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고양이의 비밀 □
'자소상은 질 수 없지.'
자소상은 붓이 아니라 손끝에서 이뤄진다.
내가 김태민이나 유나를 당장 이길 수 있는 분야가 있다면 바로 자소상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커다란 흙덩이를 받침대 위에 올리고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밝은눈].
1 노력 코인이 차감되고, 내 두 눈이 선명해졌다.
나는 거울 안의 내 얼굴을 노려봤다.
'내 얼굴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데.'
김태민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 것 같았다.
아무튼.
잡생각도 제거하고, 잠깐 숲 속도 산책했다.
그리고 쿵,쿵,쿵.
흙을 두드리며 내 얼굴의 윤곽을 잡기 시작했다.
눈도 파내고 코도 붙였다.
이때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충분히 주무르고 꾹꾹 누르는 게 포인트였다.
나는 자신 있었다.
입시를 하며 사물을 관찰하는 방법을 배웠다.
눈으로 대충 봐도 비례나 길이 등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체의 규칙들을 외우고 있었다.
코와 눈의 마감새.
어색하지 않은 비율.
입술과 턱의 모양.
순식간에 그릴 수 있도록 달달 외우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미친 듯이 손을 움직였다.
'꽤 잘 나온 것 같은데.'
일단 정면 얼굴 위주로 대강 윤곽을 잡았다.
어렴풋이 내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앞에서 김미숙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만들었네요. 혹시 인체 두상을 해 본 경험이 있나요?"
김대성 쪽이었다.
김미숙 교수가 김대성을 칭찬한 것이었다.
"아, 네. 입시할 때 조소를 6개월 정도 배웠습니다."
"어쩐지. 잘하네요."
나는 김대성의 자소상을 흘끗 쳐다보았다.
아직 세부적으로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자연스러운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나도 제법 잘한 것 같은데?'
그런데 쓰윽.
김미숙 교수는 내 옆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갔다.
왜지?
하지만 칭찬을 들은 사람은 김대성이 전부였다.
나는 김태민과 유나를 바라봤다.
김태민은 굉장히 빠르게 만들고 있었다.
거울은 거의 보지 않고 큰 덩어리부터 다듬고 있었다.
'김대성이 만드는 방법과 거의 비슷한데...'
그리고 유나를 쳐다봤다.
'어?'
유나는 거울을 보면서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해.'
자소상이 약간 말린 과일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더 신기한 건 본인은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열심히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만든 자소상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런...
내 자소상 역시 쥐어짠 오이지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앉아있을 땐 나도 몰랐었다.
'이렇게 만들고 칭찬을 바라고 있었다니.'
쿠웅.
나는 주먹으로 쳐서 내가 만든 얼굴을 뭉개버렸다.
남이 볼까 창피할 정도였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한 시간 후.
'대체 왜지?'
이번에도 내 얼굴은 역시 찌그러져 있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에 가마 일정을 통보 할테니, 일정에 맞출 수 있도록 미리 작업해두기 바랍니다."
김미숙 교수가 수업 종료를 통보하자 여기, 저기서 탄식이 들렸다.
대부분 앉아 있을 땐 모르다가 일어나서 보면 자소상이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김태민과 유나의 작품도 확인했다.
김태민의 자소상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유나의 얼굴은 역시 계속 말린 과일이었다.
[조소과가 아니라면 모두 좌절을 겪게 될 거예요.]
김미숙 교수의 예언이 현실로 이뤄진 것이었다.
* * *
개강했지만, 일은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다만 9월부터 승희씨가 출근했기 때문에 내가 많이 여유로워졌다.
하지만 늦게까지 원 디자인의 새 상품을 다듬었다.
그리고 하이 유나의 주문 목록을 만들어 사입 대행사에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시간은 밤 11시가 넘었다.
이제 학교의 작업실로 갈 차례.
학교에 도착하니 벌써 자정이었다.
작업실은 텅 비어 있었다.
[ 만지지 마세요. ]
[ 가까이 오지 마세요. 건드리면 큰일 납니다.]
이젤이나 캔버스 뒤편 마다 비슷한 경고문들이 크게 적혀 있었다.
임파스토 기법은 물감을 두껍게 바르는 기법.
유화라면 마르는데 오래 걸린다.
그러니 잘못하다 스치기라도 하면 옷에 지워지지 않는 물감 자국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옷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림이었다.
그러니 임파스토 과제가 있는 시기에는 모두들 신경이 예민해졌다.
'하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인간의 심리.'
나는 조심스레 작업실을 돌아다니며 다른 학생들의 그림들을 살펴봤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그림도 있고, 물감만 덕지덕지 바른 그림도 있었다.
그때 드르륵.
작업실의 문이 열리고 누가 들어왔다.
"역시 여기 있었네."
바로 김태민이었다.
오피스텔에 갔다가 내가 없자 이리 온 모양이었다.
"나도 온 김에 그림이나 그려야겠다."
그리고 김태민은 자기 자리에 앉았다.
나야 항상 새벽까지 일하거나 그리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김태민이 새벽까지 그리겠다는 말은 아침 수업을 재끼겠다는 뜻이었다.
솔직히, 약간은 선배가 잔소리 할 만 했다.
아무튼.
나는 김태민 옆에 다가가서 김태민의 그림을 바라봤다.
'역시.'
김태민은 김태민이었다.
김태민은 이번에도 고양이를 그렸다.
그런데 무척 잘 어울렸다.
고양이털의 푹신푹신한 느낌이나, 고양이의 빠르고 경쾌한 움직임이 두껍게 바른 물감과 무척 잘 맞았다.
물론 소재도 좋았지만, 그걸 뒷받침하는 김태민의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또 고양이를 그렸네."
"내 영업 비밀을 말해줄까?"
김태민의 영업 비밀이라.
궁금하긴 했지만 알아봤자 과연 내게도 유용할지 알 수 없었다.
"뭔데?"
"난 그릴 게 생각나지 않으면 고양이를 그려. 고양이는 만능이야. 일단 고양이를 그려놓고 대강 이유를 만들면 사람들이 다 수긍하더라고."
"헐."
살짝 납득이 가기도 했다.
고양이는 예술가와 잘 맞는 동물이었다.
'이 녀석 1학기 첫 시간에도 고양이를 그렸었지.'
그때 김태민의 그림에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그걸 보고 나도 열심히 그리겠다고 속으로 다짐까지 했었는데...
이런 이유로 고양이를 그렸다니.
억울함이 밀려왔다.
그런데 김태민이 내게 물었다.
"넌 왜 아직 시작도 안했어?"
"이제까지 연습만 했어. 그리고 아직 뭘 그려야 임파스토의 느낌이 날지 정하지도 못했어."
"재미있는 것 같아."
김태민이 오일에 붓을 씻으며 말했다.
"뭐가?"
"화가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을 썼을 뿐이잖아. 그게 우연히 임파스토였겠지. 그런데 우리들은 반대로 기법을 정하고 소재를 찾고 있잖아. 하긴 우린 아직 그림을 배우는 중이니까."
김태민이 혼자 말하고 혼자 답까지 내놓았다.
그런데 문득 괜찮은 생각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임파스토였다. 그 말은 반대로 말한다면 임파스토가 아니면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렸다.'
김태민의 말은 소재는 아니지만, 소재를 고르는 기준을 제시해줬다.
덕분에 머릿속을 맴돌던 몇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고마워. 태민아."
"내가 뭘 했지?"
그리고 나는 노트북을 켜고, 자료를 검색했다.
* * *
그리고 순식간에 며칠이 지났다.
시간은 아크릴 물감처럼 빨랐다.
드디어 2학기 첫 크리틱의 날이 밝았다.
미대생들에겐 승부의 시간.
이준성 교수가 악명이 높았고, 또 그림들이 제대로 마르지 않아서 학생들도 전부 예민했다.
'자칫 실수라도 해서'
캔버스를 엎기라도 하는 날엔, 2주간의 과제도 날아가고 강의실 바닥에 대참사도 일어난다.
우리들은 모두 조심조심 그림을 벽면에 세우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드르륵.
문이 열리고 이준성 교수가 등장했다.
"자, 첫 크리틱이다. 오늘은 또 어떤 쓰레기들이 나를 열 받게 할까. 참고로 미리 경고할 게 있다."
아직 경고할 게 남았다는 게 신기했다.
"많은 교수들이 크리틱에서 학생만큼 조심한다. 왜냐면 학생들이 멍청하기 때문이다. 교수가 한 마디 하면 그게 법이나 진리인줄 알고, 학생들이 무조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콰앙.
여기까지 말하고 이준성 교수는 교탁을 한 번 내리쳤다.
이준성의 버릇 같았다.
"하지만 난 반대로 생각한다. 너희들은 비싼 등록금 내고 바쁜 나를 이 자리에 초빙했다. 그런데 교수가 점잖은 척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적극적으로 너희들의 그림, 아니 쓰레기를 깔 것이다. 억울하면 덤벼라. 내가 교수라고 내 앞에서 매가리 없게 구는 놈들은 절대 화가로 살아남지 못한다. 알겠나!"
하지만 학생들은 오히려 더 겁먹은 것 같았다.
그렇게 모두들 긴장한 가운데 크리틱이 시작되었다.
"자, 처음은 누구지?"
"제가 하겠습니다."
모두 망설이자 한 명이 나섰다.
다름 아닌 반장 김대성이었다.
김대성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그림을 이젤에 걸었다.
약간 밥 로스의 참 쉽죠? 느낌의 그림.
물감으로 두껍게 그린 꽃과 하얀 물결이 이는 호수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도 임파스토라는 주제에는 나름 충실했다.
"저는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교수님 말씀대로 임파스토 기법은 입시미술에 익숙한 저에겐 생소해서 인터넷으로 기법을 뒤져서..."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이준성 교수가 김대성의 말을 자르고 외쳤다.
"15만원."
"네?"
"아니다. 네가 한국대 학생이란 걸 앞세우면 25만원까지는 받을 수 있겠다."
"네?"
"내가 말했지. 나는 팔리는 그림을 그리라고 가르친다. 네 그림은 잘 받아야 25만원이다. 꽃이랑 호수라... 노부부가 사는 25평 아파트 부엌에 걸어두면 어울리겠네. 이거 그린 화가님이 한국대 나오셨대요. 이렇게 손님들한테 자랑하면서."
이준성 교수의 혹평을 듣자 김대성은 당황해서 얼어붙어 버렸다.
하지만 이준성 교수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하면 가르쳐 줄 것 같은 그림인데. 직접 배워서 그리는 거랑, 이걸 사는 거랑 어느 쪽이 더 싸게 먹힐까?"
정화 선배는 분명 자기편한테는 잘 해준다고 그랬는데.
정화 선배의 말이 틀렸거나, 아니면 김대성이 아직 교수의 편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림을 돈을 받고 판다는 일은 말이다!"
이준성이 크게 외쳤다.
"보는 사람을 감동시켜서 지갑을 열게 하고, 그 그림을 벽에 걸어둔 게 자랑스럽게 느껴지도록 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려면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김대성이라고 했나. 생각을 좀 하란 말이다. 한국대나 들어온 놈이 임파스토 그려 오랬더니 이발소 달력을 그려와!"
이젠 김대성이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의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교수가 그랬으니 학생들도 별 할 말이 없었다.
"꽃잎의 입체감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호수의 물결이 잘 산 것 같습니다."
몇 명이 의무적으로 손을 들었고, 그렇게 첫 번째 발표가 끝났다.
김대성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자기 자리로 들어갔다.
"자, 다음 쓰레기."
이준성 교수가 외쳤다.
{@PIC:379105}
<르누아르>
{@PIC:379107}
<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