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이사 □
유나가 제주도로 떠나고, 나는 곧 이사했다.
학교 후문의 널찍한 오피스텔 7층.
큰 가방 두 개, 컴퓨터 한 대가 짐의 전부라서 이사도 간단했다.
너무 간단해서 아쉬울 지경이었다.
한 학기를 보낸 기숙사 방과 작별이라 조금 쓸쓸하기도 했다.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때로 물건이나 장소에 쉽게 정들곤 했다.
하지만 한철이나 형원 선배와 자주 만날 예정이라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 오늘 이사 마쳤어. 내 오피스텔 진짜 넓다.]
유나와는 거의 매일 문자로 연락하고 있었다.
별것 아닌 월세 오피스텔이지만, 최근 나의 가장 큰 성취 중 하나였다.
그래서 유나에게 자랑했다.
자랑이라기보다는 칭찬 받고 싶은 어리광인지도 몰랐다.
[ 오올, 대단하군. 원래 내일 서울 가려고 했는데 또 붙잡혔어. 집에서 놔 주지 않아. ㅠㅜ ]
[ 천천히 쉬다 와.]
[ 대신 엄마한테 나물 반찬 만드는 법 배우고 있어. 서울 가면 만들어줄게. 마른 고사리도 잔뜩 가져갈게. ]
[ 기대할게. 열심히 배워 와. ]
[ ٩(๑`^´๑)۶ ]
좋아하는 고사리나물을 실컷 먹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유나가 멀리서도 날 챙겨주는 사실이 열배 쯤 더 기뻤다.
"왜 혼자 웃고 계세요?"
승희 씨였다.
오피스텔 이삿날에 맞춰 승희씨와 미팅을 잡은 것이었다.
"엄청 넓네요. 그만큼 대표님 계획이 큰 거겠죠?"
"성환 씨가 소개해준 부동산 아이템도 코딩 들어갔습니다."
"들었어요. 제가 봐도 괜찮은 건수 같아요. 하지만 키워드 관리하려면 꽤 바쁠 거예요. 상담원도 따로 필요할 테고."
그것 말고도 영화사 홈페이지 일도 있었다.
"실은 영화사 마당에서 사무실로 방문해 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어쩌면 새 일을 또 맡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승희 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다른 게 아니라, 사무실로 출근 근무가 가능한지 여쭙고 싶어서요. 당장은 아니고, 9월부터. 주 5일이 힘들면 주 4일도 괜찮습니다."
회사가 점점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언제까지 재택근무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내가 학생이라, 방학이 끝나면 주간에 사무실에서 중심을 잡아줄 책임자가 필요했다.
승희 씨가 가장 적합하긴 했는데, 그녀의 의사도 중요했다.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어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방법을 강구해 볼게요. 방법이라 해 봤자 시어머니 찬스 아니면 친정어머니 찬스겠지만."
다행이었다.
그리고 승희 씨는 재택근무만으로 묵혀두긴 아까운 사람이었다.
"사실 아이를 기르다보니 다시 복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점점 멀어졌어요. 재택근무 일자리를 찾은 건, 아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내가 자신이 없어서였을 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렇게 빨리, 또 내가 원하는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몰랐어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웠다.
"아직 승희 씨 실력에 비하면 작은 회사인걸요."
"우리가 키워야죠."
든든했다.
* * *
다음 날.
영화사 마당의 강남 사무실.
김제우 감독의 사장실에는 처음 보는 30대의 젊은 남자가 미리 와 있었다.
"어서 와요. 이 대표. 이번 영화 홈페이지 아주 고생했어. 만나는 감독이랑 제작자마다 홈페이지 칭찬이 자자해. 벌써 몇 명이나 나한테 이 대표 번호를 받아갔어."
김제우는 이제 내게 반말과 높임말을 섞어서 사용했다.
'소개만 많이 해준다면야.'
얼마든지 반말을 써도 괜찮았다.
어쩌면 조만간 추가 수주를 기대해도 될지 모르겠다.
"감사합니다. 감독님이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주신 덕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보자고 한 건 이 분 때문이야. 인사해요. 이쪽은 안영우 실장. 이쪽은 내가 말한 이주원 대표. 한국대 학생이지. 어리다고 만만하게 생각하면 큰 코 다친다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안영우는 내게 명함을 건넸다.
[ 안과 밖 건축사무소 실장 ]
"저희 아버지 성과, 공동 창업자이신 이사님의 성을 합쳐서 안과 박, 안과 밖이라고 회사 이름을 지었습니다."
안과 밖이라.
건축사무소 이름으로 꽤 잘 어울리기도 했다.
김제우 감독이 소개를 덧붙였다.
"전에 말한 적 있었나? 우리 회사가 파주에 신사옥을 지으려 한다고. 그래서 요즘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설계 사무소에 의뢰를 했는데, 거기가 바로 안과 밖이야. 그런데 마침 안과 밖이 홈페이지를 리뉴얼 준비 중이라고 해서 내가 자네를 추천했네."
"아직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진 않습니다."
안영우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직'이라는 말을 강조한 것으로 봐서 욕심은 있는 모양이었다.
"이 쪽 업계도 요즘 경쟁이 치열해져서..."
안영우는 그렇게 말하며 두툼한 파일 한 권을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열어서 화면을 내게 돌렸다.
"이 파일은 저희 회사가 그동안 작업해 온 포트폴리오입니다."
파일을 들추자 여러 건물들의 사진들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건물들은 다 근사했고, 또 비싸보였다.
무엇보다 수가 꽤 많았다.
'잘 나가는 사무소라는 말이 과장은 아니었군.'
그리고 안영우는 노트북을 가리켰다.
"이 사이트는 저희의 경쟁 사무소가 최근에 오픈한 홈페이지입니다. 플래시를 이용해 마치 건물 안에서 360도 주위를 돌아보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난 홈페이지를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꽤 잘 만든 홈페이지였다.
플래시를 너무 남발하긴 했지만, 이 시기에는 아직 플래시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다.
확실히 아끼지 않고 돈을 쏟아 부은 표시가 났다.
"어떻게 보십니까?"
안영우는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이건 테스트로군.'
그런데 내가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이렇게 공교롭다니.'
최근 나는 부동산 전문 에이전시를 만드느라, 전국의 부동산 사이트들은 전부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시적으로 건물을 웹 사이트에 담아내는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일이 잘 풀리려면 이렇게도 풀리는군.'
나는 미소를 감추며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일단 경쟁사의 홈페이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난 노트북 화면을 김제우와 안영우 쪽으로 돌렸다.
"일단 이 플래시 효과. 말씀하신 대로 실내에 들어와 직접 주위를 둘러보는 느낌을 줍니다. 아마 아파트 모델하우스나, 자동차 대리점에서 이렇게 했다면 잘 먹혔겠죠.
하지만 일류 건축 사무소에서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요? 건축주들의 연령과 취향을 고려할 때, 훨씬 정적이고 고급스러운 접근이 나을 것 같습니다. 잘 찍은 사진이라면 플래시 효과 없이도 건물 내부의 느낌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홈페이지의 디자인.
글자가 너무 많습니다. 플래시 특수 효과가 너무 많은 것과 같은 맥락이죠. 마치 물건을 파는 상인 같습니다. 예술가는 이렇게 많은 말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일부러 '예술가'라는 단어를 사용해 안영우가 가지고 있을 자부심을 공략했다.
과연 안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힌 모양이었다.
"또 하나, 홈페이지에 쓰인 사진들이 문제입니다. 아마 건물을 전문적으로 촬영하는 분들이 찍었을 겁니다. 더 넓어 보이고, 더 높아 보이고, 더 근사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게 문제입니다. 이런 눈속임은 동네 부동산에서나 쓰는 수법입니다. 안과 밖의 건축주라면, 훨씬 진솔하고 단순한 사진을 선호할 것입니다."
난 경쟁사의 홈페이지를 날세워 비난했다.
안영우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는 안과 밖의 포트폴리오 파일을 가리켰다.
"이 안의 사진들은 전부 훌륭합니다. 건물들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마 매번 건물들이 완성될 때마다 따로 촬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완성도 있는 홈페이지를 위해서라면, 건물들의 색감이나 사진의 컨셉도 어느 정도 통일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파일의 일부는 홈페이지에 그대로 쓸 수 있겠지만, 경우에 따라 재촬영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내 설명을 들은 안영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경쟁사의 홈페이지를 보면서 뭔가 별로였는데, 그게 뭔지를 몰랐거든요. 설명을 들으니 알 것 같습니다."
"그것 보게. 내가 뭐라고 했나. 어리지만 대단한 친구라고 했지?"
내 똑부러진 분석에 김제우가 더 신난 것 같았다.
안영우는 흡족한 듯 내게 다시 제안했다.
"지금 말씀하신 내용을 토대로 간단한 브리핑을 준비해주실 수 있을까요? 브리핑의 형식은 상관없습니다. 아버지와 이사님이 나이 드신 분이라 직접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결정을 내리지 않으시거든요. 저희 사무실에 방문하셔서 아버지를 만나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개는 김제우가 해줬지만, 일은 내가 따내야 했다.
'어쩌면 이번 건은 역대 최고 금액일지 몰라.'
물론 자신 있었다.
그리고 꼭 해내야 했다.
나는 최고의 팀을 가지고 있었고, 최고의 웹 사이트를 만들 수 있었다.
* * *
오피스텔은 월세라서 보증금이 크지 않았다.
보증금을 지불하고 내 남은 잔고는 대략 천만 원.
곧 영화사 마당의 잔금과 크리스털 시네마의 영화사 홈페이지 착수금까지 받게 되면 잔고는 이천만원에 육박할 것이다.
'어차피 직원들 월급은 쇼핑몰 디자인 판매로 충당이 가능하니까.'
거기에 안과 밖 건축사무소의 홈페이지까지 수주하게 되면, 당분간 자금 걱정은 멀리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꼭 따내야 해.'
지금이야 말로 노력 코인을 아낌없이 쏟아 부울 때였다.
특히 [밝은 눈].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관련 홈페이지를 뒤지며 자료와 요령을 수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드디어 유나가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같이 있어봤자, 티격태격 장난치고 잡담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유나를 많이 기다렸던 것 같다.
유나가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리고 어서 새로 구한 오피스텔을 보여주고 싶었다.
딸깍.
문이 열리고 유나가 들어왔다.
"내가 왔다."
그리고 유나는 내 허락도 없이 오피스텔을 마음대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조금 불쾌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이상한 건지, 유나가 그러는 건 전혀 싫지 않았다.
유나가 마치 자기 권리인 양 오피스텔을 마음껏 둘러보는 게 오히려 흐뭇하게 여겨졌다.
"이주원."
"응?"
"그런데 살림살이가 이게 다야? 여기서 자는 거야?"
유나는 오피스텔 구석방에 놓인 소파베드를 가리켰다.
거기엔 베개도 없이 얇은 담요 한 장만 놓여 있었다.
그건 당연히 내 잠자리.
돈을 낭비할 생각도 없었지만, 일에 매진하겠다는 나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편해."
"감기 걸려, 바보야."
"아직 더워서 괜찮아."
유나는 냉장고도 마음대로 열어봤다.
캔커피와 탄산음료, 생수병 몇 개가 전부였다.
유나는 나를 야단치듯 추궁했다.
"김치도 없어? 라면 냄비 하나랑 젓가락 한 쌍이 다야? 밥은 어떻게 먹어?"
주로 배달음식이나 김밥.
그러다 가끔은 라면.
"바보야. 건강도 챙기면서 일해야지. 야채랑 달걀도 많이 먹고! 이게 뭐야."
내가 확실히 이상한 것 같았다.
겨우 며칠 못 봤을 뿐인데, 잔소리도 듣기 좋았다.
"안되겠다. 일단 나랑 주방 용품 쇼핑부터 하자."
그건 싫었다.
요리하는 것은 좋아했지만, 한 번 살림살이들을 모으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지 말고 밥은 네 자취방 가서 먹으면..."
"됐거든!"
단번에 거절당했지만, 계속 도전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