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확률 □
'특정 분야라...'
원 디자인은 지금 쇼핑몰 디자인만 제작해 쇼핑몰 거래 사이트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영화 홈페이지도 맡긴 했지만, 그것은 평범한 루트를 통한 판매는 아니었다.
'보통의 웹 에이전시라면...'
대개 3개의 단계를 거쳐서 웹 사이트를 판매한다.
첫째. 검색.
웹 사이트가 필요한 사람들은 먼저 검색 사이트에서 웹 에이전시를 검색해보기 마련이다.
그런데 검색 결과에서 상위권에 노출되려면 검색 사이트의 키워드 광고를 구매해야 했다.
웹 에이전시 간 경쟁이 심화되고 있어 키워드의 가격도 계속 오르고 있었다.
그만큼 신생 에이전시의 진입 장벽은 높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포트폴리오.
키워드 광고로 손님을 불러들였으면 눈길 가는 포트폴리오로 손님을 붙잡아야 한다.
보통 손님들은 이미 봐둔 사이트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본 것과 비슷하거나 더 나은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어야 고객을 붙잡을 수 있었다.
셋째는 전화 상담.
웹 사이트 구축은 작게는 몇 백에서 많게는 수천까지의 비용이 든다.
그러니 고객들은 언제나 갈등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손님들이 전화를 걸어 문의하면 유능한 상담사가 잘 붙잡아야 했다.
'그런데 특정 분야를 선점했다면 정확히 무슨 뜻일까.'
민성환이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요즘 웬만한 사업체는 다 홈페이지를 제작합니다. 지방의 작은 공장들도 전부 자기 홈페이지가 있을 정도죠.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히 홈페이지 제작이 빠르게 번지는 분야가 있다더군요."
"그게 어디죠?"
"바로 부동산 사무소입니다. 공인 중개사요."
홈페이지가 있으면 매물 홍보도 잘되고, 사진 관리도 쉬워서 부동산 사이에서 홈페이지를 갖는 게 유행이라고 했다.
그리고 공인 중개사들은 동네마다 몇 개씩 있으니까, 그만큼 수요가 풍부하다고 한다.
"그런데 공인 중개사분들은 수준 높은 디자인보다는 관리하기 쉽고, 사진을 잘 보여주는 단순한 디자인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포트폴리오 구축이 쉽겠군요."
"맞습니다. 그리고 부동산 전문 홈페이지 수요가 많다는 걸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럼 키워드 광고 단가가 저렴하겠군요."
민성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전에 저를 괴롭혔던 그 악덕 사장이, 저렴한 가격에 키워드를 구매해서, 쉬운 사이트들을 꾸준히 판매하며 짭짤하게 재미를 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동산 전문 웹 에이전시로 차츰 유명세도 얻고요."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런 틈새를 찾아내는 것도 나름 능력일 것이다.
민성환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난 영영 모를 뻔했다.
"처음에는 원 디자인이 단순히 쇼핑몰 디자인 에이전시 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한철 씨의 기술력이나, 대표님의 일 하시는 속도를 생각하면 충분히 우리도 부동산 홈페이지에 도전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난 민성환이 일했던 에이전시에 직접 접속해 포트폴리오를 살펴봤다.
'과연 이 정도 수준이라면...'
한철이와 내가 달려들면 한 달이면 훨씬 더 훌륭한 포트폴리오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부동산 사이트들은 수정이 적어서 한 번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면 꾸준히 편하게 수익이 발생할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진은 쇼핑몰 디자인보다 적어도 10배는 더 나가는 것 같았다.
'이건 금광이군.'
"좋은 정보를 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회사가 발전하면 저도 좋으니까요. 그리고 겸사겸사 그 못된 사장 엿도 좀 먹이고."
"일단 키워드 단가들, 그리고 사이트 구축 일정 같은 것들을 따져 봐야 합니다. 하지만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동료 말에 따르면 일도 바쁘고, 매출도 상당하다고 합니다. 원 디자인이 달려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겁니다."
동감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한철이에게 부동산 전문 사이트를 보여주었다.
"허어, 진짜 세상은 넓구나. 이렇게 쉽게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다니."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저런 틈새를 찾아내고, 키워드도 제대로 관리하려면 나름 경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이트 기술력만으로는 평범한 수준이니까, 한철에게는 쉽게 돈을 버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검색 사이트에 알아본 결과, 광고 단가도 원 디자인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철아, 어떻게 생각해? 가격대별로 몇 개의 상품을 제작해야 하니까 처음엔 꽤 손이 갈 거야."
"하자. 하고 싶어. 시켜주면 열심히 할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투자비용이 큰 것도 아니고, 실패해도 원 디자인의 수익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성공 사례를 눈으로 확인했다.
이것은 모험이라 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마침 방학.
"그래, 방학동안 제대로 한 번 일 해 보자."
* * *
유나는 며칠 동안 제주도에 다녀오기로 했다.
"나는 빨리 일 배워서 아르바이트하고 싶은데."
불평했지만 소용없었다.
유나는 멀리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올라온 스무 살짜리 어린 딸.
'내가 부모라도..."
방학이 시작되면 얼른 내려와 얼굴 비추라고 재촉할 것 같았다.
"며칠만 내려갔다가 금방 돌아올 거야."
"아니야. 제주도 간 김에 푹 쉬고 올라와."
"빨리 일해서 돈 갚아야지."
그런데 그 돈은 가능한 늦게 받고 싶었다.
급한 돈도 아니었고, 유나에게 받을 게 있다는 사실이 든든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 제주도에 가기 전에 동대문에 같이 가자."
"그..그래."
늘 붙어 다니다, 적어도 며칠은 못 볼 테니까 나도 아쉬웠다.
그래서 각오를 다졌다.
'옷가게 산책...'
"안심해.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뛰어다니지 않을 테니까. 구경만 할 거야."
알긴 아는 구나.
자신의 만행을.
이번에도 밤늦게 버스로 가서 아침에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구경만 하겠다는 선언과는 달리 유나는 검정색 사입 가방은 챙겨왔다.
"혹시 모르니까."
그렇게 우린 동대문에 도착했다.
* * *
밤의 동대문은 정말 놀이공원 같았다.
길에는 음료부터 온갖 간식을 다 팔았고, 도매 건물들은 화려하게 조명을 비췄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젊은 사람들이 어깨에 커다란 옷가방을 메고 바쁘게 뛰어다녔다.
"토스트 두 개랑, 다방 커피 아이스로 두 잔이요."
일단 가볍게 간식을 흡수하고, 우린 탐험을 시작했다.
남자들이 공간 지각 능력이 뛰어나다는 통계는 전부 거짓이다.
적어도 동대문 한정으론 확실히 거짓이었다.
유나는 육지에서 고향을 찾아 탈출한 진돗개처럼 한참 전에 왔던 가게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옷이 날개라는 말,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었어.'
유나는 뛰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날아다녀서 문제였을 뿐.
이번에는 딱히 옷을 살 생각이 없어서 굳이 소매상인척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옷가게에 관심이 많다는 유나는 정말 직장을 구하듯, 꼼꼼히 옷을 살피고 궁금한 것들을 질문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먹힌 모양이었다.
"언니, 이 옷이 잘 나와서 큐니걸스에서 다 가져갔어."
"지금은 색이 두 가지만 나왔는데 다음 주에 다른 색도 나올 거야."
이번에도 조금의 의심도 없이, 상인들은 유나를 소매상인으로 받아들였다.
'대체 왜지?'
내 머릿속 동대문 도매상인들은 이렇게 허술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매상인들은 모두 두 팔 벌려 유나를 환영했다.
유나 앞에선 상인들은 모두 순한 양이 되는 것 같았다.
"같은 옷을 보고 만든 것 같은데, 작은 차이에도 옷이 달라지네. 도매시장에서도 사장님들마다 실력 차이가 큰 것 같아."
내 눈에는 다 같은 옷인데, 유나는 깨달음을 얻은 듯 중얼거렸다.
여성복, 남성복만 있는 게 아니라, 속옷 가게, 신발 상가, 악세사리 등등.
우리는 동대문을 구석구석 탐험했다.
"오늘도 많이 힘들어?"
"아니, 견딜만해."
힘든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보람이 있었다.
아끼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정신적 만족감?
그리고 유나가 동대문을 이렇게 좋아하니까, 혼자 보내거나 다른 사람과 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힘든 게 나았다.
그래도 두 번째 방문이라 나도 조금 여유가 생겼다.
한 건물의 지하에는 한 층 전체가 악세사리 상가였다.
쇼핑몰 사이트를 여러 번 리뉴얼해 봤기 때문에 나는 동대문 악세사리들의 가격을 대강 알고 있었다.
'밖에서 오천원, 만원에 팔리는 것들이 여기선 전부 이,삼천원이야.'
유나에게 신세진 것도 많으니까 작은 선물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유나가 다른 가게를 둘러보는 사이 재빨리, 작은 바구니에 손에 잡히는 대로 악세사리들을 담았다.
'내가 고르면 안 돼.'
안목이 없는 내가 직접 고른다면 예쁜 것들을 전부 피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랜덤으로 담는다면?'
한 바구니를 담으면 확률적으로 그 중 서너 개는 괜찮은 녀석이 걸리는 것이다.
'내가 수학 정석을 3번 독파한 사람이야.'
나는 연기에 서툴다.
하지만 여러 개를 샀더니 의심하지 않고 도매가로 내주었다.
'혼자서 도매가 구매에 성공했어.'
성장한 기분이었다.
* * *
우린 백반집에 들어가 닭볶음탕을 주문했다.
유나가 즐거워 보여 무척 다행이었다.
"옷 안 사서 아쉽지 않아?"
"괜찮아. 오늘만 올 것도 아니고."
그렇군.
다음에 또 와야 하는 군.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귀로 확인하니 두려웠다.
"아, 맞다. 이거."
나는 악세사리들이 담긴 폴리백 봉투를 유나에게 건넸다.
오늘 제주도로 내려갈 예정이라 따로 포장할 시간도 없었다.
그래도 선물이라고 내민 건데, 도매상 영수증까지 같이 들어 있어서 좀 미안하긴 했다.
전부 귀걸이 일곱 개, 반지 네 개였다.
다행히 유나는 봉투를 받아들고 활짝 웃었다.
"내가 이런 거 못 고르잖아. 열한 개니까, 마음에 드는 것만 갖고 나머지는 여동생 줘."
닭볶음탕을 기다리며 유나는 식탁 위에 악세사리들을 하나하나 전부 꺼냈다.
"전부 예쁜데?"
전부?
그럴 리가.
그게 확률적으로 가능한가?
'내가 수학의 정석을 3번이나...'
내가 나를 안다.
내가 산 악세사리가 다 예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거짓말이라도 내가 고른 선물을 예쁘다고 말하며, 정말 기뻐해주는 사람.
"내가 다 가져야겠다."
"진짜?"
"응. 그리고 걔가 얼마나 까탈스러운데."
유나가 좋아해줘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또 할 말이 있어."
"뭔데?"
"곧 기숙사에서 나올 생각이야. 사무실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리고 매일 밤늦게 일하는 나의 특성상 기숙사는 많이 불편했다.
"오피스텔을 알아보고 있는데, 네 자취방 근처에 괜찮은 곳이 있어서. 나 거기로 가도 될까?"
유나는 또 한 번 웃었다.
"그걸 왜 나한테 허락 받아. 나야 더 좋지. 내 방에서 가까우면 놀러가기도 편하고."
유나가 허락해줘서 다행이었다.
지난 생의 습관이 아직 남은 것인지,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게 조심스러웠다.
"응. 내가 네 방에 놀러가기도 편하고."
"그건 아니지."
어쨌든 두 번째 동대문 탐험도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