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살벌한 크리틱 □
"자, 다음 쓰레기!"
이준성 교수가 다음 학생을 불렀다.
학생들은 눈치만 볼 뿐 쉽게 나서지 않았다.
앞에서 김대성이 그렇게 당하는 걸 봤으니 당연했다.
나도 나서기 싫을 정도였다.
그때 끼익.
남동민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남동민은 앞으로 나가 이젤에 자신의 그림을 얹었다.
남동민이 그린 그림은 지하철 역 입구였다.
나이든 여자가 지하철 입구 벽에 기대서 여러 무언가 알록달록한 것을 팔고 있었다.
물감이 두껍게 발라져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대추나 마늘 같은 것이었다.
"저는 평소에 인물화를 자주 그리는 편입니다. 특히 임파스토의 거친 느낌이 나이든 사람들을 표현하기에 적당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1학기 때 그림은 발로 뛰면서 그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주위의 나이든 사람을 찾다, 이 할머니를 발견했습니다. 아직 더운 날씨였는데, 더운 공기가 할머니를 짓누르는 인상을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영리한 선택 같았다.
남동민은 입시 학원 강사의 특성상 인물화를 자주 그린다.
새로운 기법을 연습할 때, 익숙한 소재에서 출발하면 충격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과연 남동민의 그림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이준성 교수는 잠시 남동민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김대성의 경우엔 말을 끊고 막말을 했는데, 그때보다는 확실히 상황이 나아보였다.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시나?"
"네?"
"부모님이 농사를 짓냐고!"
"아닙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십니다."
"할머니가 있나? 할머니가 거리에서 물건을 파시나?"
"아닙니다. 할머니는 목욕탕을 경영하십니다."
"그래서 그런가? 감동이 약해. 이 그림의 세일즈 포인트가 뭐지? 관객들이 이 그림의 어디에 공감해서 지갑을 열어야 하지?"
"네?"
이준성 교수의 갑작스런 질문에 남동민은 머뭇거렸다.
'확실히 교수는 교수인 건가?'
얼핏 보면 무난하고 잘 그려진 느낌이었다.
임파스토와 노인도 괜찮게 어울렸다.
하지만 진한 물감으로 거칠게 그려진 노인의 얼굴은 흔하고 진부한 소재이기도 했다.
"그림 기술적으로는 깔 게 없다. 하지만 세일즈 포인트가 약하다. 거리에 쪼그려 앉아있는 노파에게서 동정심을 느껴야 하나? 아니면 나이든 얼굴에서 경외심을 느껴야 하나? 아니면 거리에 무관심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삭막함을 느껴야 하나? 그림이 중구난방이다."
교수의 지적을 들은 남동민은 자신의 그림을 다시 살펴봤다.
이준성 교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발로 뛰면서 그린다라... 재밌는 소리를 하네. 하지만 더 뛰었어야지. 이 그림은 50만원 준다. 그런데 너, 늙어 보이는데 몇 살이냐?"
갑작스런 외모 지적에 남동민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스물여섯 살입니다."
"그래. 그림 좀 그려본 놈이구나. 이 바닥은 살벌하다. 대기업 취업만큼이나 나이 많은 게 불리할 수도 있다. 더 빡세게 그려. 아무리 잘 그려도 안 팔리면 쓰레기다."
이제 좀 이준성 교수의 성향을 알 것 같았다.
생각나는 대로 거칠게 마구 이야기하고, 약점을 드러내면 물고 뜯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분석은 어느 정도 예리한 것 같았다.
이준성이 강의실을 향해 외쳤다.
"자, 이 그림에 대해 생각 있는 놈은 의견을 말해봐라. 그림을 못 그리면 말이라도 잘 해야지. 어서!"
교수의 말이 꼭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아 뜨끔했다.
학생들 몇이 손을 들고 남동민 그림에 대해 의견을 말했다.
기술적으로 나쁘지 않은 그림이라 김대성 때보다는 의견이 많았다.
나도 조심스레 손을 들어보았다.
말이라도 잘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동민의 그림에 대해 말했다.
"할머니를 누르는 더운 공기라는 말에 공감이 갔습니다. 보이는 게 아니라 온도와 느낌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참신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괜찮은 편이지만, 전생에선 나도 그랬다.
7월이나 8월이면 더위에 눌려서 숨이 막혔다.
개인적으로는 그때의 고통이 떠올라 남동민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대상과의 거리가 약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할머니를 그리고 싶었다면 할머니에게 더 다가가서 사진을 찍었어야 하지 않나. 거리 자체를 그리고 싶었다면 할머니에게서 더 멀어졌어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말을 듣자 남동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를 그리고 싶었는데, 직접 대상을 찾아 돌아다닌 게 처음이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거의 숨어서 사진을 찍다시피 했더니 할머니에게 충분히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이준성 교수가 워낙 거칠게 감평을 하자 뜻밖의 효과가 생겼다.
바로 학생들 사이가 끈끈해진 것이었다.
1학기 서진석 교수의 시간에는 서로 물고 뜯고 싸웠는데 이제 남동민은 내 지적에 오히려 고마워했다.
'그러고 보니 서진석 교수도 나쁜 사람이네. 학생들 사이를 이간질 시켰어.'
세상에 좋은 교수는 없는 것 같다.
내 의견이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준성 교수는 딱히 별 말이 없었다.
아마도 남의 의견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인 것 같았다.
그렇게 남동민의 발표가 끝났다.
그림값 50만원.
애매한 액수였다.
대학생 그림도 종종 몇백만 원에 팔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김대성의 두 배 였으니 남동민은 딱히 그림값에 불만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한두 명 후에, 드디어 김태민의 차례가 되었다.
김태민은 자신의 고양이 그림을 이젤에 걸었다.
"저는 고양이를 그렸습니다. 저는 두 마리 고양이를 기르는데요. 고양이의 풍성한 털이 임파스토에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고양이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데, 그 빠른 움직임을 임파스토로 표현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또 고양이는 쉴 새 없이 털을 뿜습니다. 그러다 문득, 고양이는 사실 털이 아니라 온기를 뿜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고양이의 색이 번지는 것처럼 표현해 주변에도 거칠게 붓질을 했습니다."
이준성 교수의 막말 때문에, 김태민이 그림을 걸기 전까지 딱딱하게 얼어붙은 강의실이었다.
하지만 김태민이 고양이 그림을 걸자, 강의실 전체가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김태민의 그림은 확 와닿았다.
그리고 김태민의 느긋하고 듣기 좋은 말투가 이준성 교수의 몰아치는 고함과 극과 극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게로.
'김태민 저 뻔뻔한 자식.'
난 김태민이 고양이를 그린 이유를 알고 있다.
일단 그려놓고 이유를 만들다니.
화가들이 자주 쓰는 방식이긴 하다.
하지만 일단 그림이 괜찮았고, 또 김태민이 워낙 느긋한 얼굴로 연기를 잘 해서 모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이준성 교수는 한참동안 고양이 그림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입을 열었다.
"백만원."
최고가가 나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김태민을 한참 바라봤다.
"너도 그림 좀 그려본 놈 같은데 몇 살이냐."
"스...스무 살입니다."
답변을 듣자 이준성 교수가 인상을 썼다.
"자, 모두 주목. 이 놈은 잘생겼다."
모두가 다 아는 사실.
"그림을 판다는 것은 결국 화가 자신을 판다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그럼 잘생긴 놈이 유리하다. 아무래도 방송을 타도 한 장면 더 타고, 인터뷰를 해도 사진이 크게 실린다. 단체전이라도 하면, 잘생긴 놈에게 기자가 몰린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잘생긴 놈이 그림도 잘 그린다? 그럼 너희 못생긴 쓰레기들은 두 배로 더 열심히 그려야 한다. 알겠나!"
뭔가 맞는 말 같긴 한데, 기분이 씁쓸했다.
'김태민 때문에 못생긴 쓰레기가 되다니...'
유미도 그렇고, 이준성 교수도 그렇고 모두 미웠다.
그리고 이준성 교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그림도 그림으로는 깔 게 없다. 잘 그렸다. 옛날 화가들이 생각나는 그림이다. 그리고 고양이는 잘 팔린다. 여자들이 좋아하지. 잘 생긴 놈이 그린 고양이라면 더 잘 팔리겠지. 그래도 굳이 억지로 트집을 잡는다면..."
이준성이 김태민의 그림을 노려보며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더 치열해야 하지 않나? 스무 살 대학생 놈이 겨우 고양이나 그리고 있어? 저기 스물여섯 살 늙고 못생긴 놈은 발로 뛰며 그렸다는데?"
김태민 때문에 남동민은 갑자기 스물여섯 늙고 못생긴 놈이 되었다.
이준성 교수는 필터 없이 그냥 말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김태민이 대답했다.
"치열합니다."
"웃기고 있네. 네가 치열하다고? 네가 치열한 게 뭔지 알아? 내가 유학 갔을 때 학비가 없어서 불법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이틀을 샌드위치 하나로 버텼다. 그런데 네가 뭘 했다고 치열해?"
"아니요. 저 말고 고양이요."
"엉?"
이준성 교수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양이가 게으르게 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한시도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고양이를 계속 보고 있으면 쟤들도 참 열심히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거 웃긴 놈이네."
이준성 교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학생들 차례.
이준성 교수가 모처럼 칭찬 비슷한 것을 해서인지, 아니면 그림 덕분인지 학생들이 활발히 손을 들었다.
당연히 대부분 칭찬이었다.
"자, 다음 쓰레기!"
이준성 교수가 강의실을 향해 외쳤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유나가 먼저 벌떡 일어났다.
아마도 쓰레기란 말에 화가 나서 싸우러 가는 것 같았다.
나는 유나의 기세에 눌려 자리에 앉았다.
유나는 앞에 나가 이젤에 그림을 얹었다.
"저는 임파스토가 물감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기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겪은 일 중 가장 색이 아름다웠던 순간을 그려봤습니다."
유나가 그린 그림은 얼마 전 우리가 촬영했던 풀 빌라 펜션이었다.
여름밤이었고, 단순화시켜 그려진 사람들이 술과 고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펜션 건물 안에서 나온 빛을 진한 노란 물감으로 표현했다.
펜션 위로, 짙은 울트라 마린과 여러 색을 겹겹이 혼색해 은은하게 빛나는 여름 밤하늘을 그렸다.
그리고 멀리서 까만 밤바다가 보였다.
꽤 멋있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엔 그림 속 경험을 공유하는 입장이라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했다.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을 색이 아름다웠던 순간이라 말해줘서 기쁘고 고마웠다.
잠시 후.
"잘 그렸군. 사람들을 단순화 시켜서 그리면서도 동세나 비례가 어색하지 않았다. 여러 대상을 담으면서도 시점도 정돈돼 있다. 그림 분위기도 마음에 든다. 네가 그곳에서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하게 한다. 네 말이 맞다. 나도 네 말에 동의한다. 물감은 원래 예쁘지. 세상의 많은 그림들이 물감을 그냥 짜 놓은 것보다 더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적어도 물감보단 낫다. 70만원."
나쁘지 않은 평가와 나쁘지 않은 가격이었다.
김태민의 100만원이 1등이었고, 유나가 2등이었다.
마치 싸우러 가듯 자리를 박차고 나온 유나였다.
하지만 교수의 평가가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는지 유나는 그냥 수긍하고 전투를 포기했다.
"자, 다음 쓰레기!"
드디어 내 차례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그림을 강의실 앞 이젤에 걸었다.
내가 막 발표를 하려는 순간, 이준성 교수가 먼저 말했다.
"이 놈도 웃긴 놈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