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41화 (41/203)

■ 41. 엠티 □

엠티 당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회사의 일을 처리했다.

하루 6시간 노력을 해야 나의 이능이 유지된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직원들이 모두 열심히 일하는데 혼자 놀러간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그래서 새벽같이 일어나 회사의 일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먼저 영화사 마당의 영화 홈페이지.

1차 완성본이 엄청난 호평 속에 통과했다.

몇 가지 내용 추가만 끝나면 마무리 될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털 시네마의 홈페이지.

이것은 급한 일이 아니어서 나는 소영씨 혼자 시안을 구성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원디자인의 밀린 주문 몇 개를 해결했다.

영화 홈페이지에 박아둔 원디자인 로고가 나름 영향을 끼친 건지, 주문은 계속 늘고 있었다.

'이제 방학 시작했으니 한 번 더 스퍼트를...'

방학 동안 신상 디자인을 계속 업로드하면 원디자인은 나름 쇼핑몰 전문 웹 에이전시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렇게 꼼꼼히 회사 업무를 돌아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후발대.

형원 선배가 운전하는 렌트한 승합차에 타고, 선발대는 먼저 떠났다.

"엠티는 이미 시작된 거야. 내가 고른 음악과 함께라면, 우린 춤추고 노래하며 한껏 업 된 상태에서 펜션에 도착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형원 선배는 엠티 리믹스까지 제작했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다.

후발대는 나와 김태민, 그리고 수진 선배.

수진 선배가 집이 멀어서 김태민이 차로 태워오는 것이었다.

그 김에 나도 조금 더 업무를 보고.

[ 그럼 승희님, 잘 부탁할게요.]

[ 어휴, 진짜. 맘 편하게 놀고 와요. 겨우 1박 2일 엠티가지고. 심지어 24시간 다 채우는 것도 아니면서. ]

[ 미안해서 그러죠.]

[ 뭐가 미안해요. 나중에 회사가 커지면 우리도 야유회 가면 되죠. 하긴 야유회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그 때 봐서요. ]

그렇게 승희씨에게 보고도 하고, 밖으로 나갔다.

곧 김태민이 끌고 온 아버지의 고급 승용차가 도착했다.

차에 타자 수진 선배가 어린 아이처럼 뒷자리에서 얼굴을 배꼼 내밀었다.

수진 선배는 나나 김태민보다 한 살 더 많았다.

하지만 이럴 땐 우리보다 더 어린 느낌이었다.

"차 쓰겠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반대하지 않으셨어?"

차는 민감하니까.

더군다나 이런 고급 승용차라면 더.

그래서 걱정돼서 물어봤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시던데? 더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보셨어."

"진짜?"

김용철 작가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관대한 아버지인 것 같았다.

하긴, 김태민도 꽤 편한 성격이니까.

"강원도에 우리 콘도가 있거든. 겨울 방학 엠티에는 그 콘도를 쓰라고 하셨어. 스키장도 가깝고 재미있을 거야."

"그..그래."

김태민을 데려가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다.

김태민 덕분에 팀 수진의 겨울방학 엠티까지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재밌기도 했다.

젊은 작가들이 재료비를 구하기 위해 하루 몇 탕씩 아르바이트를 뛴 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김용철 작가는 고급 승용차에, 콘도에, 아들은 조기 유학까지 보냈다.

예술 쪽도 세상의 다른 분야만큼 충분히 불공평한 것 같았다.

어쩌면 더 가혹할지도.

아무튼 잠시 복잡한 것은 다 잊고, 하루 동안 놀기 위한 차가 출발했다.

* * *

펜션에 도착하니 형원 선배와 정화 선배가 펜션 아저씨의 도움으로 숯을 준비하고 있었다.

약간 아빠, 엄마 느낌.

준비를 돕고 싶었지만, 형원 선배가 원치 않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요?"

"물가에 가서 고기 잡고 있어."

풀장이 딸린 비싼 펜션은 아니었지만, 근처에 큰 냇가가 있어서 물에서 놀 수 있는 곳이었다.

형원 선배의 세심한 장소 선정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냇가로 갔더니 유나, 한철 등등이 펜션에서 빌린 반두를 들고 물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영 자세가 어설펐다.

'이런 아마추어들.'

또 한 번, 회귀자의 실력을 보여줄 차례가 온 것이었다.

나는 반바지의 단을 걷고, 슬리퍼를 신고 물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반두를 받아들고, 물풀 아래를 휘저었다.

잠시 후.

"읏차."

내가 반두를 들어 올리자, 손가락만한 물고기들이 그물 위에서 펄떡거렸다.

"우와!"

인간에겐 아직 수렵 본능이 남아있는 건지.

아니면 어린 대학생들이라 단순한 건지.

물고기를 보자 유나 등등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지시에 따라 물풀 아래를 발로 휘저으며 물고기를 몰아왔다.

"끼약!"

그러다 미끄러운 돌을 밟고 물에 넘어지는 건 덤.

조소과 선배들도, 유나도 연거푸 물에 빠져 흠뻑 젖었다.

뒤늦게 물에 들어온 수진 선배가 제일 많이 빠진 건 미스터리였다.

한철이는 자꾸 일부러 물에 넘어져, 티셔츠가 달라붙은 자기 몸을 자랑하는 것 같았다.

잡은 물고기를 양동이에 담고 우린 모두 아이들처럼 신났다.

"왜 물고기가 안 잡히지?"

유나는 펜션에서 통발을 빌려서 물에 던져뒀는데, 건져 보니 물방개만 들어있었다.

"미끼를 넣었어야지. 그리고 그늘에 던져야 해."

나는 유나의 통발을 받아서, 안에 된장을 한 숟가락 넣은 후 다시 통발을 던졌다.

그렇게 한참을 놀았더니, 펜션 안에서 정화 선배가 소리쳤다.

"얘들아, 밥 먹자!"

난 반두를 접고, 유나는 양동이에 담긴 물고기들을 풀어줬다.

"밥 먹으러 가자."

"그래."

* * *

숯이 고기를 굽기 좋도록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숯을 제대로 준비하기가 의외로 어려운데, 형원 선배가 꽤 고생한 것 같았다.

"형, 고기는 제가 구울 게요. 형도 편하게 드세요."

"그래, 고기는 너한테 맡길게."

하지만 형원 선배는 편하게 음식을 먹지 않았다.

맥주와 소주를 가져와 요란하게 퍼포먼스를 하며 열심히 분위기를 띄웠다.

'이상하게 부지런한 사람.'

하긴 부지런하니까, 한국대도 오고, 어린 나이에 신춘문예도 따냈을 것이다.

나는 손질된 버섯과 파프리카, 파인애플도 같이 불 위에 올리고, 마트에서 사온 돼지 목살도 석쇠 위에 올렸다.

그런데 못 보던 고기가 있었다.

'우린 분명 가성비 목살 위주로 골랐는데?'

김태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말했다.

"아, 친구들이랑 놀러간다니까 아버지가 가져가라고 하셔서..."

아이스박스 안에는 화려한 마블링의 빨간 소고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어이, 이런 건 더 당당하게 말해도 된다고.'

김태민이 괜찮은 녀석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알고 봤더니 김태민은 사랑이었다.

소고기를 들어 올리자, 모두들 김태민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내가 고기들을 큼지막하게 잘 구워내면 정화 선배가 옆에서 잘게 썰었다.

그리고 친구들의 쟁반에 올려주면 지렁이를 받아먹는 아기 참새들처럼 모두 짹짹거리며 고기를 삼켰다.

난 원래 회식 자리에서, 고기 굽는 역할을 싫어했다.

'고생만 하는 자리같아서..'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입을 오물거리는 친구들을 보면 연기를 들이키는 것으로도 배가 불렀다.

"누나도 앉아서 좀 먹어요."

"원래 고기는 서서 썰면서 먹는 게 더 맛있어."

그리고 정화 선배는 내 입에도 두툼한 소고기 한 점을 넣어주었다.

굵은 소금이 씹히는 소고기는 서서 먹든, 앉아서 먹든 맛있을 수밖에 없는 최상품이었다.

유나도 고기를 씹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러더니 어느 새 옆에 해물탕이 한 솥 끓고 있었다.

"캬아.."

얼큰했다.

과연 대단한 솜씨.

라이벌로 인정할만 했다.

한 숟갈 맛 봤더니 진짜 소주 안주였다.

'어떻게 술도 잘 못 먹는 녀석이 이런 해물탕을 끓이지?'

세상에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은 것 같았다.

그렇게 저녁이 될 때까지, 느긋하게 술과 고기를 먹었다.

여름 늦은 오후의 완벽한 식사였다.

나와 한철, 그리고 형원 선배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셋 다 수고했다.'

지난 2월, 우리가 차가운 기숙사에서 처음 만난 날, 우리가 꿈꾸던 1학기의 마무리, 딱 그대로였다.

* * *

"배불러."

유나가 별로 나오지도 않은 배를 손으로 두드렸다.

주위는 충분히 어두워지고, 숯불도 이제 서서히 꺼져갔다.

우린 일어나서 먹은 자리를 치웠다.

"자, 배도 꺼뜨릴 겸 좀 걷자."

형원 선배가 바람을 잡았다.

[ 펜션 근처에 포도밭이랑, 폐농가가 있는데 분위기가 제법 으스스하대. ]

형원 선배의 철저한 사전조사.

그래서 우리 셋은 이미 합을 맞췄다.

"그래요. 좀 걸어야 겠어요. 공기도 좋고. 배도 꺼져야 또 술 마시죠. 밤도 긴데."

형원 선배의 사인을 받은 한철이 미리 준비한 대사를 읊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르르 몰려 밭길을 걸었다.

그때 유나가 내 반팔 소매를 당겼다.

"우리는 통발 건지러 가야해."

아, 맞다.

잊고 있었다.

지금 쯤 고기가 꽤 잡혔을 지도 모른다.

펜션의 통발이니까 잘 건져서 돌려줘야 했다.

유나와 나는 일행에서 떨어져 물가로 갔다.

밖에 묶어둔 빨간 나일론 끈을 당기자, 물 안에서 통발이 끌려 나왔다.

"와, 이번엔 많다."

된장 한 스푼의 위력으로 통발 안에는 엄지만한 물고기들이 제법 담겨 있었다.

나는 통발을 흔들어 물고기들을 모두 놔주고 통발을 묶었다.

"우린 형원 오빠 따라서 산 쪽으로 가지 말고, 냇가로 걷자. 낮에 일찍 와서 보니까 여기가 예뻤거든. 너한테도 보여주고 싶었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조용한 물소리도 듣기 좋았고, 내게 보여주고 싶다던 풍경도 궁금했다.

유나와 나는 달그락 거리는 돌멩이들을 밟으며 냇가를 산책했다.

"해물탕 맛있었어."

"당연하지."

그리고 이런저런 잡담들.

그러다 유나는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이번 학기 고마웠어. 덕분에 재밌게 보낸 것 같아."

늘 당당한 유나였지만, 말해 놓고 꽤 어색해 했다.

"나도."

생각해보면 내가 더 신세를 많이 진 것 같았다.

카페 알바부터, 과제들, 어머니 옷이랑 또 여러 가지들.

이번 학기는 유나 없이는 성립하지 않았다.

"여름 방학이랑 2학기도 잘 부탁해."

"나도."

"이제 돌아가자."

"그래."

좀 더 걸을 수 있었지만, 펜션으로 방향을 바꿨다.

한철이 말대로 밤은 기니까.

* * *

벌써 돌아온 형원 선배가 방에 프로젝터를 설치하고 있었다.

[ 펜션을 어둡게 하고, 벽 한 쪽에 화면을 띄우고 달달한 로맨스 영화를 보는 거야. 꽤 괜찮은 여름밤이 될 거야. ]

형원 선배의 원대한 계획.

그러고 보니 회귀한 이후 영화 한 편 느긋하게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대찬성.

하지만 조소과 선배들은 반대였다.

"오빠, 영화는 무슨 영화예요. 술이나 마셔요. 술도 안주도 넘치는구만."

"그..그러자."

그렇게 형원 선배는 프로젝터를 설치하다 말고 옆방으로 건너가 버렸다.

최근 즐겁게 보내긴 했지만, 난 역시 웃고 떠드는 술자리보다는 차라리 영화 쪽이 좋았다.

"난 영화 보고 싶은데, 넌?"

"영화 보자."

유나가 내 옆에 앉고, 김태민과 정화 선배도 방에 남아 영화를 선택했다.

분명 영화는 괜찮았다.

하지만 옆방에서 왁자지껄한 술 게임의 소리가 들리자 결국 김태민은 참지 못하고 건너가 버렸다.

잠시 후 정화 선배도.

"난 누워서 볼래."

유나는 베개를 가져와서 옆으로 누웠다.

아니나 다를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유나는 금방 잠들었다.

하루 종일 놀아서 피곤했는지.

아니면 못 마시는 술에 은근히 취한 건지.

한 학기 동안 고생 많았으니까 잠들만 했다.

난 펜션의 이불장에서 타올 담요를 꺼내 유나에게 덮어줬다.

그리고 볼륨을 낮추고 영화를 봤다.

대사는 잘 안 들렸지만, 어차피 자막이 있으니까 상관없었다.

대신 유나의 숨소리가 잔잔하게 방안에 깔렸다.

형원 선배 말대로 꽤 괜찮은 여름밤이었다.

로맨스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보다 내가 더 운이 좋다고 여긴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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