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33화 (33/203)

■ 33. 밤샘 □

"흑백이면, 생각해볼 게 많아."

형원 선배가 말했다.

"흑백이면 더 할 수 있는 게 많아질 거야. B급 정서도 강조하고, 고전 영화에서 장면도 따올 수 있을 거야."

"그럼 더 좋을 것 같아요. 장난스러움이 많이 희석될지도 모르겠어요."

형원 선배는 흑백에 맞춰 각본을 조금 수정하기로 했다.

"분장을 여러 번 할 수 없으니까, 단번에 촬영을 끝내야 해요. 다행히 미대 건물이 낡았으니까, 학교에서 날 잡아서 밤에 촬영하면 될 것 같아요. 새벽에 수위 아저씨한테만 안 걸리면."

"조소과 언니들은 제가 책임지고 섭외해 볼게요. 각본을 수정하면 언니들 각본까지 뽑아야겠어요."

조별과제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빠르고 합이 잘 맞는 과제는 오랜만이었다.

유나와의 과제는 단 둘이었으니까 솔직히 조별과제라고 부르기에 좀 그랬다.

'이번엔 좀 걱정도 했었는데...'

형원 선배와 한철.

너무 엉뚱한 청강생 군단.

변수가 너무 컸다.

하지만 기우였다.

우린 배역과 역할을 나누고, 학교 건물을 돌아보며 동선도 연구했다.

정화 선배가 말했다.

"저기, 동영상을 찍으면 가산점을 준다고 했잖아요. 한 번 욕심내 봐도 되지 않을까요? 스토리도 탄탄하고, 또 분장까지 하는데 사진만 찍기는 아깝잖아요."

이 스토리를 탄탄하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뭐, 정화 선배가 그렇게 느꼈다면.

나도 동영상 촬영엔 찬성이었다.

"사진은 번갈아가면서 찍어주면 되는데...동영상은...역시 한 명 더 도와줄 사람을 구해야 할까요?"

수진 선배가 조심스레 말했다.

의외로 5명이 부족했다.

동영상을 찍어줄 사람.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당연히 유나.

'요즘 도움 요청을 너무 자주 하나?'

그런데 이번에는 도움이라기보다는 웃긴 경험을 같이 하고 싶었던 게 컸다.

"내가 한 번 구해 볼게요. 동영상 잘 찍을 것 같은 1학년 친구가 있어요."

내가 말하자 수진 선배가 놀리듯 웃었다.

"누구 말하는지 알겠다. 너랑 같이 다니는 그 예쁜 애 말이지?"

"아...네. 일단 부탁은 해 볼게요."

유나가 바쁠 수도 있고, 또 거절당할 수도 있으니까.

"나도 유나 알아. 유나 그림 잘 그리던데, 유나가 해줬으면 좋겠다."

정화 선배도 유나를 아는 모양이었다.

형원 선배와 한철은 뭔가 계를 탄 표정이었다.

미대 여학생들이 자꾸 늘어나는 것만으로 행복한 모양이었다.

유나에다 조소과 누님들까지.

조별과제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 * *

수정된 각본을 받아 든 유나는 한참 웃어댔다.

재미있어 웃는 건지, 황당해서 웃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걸 형원 오빠가 썼다고?"

"그...그래.."

"그 오빠 소설 꼭 읽어보고 싶다. 재미있을 것 같아."

"형한테 말해볼게."

유나가 자기가 쓴 글을 읽고 싶어한다고 말하면, 형원 선배가 정말 좋아할 것 같았다.

나는 약간 두려워서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

판도라의 상자랄까.

"동영상만 찍으면 되는 거야? 할게. 나 꼭 하고 싶어."

유나는 선뜻 돕겠다고 나섰다.

역시 부탁하길 잘 한 것 같았다.

밤 새어서, 팀 수진이랑 유나까지 왁자지껄 웃으면서 촬영하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았다.

"고마워."

"고맙긴. 이걸로 너도 나한테 동대문 하룻밤 빚진 거야."

역시 유나.

조건을 걸 줄 알았다.

동대문 하룻밤...

"그러지 뭐."

조소과 선배들도 쉽게 섭외되었다.

수진 선배가 사람이 착해서 그런지, 도와달라고 말하자 모두 흔쾌히 나섰다.

단발머리의 유쾌한 누님 두 분이었다.

둘 다 각본을 보고는 한참 웃어댔다.

"이건 해야 해! 할게."

"사진의 이해구나. 옛날 생각나네. 재밌겠다!"

* * *

드디어 촬영 당일.

우리는 저녁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필요한 장비도 미리 빌려두고, 필요한 강의실도 미리 출입 허가를 받아두었다.

분장이 필요한 사람은 나와 한철이.

형원 선배와 정화 선배는 메이크업만으로 가능했다.

정화 선배는 직접 화장했고, 형원 선배는 유나와 수진 선배가 담당했다.

그리고 조소과 누님 둘이 나와 한철이 얼굴에 분장용 라텍스를 발랐다.

한철이는 얼굴에 접착제로 이것저것 붙이기도 했다.

"분장용이라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촬영 끝나고 얼굴 깨끗이 씻고, 돼지고기 많이 먹어."

"옙."

"분장 중에는 말하지 말고."

서양화과도 나름 금손인데, 조소과는 거의 마법사 수준이었다.

몇 번 손을 움직이자, 내 얼굴이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그런데 너 진짜 몸 좋다."

조소과라 그런지, 선배 하나가 한철의 몸에 강한 관심을 드러냈다.

"컴공은 공부만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어서..."

"말하지 말라니까."

"읍..."

조별과제가 좋은 점도 있었다.

혼자라면 이런 분장을 하고 밖을 다니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꽤 당당해졌다.

밤이지만 미대 건물에는 학생들이 몇몇 있었다.

다만 역시 미대생이라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 너희 뭐해?"

김태민이었다.

원래 수업도 자주 빠지던 녀석이었는데, 이제 제법 성실해져서 밤늦게 작업실에 남아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조별과제."

"재밌겠다."

김태민은 나와 한철의 황당한 분장을 보고 피식 웃었다.

복도에는 유나와 수진 선배도 있었다.

"유나도 같이 하는 구나. 무슨 과목이야?"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우리를 보는 김태민의 눈빛이 마치 전생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디자인과로 전과를 한 나는 언제나 다른 학생들이 재미있게 어울리는 걸 구경만 했었다.

나는 늘 겉돌았고 그들을 동경했다.

'하지만 말이 안 돼.'

김태민은 성격도 좋고, 과수석이고, 부자고, 잘생겼고, 게다가 김태민과 친해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김태민은 묘하게 과에서 겉도는 것 같았다.

'그냥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걸까.'

김태민과 많이 어울린 적은 없지만, 보면 볼수록 성격도 좋아 보였다.

그림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김태민과 친해지고 싶었다.

"혹시 바빠?"

내가 묻자 김태민은 두 손을 들었다.

"이제 집에 가려고."

"우리 과제에 특별 출연 안 할래? 촬영도 좀 도와주고. 촬영 끝나고 뒤풀이도 할 건데."

"어? 그래도 돼?"

김태민은 선뜻 승낙했다.

그럴 줄 알았다.

형원 형의 각본을 우습게 본 게 아니라, 얼마든 배역을 늘릴 수 있는 구조였다.

내가 김태민을 데려가자 선배들이 의논했다.

"그런데 우리 조가 아닌데 괜찮을까?"

"분장으로 얼굴을 가리면 되지 않을까? 한 명 더 있으면 촬영도 수월할 거야."

"배역 늘리는 건 어렵지 않아."

오지랖을 부린 것 같아 걱정 했지만, 형원 선배를 포함해 모두 내 제안에 동의했다.

무엇보다 같이 하고 싶다는 김태민 본인의 의지가 아주 강해서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자발적으로 도와준다니까.

조소과 선배들에겐 미안해서 내가 직접 부탁했다.

"분장 한 명만 더 해주심 안 될까요?"

"라텍스도 남아서 분장은 괜찮아...다만..."

"다만?"

"저 잘생긴 얼굴을 꼭 분장으로 가려야 해? 그냥 분장 없는 배역으로 하면 안 돼?"

"라텍스로 얼굴을 꽁꽁 싸매주세요."

조소과 선배들은 김태민의 얼굴을 매만지며 아주 느릿느릿 꼼꼼히 분장을 시작했다.

"피부 상하지 않게 랩으로 얼굴을 감싸고 분장할까?"

"그럼 더 상할 것 같아. 태민이라고 했지? 촬영 끝나고 내가 세안제 줄게. 얼굴 꼼꼼히 씻고, 로션 잘 발라. 피부 이상 생기면 곧바로 나한테 전화해. 알겠지?"

조소과 선배들은 이것저것 계속 김태민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한테는 분장 중에 말하지 말라더니...'

조소과 선배들에게는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 * *

그렇게 우린 새벽에 아홉 명이서 낡은 미대 건물을 뛰어다니며 황당한 각본을 촬영했다.

주인공은 수진 선배였는데, 평소 부끄럼타던 성격은 사라지고 카메라 앞에서는 열심히 연기했다.

유나는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제시하고 그것을 캠코더에도 담았다.

조소과 선배들은 분장이 끝나고도, 촬영 현장을 떠나지 않고 우리의 잡일을 도왔다.

[ 의미 없는 과제에 의미 없는 노력을 쏟을 기회 ]

조별과제를 내면서 김진기 교수가 한 말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랬다.

우리 아홉 명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찍었다.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돈 버는 일 외에는 손가락하나 움직이기 싫을만큼 지쳐 있었다.

집에 들어오면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화장실 청소 같은 사소한 일로 아내와 싸우곤 했었다.

어머니에게 전화하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지고, 집에 들어오면 아내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숨을 곳만 찾고 있었다.

'그런 내가 이런 돈도 안 되는 촬영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

자꾸 웃음이 났다.

다시 젊어진 게 좋았다.

돈이 되지 않는 일에 열심히 매달릴 수 있어서 좋았다.

웃기고 황당하고 의미 없는 과제를 돕겠다고 나서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좋았다.

형원 선배와 수진 선배가 나오는 장면을 한철이와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깨가 부딪혀서 서로 마주봤는데, 서로의 분장이 왜 그렇게 웃긴지 마주보고 한참 웃었다.

말하지 않고도 생각이 들여다보이는 친구가 있어서 좋았다.

"웃지 마! 분장 떨어져!"

조소과 선배가 소리쳤다.

* * *

"족발 왔습니다!"

새벽 4시.

밤새 뛰어다닌 우리들은 당연히 배가 고팠다.

배달부가 오자, 분장한 사람들은 모두 숨고, 유나가 나가서 음식을 받아왔다.

과제 중에 먹는 야식은 미대 밤샘의 또 하나의 큰 재미였다.

메뉴는 우리의 피부를 걱정해서 족발과 보쌈으로 정했다.

'물론 조소과 누님들은 주로 태민이 피부만 걱정했겠지만.'

우린 작업실 의자를 붙이고 그 위에 화판을 얹어 임시 식탁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짜 족발과 보쌈을 차리고 소주도 꺼냈다.

학교에서 술 마시는 일은 당연히 금지였다.

하지만 미대 선배들은 이미 시간별 수위 아저씨의 순찰 동선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캬아아..."

술을 잘 못 마시는 수진 선배였지만, 효과음만은 절정 고수였다.

수진 선배가 반달눈을 만들고, 소주가 너무 써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짓자, 나와 형원 선배와 한철과 심지어 김태민까지 일시에 피로가 풀렸다.

'역시 김태민.'

유나의 실루엣이 아름답다고 말할 때 이미 안목이 있음을 눈치 챘었다.

괜히 미대 수석이 아니었다.

볼수록 괜찮은 녀석이었다.

촬영도 순조로왔고, 결과물도 만족스러웠다.

우린 맛있는 보쌈을 먹으며 기분 좋게 취해갔다.

과제가 잘 진행될 때, 친한 조원들과 함께 먹는 소주는 진짜 꿀맛이었다.

유나는 인상을 쓰면서 소주를 여러 번 나눠서 조금씩 계속 홀짝이고 있었다.

"너무 많이 마시지마. 술도 잘 못 마시면서."

"그러니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습해야지."

"그런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다만 내가 그만 마시라고 하면 더 마실 게 뻔했기 때문에 부지런히 안주만 챙겨줬다.

조소과 선배들과 정화 선배, 형원 선배는 주량이 꽤 쎈 모양이었다.

그들은 여유롭게 술과 고기를 즐겼다.

"컴공이라며? 어때? 미대 과제 해보니까?"

조소과 선배가 한철에게 물었다.

한철도 부지런히 마셨는데 그래서 살짝 눈이 풀린 것 같기도 했다.

'하긴 몸이 아무리 좋아도, 이제까지 제대로 마셔볼 기회가 적었을 테니까.'

술 덕분인지 한철이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너무 재미있습니다. 이런 과제가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거든요. 특히 저는 지방 과학고를 다녔는데, 거기선 수능 1점 올리려고 밤새서 공부했거든요. 같은 반 친구끼리 서로 경쟁하고, 신경 쓰고. 진짜 친구가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여긴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한철의 말을 듣자 나도 약간 신기했다.

종종 잊곤 했는데 한철과 형원 선배도 모의고사 1%를 우습게 먹는 최상위 엘리트였을 것이다.

아무튼 한철이 재밌다니 나도 뿌듯했다.

"그런데 한철아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조소과 선배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선배도 살짝 취한 듯 귀여운 표정이었다.

"네 팔 근육이 너무 멋있어서 그런데, 석고로 뜨게 해주면 안 될까? 내가 맛있는 밥 사줄게."

형원 선배가 한철에게 다급히 눈빛을 보냈다.

[밥 말고 술을 사달라고 해!]

아마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철은 그 눈빛을 읽지 못하고 소리쳐 대답했다.

"얼마든지요. 선배 편할 때 연락주세요. 제 몸 전부 가능합니다! 방학 동안 집에 안 내려가고 기숙사 있을 겁니다. 그것 말고도 무거운 거 들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주세요."

드디어 수년간 공을 들인 한철의 근육이 주인에게 은혜를 갚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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