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행운 □
밤늦게 잠들었지만,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일이나 공부가 아니라, 요리를 위해 [압축잠]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유나의 해물탕이 뛰어났기 때문에 나도 방심할 수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요리를 시작했다.
일단 참기름에 북어 채를 볶다가 육수와 두부와 무를 넣고 푹 끓였다.
소금과 국간장 살짝, 적당히 간도 맞추고.
사람이 많으니까 달걀과 파는 듬뿍 넣었다.
이렇게 뚝딱 북엇국 완성.
간단히 끓인 국이지만 대학생 엠티 아침에 이런 완성도 높은 북엇국은 만나기 힘들 것이다.
친구 중에 회귀자가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
반대로 생각한다면 뜻밖의 자리에서 갑자기 퀄리티 높은 요리가 나온다면 요리사의 정체를 의심해 봐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요리 카레.
카레를 시작할 때 즈음 유나가 잠에서 깼다.
유나와 나 빼고는 전부 새벽까지 술판을 벌였으니 아직 모두 꿈나라였다.
"뭐 해? 벌써 아침 짓는 거야?"
"응. 좀 더 자."
"아니. 사람들 밀리기 전에 씻을래. 금방 나와서 도와줄게."
그렇게 유나는 씻으러 갔다.
다시 나의 카레.
내 카레의 특징은 버터와 우유를 쓰는 것이다.
오늘의 주 고객은 20대 여대생들이니까, 특별히 닭다리 살로 준비했다.
냄비에 버터를 두르고 닭다리 살을 바싹하게 구워준다.
이때 양파도 같이 듬뿍 넣어주고.
충분히 익힌 후에 감자와 당근, 완두콩 등등 야채를 넣고 물 약간과 우유 한 컵을 부어준다.
우유의 양은 카레의 색을 보고 조절.
이렇게 하면 회귀자식 우유 치킨 카레가 완성된다.
부드럽고 풍부한 맛이 특징이었다.
어느새 유나가 옆에 다가와 밀린 그릇들을 설거지했다.
그런데 머릿결이 아직 젖어 있었다.
"사람들 깰까 봐 드라이를 못 했어."
그렇군.
이른 아침 샤워를 마치고, 비누 냄새를 풍기며 촉촉한 머릿결로 내 곁에 다가와 설거지를 하는 스무 살 유나.
'설마 내가 요리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 작전은 성공이었다.
꽤 타격을 입었다.
아무튼.
나는 완성된 카레를 작은 그릇에 담아 유나에게 내밀었다.
유나는 따뜻한 카레를 맛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다."
유나는 작은 그릇의 카레를 싹싹 긁어 먹었다.
"맛있으면 종종 자취방에 가서 만들어줄게."
"됐거든."
역시 요리 두 개로 진정한 승복을 받아내기엔 무리인 것 같았다.
앞으로 종종 요리 승부를 겨뤄야 할 것 같았다.
착한 유나는 사람들 깰까 봐 조심스러웠지만, 난 아니었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나는 냄비를 숟가락으로 두들기며 모두 잠에서 깨웠다.
특별히 과음한 사람은 없었지만, 북엇국은 인기였다.
모두들 북엇국을 들이키고는 카레라이스도 한 그릇씩 받아들었다.
한 덩치 하는 한철이는 커다란 양푼에 밥과 카레를 붓고 허겁지겁 퍼먹었다.
"어쩜, 너는 먹는 모습도 정말 남자답다."
조소과 누나 최지은이 오늘도 한철이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렇게 팀 수진의 모두 행복한 엠티도 잘 마무리되었다.
오늘부터 진짜 방학이었다.
* * *
엠티에서 돌아왔다.
이제 신나게 일에 매달릴 차례.
[ 잡생각 제거 ], [바닷가 산책], [전신 스트레칭]
나는 일에 최적화된 인간.
거침없이 나서서 밀린 일들을 해치웠다.
하루 쉬었다고 일하는 게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졌다.
내 일의 속도에 민성환과 이소영이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세요. 짐작은 했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습니다."
"대표님에 대한 믿음이 막 자라나요."
나는 민성환이나 승희씨가 1~2일은 걸릴 일을 하루에 몇 건씩 처리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크리스털 시네마의 안수정 대표를 찾아갔다.
안수정 대표는 내게 처음 영화 홈페이지 일을 제시한 사람.
처음에는 원 디자인의 싼 가격에 혹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서로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 있었다.
"요즘 바쁘시죠?"
나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원래 메이저 배급사의 흥행 작품이 아니라면 개봉 후에는 점점 상영관이 줄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안수정이 수입한 영화는 반대였다.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한 이후, 심야 라디오와 영화 평론 블로그에 잇달아 제목이 거론되었다.
[ 영국에서 만들어진 한국인 취향 저격 영화 ]
[ 상업 영화의 홍수 속에 찾아온 따뜻한 성장 영화, 재미와 감동 둘 다 붙잡아. ]
연이은 호평 속에 상영관과 예매율이 오히려 늘고 있었다.
"진짜 꿈꾸는 것 같아요. 내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앞으로도 계속 이래야죠."
우린 약속대로 크리스털 시네마의 홈페이지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이소영이 짠 시안 몇 개를 안수정 대표에게 건넸다.
"아직 신생 수입사니까, 과도하게 회사를 홍보하는 것보다는 친구 블로그에 놀러 온 것처럼 아기자기한 컨셉으로 만들어봤습니다.
영화에 대해 친구와 수다 떠는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안수정은 꼼꼼히 시안들을 살펴봤다.
그리고는 호들갑스럽게 좋아했다.
"어떡하죠. 다 마음에 들어요."
"천천히 살펴보시면 됩니다. 대표님 의견도 자유롭게 주시면 되고요. 고객과 많이 이야기를 나눌수록 더 좋은 홈페이지가 나오거든요."
작은 홈페이지 전략은 고객과 회사의 거리를 좁혀준다.
그리고.
'회사가 성장하면 홈페이지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생기지.'
그때 또 일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원 디자인에게도 2배로 수익을 남기는 전략이었다.
그러다 안수정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아, 맞다. 대표님. 여기 오신 김에 이것 좀 봐주세요."
"네?"
"저희 회사 차기작이요. 이번 성공으로 탄력받았을 때, 한 번 더 터뜨려야 하잖아요. 그래서 요즘 차기작으로 고민이 많아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신생 수입사인 크리스털 시네마에게는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일 것이다.
나는 안수정이 내미는 영화의 리스트를 찬찬히 살펴봤다.
리스트에는 안수정이 수입하려는 몇몇 영화의 요약과 소개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영화에 대해 뭘 알아야지.'
나는 영화에 관해서는 일반인이었다.
내가 아는 영화라고는 크게 히트한 블록버스터, 아니면 큰 상을 수상한 영화 정도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큰 영화들은 크리스털 시네마 같은 작은 수입사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번 대박은 그만큼 아주 특이한 경우였고.
"죄송합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저는 이런 영화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요."
안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네요. 대표님은 감이 좋은 분이니까, 혹시 싶어 여쭤봤는데. 대박이 마냥 좋은 건 아니더라고요. 차기작 압박이 장난이 아니에요."
크리스털 시네마는 자금력도, 영업력도 아직은 한계가 있으니까 한 번에 한 편씩, 신중하게 수입해야 했다.
응?
그런데 안수정의 서류 뭉치에서 익숙한 제목이 보였다.
나는 서류 뭉치에서 그 제목이 적힌 파일을 집어 세세히 읽었다.
확실히 내가 아는 그 영화가 맞았다.
"이 영화는 뭐죠?"
"아, 동생이 미국 마켓에서 발견한 영화라고 팩스로 보냈더라고요. 내용도 특이한데 가격이 굉장히 싸다고. 그래도 이 영화는..."
내가 발견한 제목은 공포영화였다.
내가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알고 있었다.
100만 달러를 조금 넘는 예산으로 제작되어 미국에서만 1억 달러가 넘는 초 흥행을 거둔 초 대박작.
이후 이 영화는 인기 프랜차이즈가 되어 매년 시리즈로 나오고, 나중엔 다시 1편부터 리부트된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감독은 공포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다, 나중엔 헐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에 입성해, 10억 달러 흥행기록까지 세우게 된다.
그러니 내가 모를 수가 없는 제목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이 영화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흥행을 하리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안수정이 이 영화를 홀대했다면 그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안수정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내용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가격도 쌌어요. 그래도 이 영화는 손 떼려고요."
"왜죠?"
"저희 회사랑은 이미지가 맞지 않는 것 같아서요. 피 튀기는 공포영화거든요. 이번에 작품성 있는 영화를 잘 찾아냈다고 업계에서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이참에 우리 회사 색깔을 그쪽으로 밀어붙이려고요."
안 된다.
안수정은 반드시 이 공포영화를 수입해야 한다.
안수정이 연속으로 두 번 대박을 친다면 내게 정말 강철 같은 동맹이 생기는 것이었다.
"안 대표님. 저는 반대입니다."
"네?"
"안 대표님은 이제 영화 세 편을 수입하셨을 뿐입니다. 그중 겨우 한 편을 성공하셨고요. 그런데 벌써 회사의 컨셉이나 사람들의 칭찬, 그런 것들에 연연하기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은 회사의 안정적인 수익이 더 중요합니다. 대표님이 보기에 수익 가능성이 있었다면, 남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꼭 수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수정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길지 않은 시간.
"그렇군요. 이 대표님 말씀이 옳아요. 몇 달 전까지 회사를 접네, 마네 그래놓고는 벌써 그때를 잊었네요. 역시 이 대표님과 만나기를 잘한 것 같아요. 정신이 번쩍 드네요."
안수정은 내게서 서류를 건네받았다.
"동생한테 연락해서 다시 한번 검토해볼게요. 아직 늦지 않았을 거예요."
"저보고 감이 좋다고 하셨죠?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공포영화를 다뤄보는 것도 회사의 저변을 확대하는 좋은 경험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안수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표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이 영화가 더 끌리네요."
너무 추천하면 이상할 테니 이 정도만 하기로 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나의 일적인 동맹으로 남으려면 이 정도 했으면 알아들어야 한다.
아무튼 이번에도 아는 제목을 발견해서 다행이었다.
어쩌면 안수정은 정말 행운이 따르는 사업가일지도 몰랐다.
* * *
그런데 안수정 못지않게 내게도 행운이 따르고 있었다.
민성환이 만나고 싶다고 연락했다.
우리 회사의 특성상 중요한 경우가 아니면 미팅은 1~2주에 한 번이었다.
그리고 민성환은 대부분 승희씨와 일했다.
그런데 직접 면담을 요청하다니.
우린 학교 앞 카페에서 만났다.
"잘 해주고 계셔서 무척 든든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갑자기 만나자고 하시니까 은근히 걱정되네요."
민성환은 조금 망설였다.
"대표님. 제가 원 디자인 들어오기 전에도 계속 웹 에이전시에서 일한 것 아시죠?"
"네, 이력서를 봤으니까요."
"실은 군대 가기 전에도 반 년 정도 웹 에이전시에서 일했습니다. 근무 기간이 짧아서 따로 적지는 않았습니다만. 게다가 악덕 업체였거든요. 입대 전에는 22살이었는데, 거기 사장이 제가 어리다고 멋대로 부려 먹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그래서 잊고 싶은 경력이라..."
"그렇군요."
옛일을 떠올리자 화라도 나는지 민성환이 주먹을 꾹 쥐었다.
소형 웹 에이전시가 난립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어린 프로그래머나 디자이너도 많았고, 그들을 함부로 대하는 악덕 사장도 많았다.
사실 한철이는 무척 운이 좋은 경우였다.
한철이는 겨우 20살.
한철이야 실력은 확실했지만, 나처럼 양심적인 거래처는 드물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말씀드리는 게 나을지 좀 고민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민성환이 계속 뜸을 들여서 조금 긴장되었다.
"실은 얼마 전 그때 같이 일했던 동료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제가 일했던 그 에이전시가 운 좋게 특정 분야를 선점해서 최근에 꽤 돈을 벌고 있다고 하더군요."
"특정 분야요?"
세상의 웹 사이트는 직업과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하다.
당연한 이야기.
'그런데 그 중에 한 분야를 선점했다고?'
그리고 민성환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