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59화 (59/203)

■ 59. 눈,코,입 □

"웃긴 놈."

발표를 하려는 순간, 이준성 교수가 먼저 말했다.

내가 이준성 교수를 바라보자, 이준성이 교수가 손짓을 했다.

"계속 해."

내가 그린 그림은 나방이었다.

캔버스 위에 한 톤을 낮춘 정원을 배경으로 그리고 그 중앙에 알록달록한 무늬를 가진 커다란 나방을 자세하게 그렸다.

"어렸을 때, 학교의 정원에 커다란 나방이 앉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친구들과 저는 그 나방에 돌을 던지고 나뭇가지로 잡아서 죽였습니다. 왜 그랬냐면, 아마 무서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가까이서 본 나방은 몸통엔 털로 덮여 있고, 날개엔 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 나방이 떠오르곤 합니다."

김태민을 작업실에서 만난 밤.

그림들마다 뒤편에는 [만지면 큰일납니다.] 메모가 붙어 있었다.

그 메모가 왜인지 어린 시절의 나방을 떠오르게 했다.

털과 가루가 가득한 나방을 만지면 큰일 날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물감.

나는 당연히 아크릴 물감을 손으로 만져봤다.

일부러는 아니고, 그림을 많이 그리다보니 만져보게 되었다.

물감은 무척 부드러웠다.

'아마, 나방의 날개를 만지면 이럴 것 같았어.'

그리고 아크릴 물감의 색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유화와 달리 아크릴 물감은 인공적이고 선명한 느낌이 강했다.

그런 작위적이고 어색한 느낌이 화려한 나방의 날개를 떠올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방은 분명 자연물인데도, 낯설고 위협적인 색을 가지고 있었어.'

그리고 김태민의 고양이.

김태민은 임파스토 기법으로 털이 많은 고양이를 그렸는데, 그게 무척 잘 어울렸다.

그래서 나는 털이 많은 소재도 괜찮겠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 모든 것들을 조합해 선택한 소재가 바로 나방이었다.

나는 발표를 이었다.

"저는 아크릴 물감을 썼는데 생각보다 다루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흰색을 섞어서 물감의 광택을 줄이고, 건조 완화제를 섞어서 응고 속도를 늦추었습니다. 임파스토 미디엄을 섞어서 물감을 두텁게 발라 임파스토의 입체감을 살렸습니다."

임파스토 미디엄은 아크릴 물감의 부피를 늘려주는 희석제였다.

매일 밤, 잡생각 제거와 밝은 눈을 써서 아크릴 물감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

그랬더니 제법 아크릴 물감과 보조제들을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물감을 두껍게 바르면 물감 자체가 갖는 입체감과 생동감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린 나방은 캔버스에서 튀어나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돋보였다.

나방 날개에 가득 묻어 반짝이는 가루.

마침 아크릴 물감도 굳으면 광택이 있었다.

독이 묻었을 것 같은 선명한 색깔.

기이한 무늬.

털이 수북한 몸통.

나는 꽤 잘 그렸다고 자부했는데, 학생들이 다 같이 징그럽다는 표정이었다.

"자, 주목."

이준성 교수가 내 그림을 가리켰다.

'또 어떤 막말을 하려는 걸까.'

다른 학생들이 당하는 모습을 워낙 많이 봤기 때문에 나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림을 팔려면 말이다.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그림을 아주 잘 그리거나, 아니면 확실하게 시선을 붙들 거나. 영국의 어떤 작가는 소머리와 파리로 유명세를 얻기도 했다. 여기 이 징그러운 나방도 비슷한 원리다. 일단 이 강의실만 해도 여러 쓰레기가 있지만, 그 중 어떤 쓰레기가 가장 눈에 띄지?"

그리고 이준성 교수는 내 그림을 가리켰다.

나는 좀 억울했다.

나는 시선을 붙잡기 위해 징그러운 나방을 그린 게 아니었다.

단지 내 기억 속 나방이 임파스토 기법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그린 것이었다.

'그려놓고 보니 후련한 것도 있었어.'

어린 시절부터 머릿속에 맴돌던 장면을 마침내 그리니까 일종의 인생의 숙제를 마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 인생의 숙제와는 상관없이 필터 없는 교수의 감평은 계속 되었다.

"너도 그림 좀 그려본 놈이냐? 나방의 묘사도 적절했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네 의도가 잘 드러난다. 징그럽게 잘 그렸다. 넌 몇 살이냐?"

나이는 왜 물어보는 걸까.

딱 봐도 어려 보일텐데.

나는 회귀자다.

겨우 다시 젊어졌다.

못 생겼다고 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늙어 보인다고 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스물입니다."

나는 그림을 좀 그려보진 않았다.

하지만 아크릴 나방 한정으로는 스케치북에 수십 번 연습하고 그렸으니 꽤 그려본 놈이 맞았다.

아크릴 물감의 가장 큰 장점은 종이와 캔버스 둘 다 그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 스무 살에 이 정도 시선을 붙잡을 수 있으면 넌 그림 장사꾼 소질이 있다. 그리고 이런 징그러운 그림을 원하는 변태놈들도 제법 많을 거다. 80만원 쳐주마."

어랏?

뜻밖의 높은 가격을 받았다.

김태민에 이어 2위.

심지어 유나나 남동민 보다 높은 가격이었다.

'그런데 이건 칭찬이 맞는 걸까?'

이준성 교수는 칭찬도 기분 좋지 않게 하는 특이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한참을 이준성 교수가 혼자 실컷 떠들다가 크리틱이 끝났다.

그는 학생들보다 자기가 더 주목받길 원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실컷 긴장했지만, 생각만큼 짜증나는 수업은 아니었다.

'쓰레기라는 말을 워낙 많이 들어서 그런지, 나중엔 별로 기분도 안 나빴어.'

다시 이준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오늘 쓰레기들 실컷 봤다. 그림을 팔려면 발악하고 노력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지망생들이 그림을 팔지 못해서 그림을 접고 다른 일을 찾을 것이다. 그림이 안 팔려서 굶어 죽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살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림을 팔려면 아득바득 더 필사적으로 그려라. 오늘 말을 많이 했더니 맥주가 땡기는 군. 오늘도 한 잔 할 사람은 반장을 따라 오도록. 그럼 이만."

자기가 좋아서 말을 많이 해놓고, 그걸로 또 술 마실 핑계를 만들었다.

이준성 교수가 나가고 김대성이 울상을 지으며 술집 회비를 걷었다.

"나도 참가할게."

남동민이었다.

"형도 가게요? 학원은요?"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

남동민은 이 수업 한정으로 든든한 동맹이었다.

그런데 혼자 이준성 교수의 술자리에 참석하려 하다니.

살짝 배신이었다.

"잠깐만 앉았다 가려고. 다음 그림은 값을 더 잘 받아야 하니까, 이준성 교수를 분석할 거야. 지피지기야."

남동민도 나름 열심이었다.

"형, 파이팅입니다."

"오늘 나방 좋았어. 강사 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형도 오늘 할머니 좋았어요."

그리고 내 그림 앞에 유나가 서 있었다.

요즘 많이 순해지긴 했지만, 유나 역시 한 승부근성 하는 녀석이었다.

그림 값으로 나한테 졌으니 지금쯤 부글거릴 것이다.

하지만 부글거리는 사람을 보면 더 놀리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비켜. 70. 80만원 나가신다."

유나는 내 그림을 보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리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징그러."

그때 한 명 더 나타났다.

김태민이었다.

김태민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징그러."

* * *

원 디자인 사업은 순조로웠고, 하이 유나도 순조로웠다.

유나 재킷은 하루에 10벌에서 20벌은 꾸준히 나가고 있었다.

600벌로 시작했는데, 150벌이 넘게 팔렸다.

더위가 사라지면 판매에 가속이 붙을 지도 몰랐다.

'반응도 좋고, 마진도 좋아. 9월 안에 다 팔린다면 한 번 더 생산해도 될지 몰라.'

그리고 유나 재킷이 혼자 팔리는 게 아니라, 다른 옷도 데려갔기 때문에 매출도 동반 상승했다.

무엇보다 하이 유나의 회원 가입이 크게 늘고 있었는데 점점 연령이 높아지고 있는 게 고무적이었다.

밤 11시.

우리는 오피스텔에서 회의 중이었다.

회의의 주제는 하이 유나의 신상 촬영 계획.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촬영 전날에는 일찍 일을 마친다.

모델들이 충분히 쉬고, 잠을 자야 했기 때문이다.

모델들 컨디션이 좋아야 포즈도 자연스럽고, 표정과 피부도 좋다.

"그래, 오늘도 수고했어!"

정화 선배는 기숙사.

수진 선배는 결국 유나의 방에 눌러 앉았다.

다행히 둘이 성격이 잘 맞아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하긴 수진 선배가 워낙 순둥이니까.'

유나도 나한테나 까칠하지 원래 착한 편이다.

"정화 선배, 학교 기숙사 가실 거면 저랑 같이 가요. 저 작업실 갈 거예요."

나는 밤길에 숙녀를 바래다주는 매너 회귀남.

유나가 주먹을 들어 내 어깨를 때렸다.

이젠 말없이 때려도 대강 의미가 전달된다.

아마 적당히 하고 일찍 자라는 뜻일 것이다.

그때 오피스텔의 문이 열리고 김태민이 들어왔다.

그리고 김태민이 우릴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다. 늦지 않게 왔네. 제가 뭘 가져왔게요?"

집에 다녀온 모양인데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갈비찜이랑 잡채랑 밑반찬들...어머니가 챙겨주셨어요. 밥 먹고 가세요!"

"신난다! 안 그래도 라면 끓여 먹고 자려고 했는데!"

수진 선배가 제일 반가워했다.

김태민은 매일 이 오피스텔에 소풍 오는 것 같다.

귀여운 녀석, 하지만 밥솥이 없는 걸?

그때 김태민이 오피스텔 문 뒤에서 뭔가를 또 가져왔다.

"내가 밥솥도 가져왔어! 쌀까지!"

팀 유나 셋이 동시에 격하게 환호했다.

이런.

'김태민 이 녀석...'

내가 돈이 없어서 밥솥을 사지 않은게 아니었다.

이렇게 유나의 자취방은 내게서 한 걸음 더 멀어졌다.

나만 빼고 모두 행복한 밤이었다.

* * *

그렇게 2시가 다 돼서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임파스토 과제가 끝나긴 했지만, 미대생의 과제는 끝이 없었다.

내가 간 곳은 서양화과 작업실이 아니라, 도예과 공동 작업실.

거기에 옹기토 자소상이 있었다.

자소상에 묶어둔 비닐을 벗기자, 촉촉한 내 진흙 얼굴이 드러났다.

막 작업을 시작하려는 찰나.

난 손을 멈추었다.

'벌써 몇 번째지? 난 항상 열심히 만들었는데 계속 제자리걸음이야.'

열심히 만들어도 내 얼굴은 계속 어긋나 있었다.

[ 이 강의실에서 자기 얼굴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우린 모두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요. ]

기초 도예 김미숙 교수의 말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설마 도예 실력 부족이 아니라, 내 눈이 잘못된 걸까?

그리고 곰곰이 교수가 했던 말들을 복기했다.

[ 자소상을 만들다 좌절하면 친구의 작품을 확인하세요. 앞이 안 보일 땐 친구들에게 물어가세요. ]

분명 그런 이상한 말을 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에서 유나의 자소상을 찾았다.

그리고 내 자소상 옆에 유나의 자소상을 두고 비닐을 벗겼다.

분명 못 만든 자소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나의 그림 실력을 생각해볼 때, 분명 기대 이하의 자소상이었다.

'확실히 이상해. 유나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렸지. 조소 경험은 없지만 인간의 얼굴을 틀리게 만들 리가 없어.'

분명 뭔가 있었다.

나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유나까지 틀리고 있다면 이건 분명 실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난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사진 파일을 클릭했다.

내 노트북엔 하이 유나 촬영사진들이 백업되어 있었다.

거기엔 온갖 표정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유나의 사진이 수천 장 들어 있었다.

난 유나의 얼굴을 크게 띄우고 유나의 자소상을 돌려가며 하나하나 사진들과 비교해보았다.

'이상해. 눈, 코, 입, 얼굴형까지 하나하나 보면, 모두 모두 유나가 맞아. 그런데 전체는 묘하게 찌그러져 있어. 왜지?'

눈을 돌리자 옆에 있는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쳤다.

탐정처럼 인상을 쓰며 뭔가를 생각하는 모습.

약간 전생의 내 중년 모습이 떠올랐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거울이 거짓말이라도 하나?'

그러다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렸다.

그리고 유나의 키 정도로 얼굴을 낮추고 유나의 자소상의 정면을 바라봤다.

'이런...'

거기엔 꽤 잘 만들어진 유나의 얼굴이 있었다.

이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문제는 거울이 아닐까.'

인간의 얼굴은 입체였다.

이마는 얼굴 위로 이어지고, 눈썹은 얼굴 옆면으로 이어진다.

광대는 귀까지 이어져 있고, 입술은 뺨까지 이어져 있었다.

얼굴은 복잡한 톱니바퀴처럼 정밀하게 맞물려 있었다.

'하지만 우린 평면에 훈련되어 있었어.'

거기다 거울을 보면서 만들었으니, 정면을 보고 만든 후, 옆면을 따로 만들면 결국 얼굴은 어긋나기 마련이었다.

'이 거울, 제대로 만들기 위한 준비물이었는데, 함정 카드가 된 것 같아.'

난 어렴풋이 김대성이 만들던 방식을 떠올렸다.

김대성은 분명 머리 전체의 구조를 먼저 만들고, 세부는 나중에 들어갔다.

'거울을 보고 만든다기 보다는 사람의 얼굴을 외워서 만든 느낌이었어.'

분명 입시 때 그렇게 훈련받았을 것이다.

'그럼 김태민은?'

김태민의 자소상도 나쁘지 않았다.

분명 김태민은 거울도 보지 않고 설렁설렁 대강 만들었을 것이다.

'김태민의 대충하는 성격이 우연히 함정 카드를 피해간 거야.'

어쨌든 교수의 말이 옳았다.

답은 친구의 자소상에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