. 저 자식은 좀 지켜봐야겠어.'
그리고 드디어 이강민에게 기회가 왔다.
디자인사 교수가 조별과제를 선언한 것이다.
"당연히 디자인도 미술처럼 시대별로 여러 사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디자인의 역사적 흐름은 당시 사회적 상황이나 철학과 사고의 변화와 긴밀하게 엮여 있습니다. 자, 5~6명씩 조를 짜서, 하나의 디자인 양식을 선택하고, 그 양식을 대표하는 몇 명의 디자이너를 뽑아서 조사해주면 됩니다. 발표의 방식이나 목표는 자유입니다. 쉬는 시간에 조를 정해서 오늘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 명단을 제출해주세요."
이강민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5~6명이라고...'
숫자도 적당했다.
'조별과제로 자연스럽게 섞여서 내 전공을 드러낸다. 어벙한 미대 남학생과는 확연히 다른 나만의 지성미와 리더십, 그리고 준수한 얼굴로 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둘 다 걸리면 더 좋고, 둘 중 하나만 걸려도 대박이야. 후후후.'
그리고 이강민은 자연스레 이수진과 한유나에게 다가갔다.
주위를 둘러보자, 그 둘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망설이는 남학생이 몇 명 더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강민은 한국대 법학과.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칼에 접근했다.
"저, 제가 이 수업을 혼자 들어서요. 괜찮으면 조별과제에 저도 받아주실 수 있을까요?"
그때 한유나 옆의 이주원이 대신 대답했다.
"그런데 우린 모두 서양화과라서 순수미술 쪽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우리의 주제 선정이나 발표 방향이 그쪽으로 편향될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훗, 나를 경계하는 건가? 하지만 그래봤자 나를 막을 순 없어.'
"괜찮습니다. 제가 맞춰가야죠."
이강민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는 한국대 법학과.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대생 조별과제 정도야 얼마든 자기가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몇몇의 남학생들이 그 장면을 보고는 애석해하며 물러나는 게 보였다.
'봤지? 한국대라고 다 같은 한국대가 아니라고. 우리 법학과는 머리도 좋지만, 행동에 옮길 때는 단호하게 움직이지. 너희들과는 차원이 달라.'
이강민은 그렇게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 * *
그리고 그날 오후.
조를 정한 김에 서양화과 네 명과 이강민은 짧은 회의까지 하기로 했다.
'여자들은 행동력 있는 리더에 쉽게 반하지. 자연스럽게 회의를 주도하며 둘의 관심을 끌자.'
이강민이 그렇게 결심하고 말을 하려는 순간, 한유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러 개의 디자인 양식이 있지만, 아르누보나 아르데코 정도가 우리에게 맞을 것 같아. 그 후로 넘어가면 상업 디자인과 순수미술의 경계가 더 뚜렷해지는 것 같아. 나는 디자인과 순수미술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잘 맞고,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아르누보와 아르데코는 1900년대 초기의 디자인 양식이었다.
어쨌든.
'이런.'
이강민이 타이밍을 놓쳤다.
그리고 다섯 중 넷이 순수미술 전공이니 한유나의 제안은 나름 합리적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동의해서 그녀에게 어필하자.'
이번에는 이강민이 찬성의 의견을 말하려는 찰나.
"나도 동의해. 다만 나중에 배척당한 아르누보보다는 이후 산업과 예술, 그리고 현대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아르데코가 더 나은 것 같아. 흥미로운 예술가도 많고, 유나 네 취향에도 맞을 거야."
이번엔 김태민이었다.
'뭐야, 이 자식. 실실 거리기만 하는 머리 텅 빈 미남이 아니었나?'
김태민은 유학파에 서양화과 수석 수재였다.
"나도 동의해. 샤넬이랑 랑방도 아르데코 시대에 활약하던 디자이너래. 특히 샤넬은 현대 여성복의 완성자라고 봐도 괜찮으니까 우리와도 잘 맞는 것 같아. 특히 라거펠트에 의해 샤넬의 디자인이 다양하게 변주되는 것도 흥미로운 소재라고 생각해."
이번에는 이수진.
'뭐야, 얼굴만 예쁜 백치미 계열인줄 알았는데, 똑똑하잖아? 매력이 추가네.'
수진도 나름 고등학생까지는 모범생이었다.
그리고 수진은 두 번째 듣는 디자인사 수업이었다.
아무튼 이강민은 말할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었다.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아르데코는 1차 대전 이후의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가 증가하던 시기, 그리고 새로운 지식인 계층이 경제 활동의 주체가 되던 시기였어. 또한 새로운 소재와 과학기술도 등장하던 시기였고. 그러니까 새로운 디자인 운동을 가능하게 한 시대적 환경도 같이 조사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
이번엔 이주원이었다.
'뭐야? 미대생들은 실기학원 다니느라 다 멍청한 것 아니었나? 애들 전부 왜 이래?'
이강민은 발언할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를 모르는 법학과였다.
'그래, 그럼 발표를 내가 맡겠다고 하자. 발표는 모두 싫어하니까, 발표를 맡으면 자연스레 리더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럼 제가 발표를 하겠습니다."
이강민이 손을 들고 당당히 말했다.
하지만 한유나가 이강민을 노려보며 질문했다.
"아르데코 시절의 대표적인 디자이너 세 명을 말해줄 수 있나요?"
"네? 그게..."
"아르데코 양식의 건물이나 디자인 작품 세 개만 말해줄 수 있나요?"
"그...그게..."
유나의 연이은 질문에 이강민은 하나도 대답할 수 없었다.
"발표는 대본만 외우는 게 아니라, 돌발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어야 해요. 발표는 중요해요. 조별 과제의 얼굴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사실 나도 발표를 맡고 싶어요. 강민씨도 발표를 맡고 싶다면 각자 발표를 준비해서 팀원들 앞에서 시연해보고 투표로 뽑도록 해요."
한유나의 똑부러진 제안에 이강민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이주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저, 잠깐 전화 통화 좀 하고 올게요."
그리고 멀리서 이주원의 전화 대화가 들렸다.
"네, 안대표님. 차기작 개봉 일정 잡히셨다고요. 이번 작품도 저번 영화처럼 대박이 나야할텐데. 안 그래도 소영씨와 시안 회의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만나서 이야기 나누시죠."
이강민은 그 대화를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통화야? 저게 일반적인 대학교 1학년의 통화 내용이야? 설마 이주원, 여학생들에게 잘 보이려고 연기하는 건가? 웃긴 놈.'
그때 김태민의 바지에서도 전화벨이 울렸다.
김태민은 허겁지겁 바지를 뒤져서 주머니에 든 것을 전부 탁자 위에 올리고 전화기를 꺼냈다.
'아니? 저것은?'
김태민이 탁자 위에 올린 것 중 하나는 바로 독일 고급 세단의 자동차 키였다.
"네, 엄마. 오늘은 친구 집에서 자고 갈 거예요."
짧은 전화를 끊고, 김태민이 여학생들에게 말했다.
"오늘 밤이랑, 내일은 제가 두 사람 태워줄 거예요. 주원이는 어머니 이사하는데 다녀온다고."
그러자 수진이 물었다.
"그럼 차는? 나는 주원이 차가 더 편한데."
"그럼 제가 주원이 차로 운전할게요."
주원의 차는 카니발이라서 짐도 많이 실을 수 있고, 촬영할 때 옷 갈아입기도 편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이강민은 눈이 동그래졌다.
'이주원의 자동차가 저 독일 세단보다 더 편하다고? 대체 무슨 차를 타는 거야? 이 놈들 대체 정체가 뭐야!'
다음 날 아침.
한유나는 한통의 문자를 받았다.
[ 죄송하지만, 저는 이 조랑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제가 다른 조를 알아보겠습니다. ]
이강민은 행동이 빠른 만큼, 포기도 빨랐다.
'뭐야. 이 사람.'
[ 네, 알겠습니다. ]
짧은 답장을 보낸 후, 유나는 폰에 저장된 이강민의 번호를 지웠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유나는 안 그래도 바빴다.
그래서 이것, 저것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