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각본 □
3개의 키워드.
내가 낸 아이디어지만, 나 역시 막상 3개의 단어를 정하려니 조금 어려웠다.
떠오르는 단어와 이미지들이 너무 많았는데 그 중 3개만 골라야 했다.
'간단하게 생각하자.'
그래, 과제이긴 하지만 이것도 예술.
있는 그대로 나를 드러내자.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내가 제일 잘 아는 단어.
가장 솔직하고 절실한 단어.
'나는 우울하게 살다가 죽었고 회귀했지.'
그렇게 나는 3개의 단어를 결정했다.
[우울], [죽음], [부활].
'부활이란 단어가 너무 어렵나?'
뭐, 형원 선배가 알아서 하겠지.
물론 더 쉬운 단어로 바꿀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형원 선배를 살짝 괴롭혀주고 싶었다.
그리고 우린 각자 적은 단어들을 꺼냈다.
먼저 수진 선배.
[학교], [탈출], [잠].
'수진 선배도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기로 결정했구나.'
지금 이 순간 수진 선배의 절실한 열망이 그대로 전해졌다.
다만 다른 사람이 이런 단어들을 적었다면 조금 한심하고 무책임해 보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수진 선배가 이런 단어들을 적으니까 더 순수하고 귀여워 보였다.
다음은 정화 선배.
[섹시], [눈빛], [입술].
'이런. 정화 선배도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기로 결정했구나.'
정화 선배도 꽤 미인이었다.
다만 유나나 수진 선배와는 조금 계열이 달랐다.
유나나 수진 선배는 풋풋한 여학생 느낌.
하지만 정화 선배에게선 성숙한 여인의 향기가 느껴졌다.
평소 점잖은 정화 선배였지만, 이번 과제를 통해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다음은 한철.
'이런. 한철이 너 마저도.'
[힘], [사랑], [희생].
한철은 그 세 단어가 자신을 대표한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약간 애잔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형원 선배는 12개의 단어를 조합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은 키워드를 적지 않기로 했다.
[우울], [죽음], [부활]
[학교], [탈출], [잠]
[섹시], [눈빛], [입술]
이제 공은 형원 선배에게 넘어갔다.
형원 선배는 이 12개의 단어를 조합해 괜찮은 이미지를 건져낼 수 있는 짧은 각본을 완성해야 했다.
"기대할게요. 오빠. 오빠는 팀 수진의 버팀목이에요."
"힘내주세요. 오빠한테 떠넘기는 것 같지만, 누구도 오빠를 대신할 수 없어요."
쉬워보이진 않았지만, 형원 선배가 최선을 다할 것이란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이상한 쪽으로 믿음이 가는 인간이었다.
그렇게 우린 1차 회의를 마쳤다.
* * *
크리스털 시네마의 영화가 개봉했다.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기 때문에 흥행은 순조로웠다.
이미 흑자는 문제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제 수상 소식들이 터지면 영화는 대박이 나지.'
약간 귀찮은 것 빼고는 안수정은 괜찮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성공이 진심으로 기뻤다.
게다가 그녀의 영화사 홈페이지도 내가 만들기로 했으니 나는 마치 예정된 성과급을 기다리는 직장인 같았다.
그렇게 느긋하게 홈페이지 디자인을 구상할 때 즈음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영화사 마당의 대표 김제우입니다."
'영화사 마당?'
전에도 말했듯 나는 영화사 이름까지 전부 외우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제우라는 이름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영화사 대표라고? 아닌데...'
"혹시 김제우 감독님이십니까?"
김제우 감독은 명절마다 조폭 코미디로 꾸준히 대박을 쳤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영화의 제작까지 연이어 성공하며 충무로의 강력한 실세로 부상한다.
그러니 김제우 감독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네, 맞습니다. 제가 김제우 감독입니다. 이 번호는 수정이, 아니 안수정씨한테 건네받았습니다."
원디자인의 전화번호는 개봉한 영화 홈페이지에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전화는 지인 찬스였던 모양이었다.
"이번에 수정이 영화 홈페이지를 아주 인상 깊게 봤습니다. 그래서 일 문제로 의논을 드리고 싶은데 한 번 뵐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돈 냄새가 났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 * *
영화사 마당의 사무실은 강남에 있었다.
직접 만난 김제우는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현장의 보스 같은 느낌이었다.
"으허허, 수정이는 어릴 때부터 제가 가르치던 녀석입니다. 매일 힘들다고 전화하더니 이번 작이 터져서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김제우는 처음부터 영화감독이 아니라, 배급사 마케터 출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철저히 흥행을 노리는 영화만 만들었다.
'그러니까 오히려 성공한 건지도...'
김제우의 영화사는 직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모두 분주히 일하고 있었고 분위기도 활기찼다.
"최근에 파주에 신사옥의 부지를 매입했습니다. 대형 사옥에 직원들을 채우려면 부지런히 벌어야 합니다."
틈새를 노린 자기 자랑까지 빼먹지 않는 전형적인 기업가였다.
그의 사무실 소파에 앉자마자 곧바로 일 이야기를 꺼냈다.
"예상하셨겠지만, 이번에 개봉할 우리 영화의 홈페이지를 맡기고 싶습니다. 작업하신 사이트, 아주 인상적이더군요. 마치 미래의 디자인을 보는 듯했습니다."
오올, 김제우.
예상외로 통찰력이 있었다.
한국과 외국은 홈페이지 디자인이 조금 달랐다.
한국은 게시판 위주로.
플래시도 아끼지 않고 썼고, 고화질 이미지도 짱짱하게 올렸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에는 게시판은 꼭 필요할 때만 썼고, 잡지나 책, 블로그 같은 느낌이 강했다.
외국의 홈페이지 디자인을 그대로 구매해서 사용하면 한국인들에겐 꽤 어색했다.
그래서 한국의 앞서가는 웹 에이전시에서는 외국에서 유행하는 디자인들의 일부 장점만 차용해서 조금씩 한국의 홈페이지에 적용시켰다.
그럼 무척 세련된 느낌을 줄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유행들을 미리 알고 있으니까.
미래의 유행을 안다는 것은 유행을 따라한다기보다는, 생각의 한계를 지운 것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어쨌든 내 디자인은 꽤 특별해 보였을 것이다.
김제우가 자신의 구상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플래시 게임 말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스틸컷을 이용한 슬라이드 퍼즐에 시간 기록을 더해서 상위권 100명에게 경품을 지급하는 겁니다. 한국인들은 경쟁과 상품을 좋아하니까 분명 열광해서 달려들 겁니다."
"오, 좋은 생각 같습니다. 역시 마케터 출신이라 다르시군요. 대단하십니다."
"으허허. 제가 이 바닥에서 아이디어 상자로 불립니다."
김제우는 칭찬을 무척 좋아했다.
그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더 내놓았고, 나는 계속 멋지다고 칭찬했다.
'칭찬할 수밖에...'
어떤 아이디어든 실제로 구현하려면 추가로 돈을 청구할 생각이었다.
나로선 손해 볼 게 없는 칭찬이었다.
"자, 그럼 홈페이지 가격에 대해 의논해봅시다. 수정씨한테 가격에 대해선 들었습니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안수정에게 제시한 200만원은 미래를 내다본 덤핑가였다.
이런 경우를 생각하지 못하고 비밀 엄수 항목을 넣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김제우가 계속 신나서 떠들었다.
"저는 유치한 상업 영화를 찍는다고 사람들한테 욕을 먹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당당하게 씁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저는 절대 예술가들을 상대로 돈을 깎지 않습니다."
200만원에 깎을 게 어디 있다고.
내가 그 가격에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수정이 홈페이지 800만원에 작업하셨다더군요."
"네?"
나는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800이라.
어디서 나온 금액일까?
내게 처음 가져온 안수정의 시안은 400만원짜리였다.
그것의 딱 두 배 금액이었다.
'아마, 그녀의 홈페이지 만족도가 처음 시안의 두 배라서, 그래서 단순히 800이라고 말한 걸까?'
안수정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녀는 천사가 분명했다.
나는 순식간에 상황을 받아들였다.
"네, 맞습니다. 800만원."
김제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우리 영화는 퍼즐도 추가하고, 배우들 인터뷰랑, 메이킹 필름도 추가하고 그러면 볼륨도 늘어나겠죠."
"그 부분은 기술적으로 검토하고, 제가 시안을 다시 짜서 가격을 제안하는 게 맞을 겁니다. 하지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네? 마찬가지라뇨?"
"저 역시 저의 가치를 알아주시는 분을 상대로 가격 흥정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흥정은커녕 이 대박 계약을 어서 빨리 꼭 잡고 싶었다.
"오호, 젊은 분이 호쾌하시군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그냥 딱 잘라서 천만."
"좋습니다. 최선을 다하죠."
그렇게 우린 악수를 하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김제우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젊으신 분이 일을 아주 시원시원하게 하시는 군요. 수정이가 그렇게 칭찬하는 이유가 있었네요. 저희 영화사가 하반기에만 두 편을 더 개봉합니다. 저희보다 큰 영화사는 많지만 저희만큼 꾸준히 영화 찍는 곳은 드물 겁니다. 제대로만 만들어주십시오."
한방에 천만 원이라.
다른 회사엔 크지 않은 돈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의 내게는 피가 끓어오르는 액수였다.
이 돈으로 급성장 중인 원디자인을 탄탄한 반석위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흥분한 기색을 겨우 누르고 김제우의 영화사에서 돌아왔다.
* * *
그리고 팀 수진의 2차 회의가 있었다.
솔직히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나는 형원 선배에게 키워드를 넘기고 한동안 과제에 대해 잊고 있었다.
'뭐, 그만큼 형원 형을 믿는다는 뜻이니까...'
형원 선배는 다섯 부의 프린트를 가져와서 우리 앞에 하나씩 놓았다.
"모두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평소의 당당한 모습과 달리 형원 선배는 약간 자신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조금 초췌한 느낌이었다.
"그럼, 모두들 한 번 읽어 봐."
우리 넷은 형원 선배가 건넨 프린트를 한 장씩 읽어보았다.
길지 않은 각본이었다.
'이럴 수가...'
나는 솔직히 조금 놀랐다.
싼티가 났다.
'그런데 느낌이 있어. 작정하고 유치하니까 오히려 있어 보여.'
뜻밖이었다.
'역시 신춘문예는 진짜 실력으로 땄구나.'
하지만 나는 회귀자.
일반 대학생과는 취향이 다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일단 내 생각을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먼저 한철이.
수능 봐서 들어온 녀석답게 제일 먼저 프린트를 다 읽었다.
그런데 한철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아마 팀 수진 중에 형원 선배를 가장 따르는 사람은 한철이일 것이다.
하지만 한철은 0과 1로 이루어진 세계에 사는 공대생.
형원 선배의 각본을 읽고는 한철은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괜찮은데요? 난 재미있어요."
정화 선배가 말했다.
'역시 미대생. 이 각본의 가치를 알아봤구나.'
나는 수진 선배를 바라봤다.
수진 선배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걱정되긴 하지만 저도 좋아요. 오빠 수고하셨어요."
수진 선배 역시 진지한 모습으로 각본을 칭찬했다.
정화 선배와 수진 선배의 답변을 듣는 순간, 형원 선배에게 드리웠던 걱정과 피곤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신춘문예 등단자 이형원으로 돌아왔다.
'아니, 선배.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벌써 자신감을 찾다니...'
그에게 내 의견은 딱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진 선배가 말했다.
"분장이 필요하겠네요. 같은 미술 학원 다닌 언니가 우리 학교 조소과에 있어요. 분명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 거예요."
과감한 추진력.
역시 수진 선배도 할 때는 하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 회귀자답게 의견을 보탰다.
"흑백이요."
"응?"
"흑백 사진으로 가죠. 흑백 사진으로 가면 예술성도 높일 수 있고, 분장의 미흡한 부분도 가릴 수 있어요."
"좋은데?"
정화 선배가 동의했다.
각본이 나오자 미대 3인방이 재빨리 이미지에 관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형원 선배가 뿌듯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한철이는 아직까지도 이 각본이 정말 괜찮은 것인지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 곧 알게 될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