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팀 수진 □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사진의 이해.
과제명은 이어지는 사진에 내용 담기.
김진기 교수는 리모컨을 쥐고 교탁에서 나와 강의실 중앙에 앉았다.
"원래 다른 사진 과제들은 내가 미리 보고 선별해서 발표했습니다. 학생 수가 너무 많아서 수업 시간에 전부 다룰 수 없어서였죠. 하지만 오늘은 조별과제입니다. 그러니 모두 수업시간에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나도 여러분이 제출한 사진들을 아직 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이 사진들을 보면서 같이 놀라고 같이 즐기고 싶어서 입니다."
강의실이 어두워졌다.
김진기 교수는 노트북을 켜고, 리모컨을 눌렀다.
"불안해."
수진 선배가 초조해했다.
도예과, 공예과, 디자인과, 조소과, 서양화과 등 여러 과가 섞여 있는 수업이었다.
원래 공예과들은 수업이 워낙 힘들기 때문에 단결도 잘 되고 조별과제도 그만큼 잘했다.
디자인과도 마찬가지.
그 쪽 학생들은 열심히 과제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여러 과가 섞인 수업에선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문제는 서양화과였다.
서양화과는 개인주의도 강하고, 예술가랍시고 나사가 풀려있기도 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조별과제에 약했다.
게다가 수진 선배는 자기 이름을 조 이름으로 쓰기까지 했으니 초조함이 두 배였다.
"괜찮아. 우리도 열심히 했으니까."
정화 선배가 불안해하는 수진 선배를 달랬다.
그리고 순서대로 발표가 시작되었다.
* * *
먼저 제출한 슬라이드를 본 후, 사진을 제출한 조의 대표가 부연 설명을 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교수가 감상을 말했다.
막 디자인과의 한 팀의 발표가 끝났다.
'역시 디자인과...'
"저희는 유명한 화가들이 현대의 서울에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그림 속 장면들을 저희들이 직접 연기하며 재현하고 또 섞어보았습니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과제에 공을 들인 표시가 났다.
사진 촬영도 훌륭했고, 디자인과답게 포토샵도 깨끗했다.
깔끔하게 잘 만든 사진들이었다.
김진기 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명작을 재현한다는 게 조금 흔한 소재일 수도 있지만, 그런 흔함이 무색할 만큼 사진들을 잘 찍었네요. 원작들과 싱크로도 뛰어나고, 사진들 간의 연결도 좋습니다. 적절한 장소와 소품들을 찾기 쉽지 않았을 텐데 수고 많았습니다. 다만 여러 화가들이 만났다는 상황만 있고, 그 이후 이야기는 좀 빈약하지 않았나, 굳이 단점을 찾자면 그 점을 지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음.
익숙한 얼굴들이 등장했다.
바로 서양화과 2학년들.
장규오가 포함된 그 복학생 군단이었다.
찰칵.
그들이 준비한 사진이 넘어갔다.
흰 종이를 벽에 바른 하얀 방이었다.
네 명의 학생이 서 있고, 바닥에는 페인트 통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처음엔 붓을 페인트에 담가 벽에 뿌리더니, 나중엔 서로의 몸에도 페인트를 뿌리고, 아예 페인트 통을 들고 쏟기도 했다.
그 과정들을 제법 감각적으로 촬영했다.
'액션 페인팅인가? 나름...'
나쁘진 않았지만, 왠지 복학생 선배들과 같은 조를 하지 않아서 다행으로 여겨졌다.
내 취향도 아니었고, 우리 조 만큼 즐거워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선배 중 하나가 사진에 대해 설명했다.
"저희 조는 잭슨 폴락의 액션 페인팅에 영감을 받은 작업을 했습니다. 물감을 뿌리되 캔버스가 아니라, 우리를 가둔 세상을 향해 뿌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엔 우리들 자신에게까지 물감을 뿌렸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예술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지는 젊은 예술가들의 열정을 표현해보았습니다."
"한 번에 촬영이 끝났나요?"
김진기 교수가 묻자, 선배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우연에 의존하는 작업인 만큼 만족하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여러 번 촬영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김진기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고생이 많았습니다. 액션 페인팅이란 소재나, 예술 속에 자신을 던진다는 주제들이 자칫 진부할 수도 있었지만, 그걸 비난할 수 없을 만큼 성실히 과제를 해줬군요. 물감이 튀는 장면을 찍은 일부 사진들은 꽤 감각적인 연출이었습니다. 잘했습니다."
우리의 차례가 다가왔다.
팀 수진은 다섯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앞선 조들의 과제가 대부분 괜찮았다.
잘 하려고 애썼고, 실제로도 잘했다.
하지만 우리 과제는 사실, 조금 병맛이었다.
'어쩌면 조금이 아니라...'
그래서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우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수진 선배는 물론, 정상인인 정화 선배도.
4학년 관록의 형원 선배도.
근육질 한철이도.
심지어 2회차 인생인 나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다시 몇 주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래도 나는 우리 조를 선택할 것이고, 우리 과제를 그대로 할 것 같았다.
병맛이긴 했지만, 우린 정말 즐겁게 촬영했다.
촬영이 끝나고 후보정까지 모두들 달라붙어서 정말 열심히 했다.
우린 최선을 다했고, 후회는 없었다.
찰칵.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발표에 앞서.
"어허...이거 이번 조는 조 이름이.....팀 수진이군요."
김진기 교수가 말하자 강의실 전체에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이거 기대를 안 할려야 안 할 수가 없군요. 대체 얼마나 자신이 있길래, 이렇게 자기 이름을 걸었을까요."
수진 선배가 정말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형원 선배가 미안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우리가 찍은 사진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꼴깍.
어떤 반응일까.
우리 다섯은 일제히 침을 삼켰다.
* * *
우리 컨셉은 옛날식 B급 공포 영화였다.
깊은 밤.
수진 선배는 낡은 미대 건물에서 잠에서 깨어나고, 탈출하려 한다.
하지만 정문은 잠겨 있었고, 수진은 작업실과 미대 창고를 뛰어다니며 창문을 확인한다.
하지만 창문들은 모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수진은 어두운 건물 안에서 혼자가 아니었다.
이 낡은 미대 건물에는 유령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정화 선배는 조소상의 전신상 중 하나.
섹시한 눈빛과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형원 선배은 회화 작업실의 그림 속 유령, 태민은 먼지 가득한 창고 속의 오래된 시체, 나는 어둠 속에 사는 우울한 노인 흡혈귀였다.
그리고 한철은 건물 옥상에 사는 프랑켄슈타인이었다.
한철켄슈타인은 수진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자신의 힘으로 그녀를 보호하려 한다.
결국 여러 유령들이 수진 선배를 노리지만, 한철켄슈타인의 희생덕분에 수진은 무사히 건물을 탈출했다.
멀어지는 수진 선배를 유령들이 바라보며 슬라이드는 끝났다.
* * *
처음 흑백으로 수진 선배가 등장했을 때, 학생들은 뭔가 싶어서 숨죽이고 바라봤다.
정화 선배가 등장했을 때까지만 해도 조용했다.
하지만 유령 형원이 등장하고, 노인 흡혈귀와 한철켄슈타인까지 등장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사진이 계속 나올수록 웃음소린 점점 줄어들었다.
분장도 정교했고, 흑백 사진도 뛰어났다.
특히 나는 수진, 정화, 태민, 유나에게 포토샵을 가르쳤는데 네 명의 금손들이 흑백 사진을 예술로 보정했다.
그래서 사진 하나하나가 고전 영화 속 명장면 같았다.
그리고 백미는 수진 선배였다.
청순한 얼굴에 커다란 이목구비가 흑백 사진이랑 찰떡으로 어울렸다.
'원래 절대 뻔뻔한 사람이 아닌데...'
하지만 김진기 교수의 말대로 예술적으로 뻔뻔한 건지, 카메라 앞에서는 제대로 연기했다.
덕분에 사진 슬라이드가 끝났을 때 강의실은 조용했다.
스크린에는 마지막으로 조소과 선배들과 태민, 유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이제 정리 발표의 시간.
정화 선배가 정리를 위해 일어나려 할 때, 수진 선배가 붙잡았다.
"내가 할 게."
조 이름도 팀 수진이었고, 주연도 수진 선배였다.
게다가 수진 선배는 거의 한 학기 동안 김진기 교수에게 장난으로 놀림당하고 있었다.
정화 선배는 모처럼 용기 낸 수진 선배에게 기꺼이 양보했다.
그리고 수진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먼저 교수가 말했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죠?"
"..."
갑작스런 질문에 수진 선배가 당황했다.
그러자 교수가 웃으며 덧붙였다.
"농담입니다. 추가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내용 전달이 잘 되었습니다. 사진들도 훌륭했고,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그와 동시였다.
와아! 우올!
여러 환호성과 함께 주연 배우인 수진 선배를 향해 강의실에서 박수가 터졌다.
반응이 뜨거웠다.
앉아 있는 우리 네 명도 비로소 안도했다.
특히 이 각본의 주범인 형원 선배는 이제야 겨우 용서받는 표정이었다.
'따지고 보면 나도 책임이...'
그래서 나도 조금 사면 받는 기분이었다.
학생들의 반응에 한철도 뒤늦게 같이 신났다.
잠시 후, 박수가 끝나고 수진 선배가 짧게 발표했다.
"저희는 옛날 공포 영화의 B급 정서와 우리의 낡은 미대 건물을 결합시켜 짧고 괴기스런 사랑 이야기를 연출했습니다."
수진 선배도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지 발표 후 혀를 내밀었다.
"잘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까지 서양화과 이수진씨를 놀려서 미안합니다. 오늘 누구보다 성실히, 그리고 재미있는 과제를 해주셨군요."
대단한 의미는 없겠지만, 교수의 사과까지 받자 수진 선배는 꽤 기쁜 모양이었다.
그리고 김진기 교수가 덧붙였다.
"저는 이 작품을 두 가지 면에서 재밌게 봤습니다. 첫째는 엉뚱함입니다. 원래 예술가들은 엉뚱해야 하는데, 세상이 그걸 허용하지 않죠. 더 잘하도록, 더 완벽하도록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 과제는 끝가지 잘 엉뚱했습니다. 사진의 이해는 몇 년 째 계속 같은 과제를 하는데 그 중 가장 엉뚱했습니다.
또 하나는 조원들 모두가 즐겁게 촬영한 게 화면 곳곳에서 느껴지더군요. 교수를 오래 하다보면 그게 보이는 법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즐겁게 과제를 할 때 교수들은 가장 뿌듯하고 보람된 법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수고했습니다."
교수의 감평이 끝나자 몇몇 학생들이 다시 박수를 치기도 했다.
그렇게 또 한 고비가 지나갔다.
이번에는 감평이 끝나고 곧바로 유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 지금 발표 끝났어. 교수님한테 칭찬 많이 받음. 고마워.ㅎㅎ ]
김태민과 조소과 선배들은 만나서 인사하는 걸로.
굳이 문자까지 보내기엔 그랬다.
아무튼 뿌듯했다.
수진 선배와 정화 선배는 정말 기쁜지 수업이 끝날 때까지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그건 우리 세 청강생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리고 김진기 교수가 수업을 마무리했다.
"동영상을 같이 낸 조는 약속대로 가산점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출한 과제는 모두 제 블로그에 올릴 계획입니다. 나름 유명한 블로그라서, 블로그의 동영상으로 특채된 선배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혹시 모릅니다."
아아아아.
과제가 공개된다니 학생들이 싫어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김진기 교수는 이미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어서, 기어코 블로그에 올릴 것이다.
나 역시 우리의 병맛 과제가 좀 걱정되긴 했다.
하지만 어차피 알아보는 이도 없을 것이고, 지금은 기뻐서 이것저것 생각하기도 싫었다.
"갑자기 이런 말을 덧붙이면 이상할까요?"
김진기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한 지는 이미 오래 되었지만, 그래도 가끔 생각나는 과제가 있습니다. 대부분 힘들고 고생한 과제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을 이렇게 몰아붙이는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지나서, 문득 이 순간이 떠오르지 않을까. 더불어 내 이름도 같이 기억나면 더 좋고.
아무튼 이번 과제가 여러분에게 좋은 기억으로 오래오래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만큼 나이 들고, 또 세상에 희석되어 살다보면 이런 기억들 하나하나가 무척 소중해지는 법입니다."
그 점은 나도 교수의 말에 동의했다.
즐거운 기억을 하나 갖게 되어서 팀 수진에게 고마웠다.
유나와 태민 등등에게도.
"우리, 뒤풀이 해야죠. 뒤풀이! 시원한 맥주로. 조소과 친구들도 다 불러서."
수업이 끝나고, 형원 선배가 제안했다.
나도 이 순간만큼은 형원 선배에게 100% 동의했다.
수진, 정화 선배도 마찬가지 같았다.
<노스페라투,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