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31화 (31/203)

■ 31. 이어지는 사진. □

포항에 오래 머물 수 없어서 아침 차로 일찍 올라가기로 했다.

어머니와 더 있고 싶었지만, 그래도 다시 학교와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 자주 해. 밥 잘 챙겨 먹고."

"그럴게요."

어머니가 내게 바라는 건 항상 이 정도였다.

* * *

그래서 다시 서울.

"드디어 조별과제입니다."

사진의 이해.

김진기 교수가 과제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어떤 가요? 제 조별과제가 이제 제법 유명하죠? 만일 아직 유명하지 않다면 여러분을 더 괴롭힐 생각입니다."

사진의 이해는 미술대 필수 과목.

그러니 피해갈 수 없는 관문이었다.

그런데 김진기 교수는 매년 똑같은 주제의 조별과제를 내는데, 그게 말 그대로 학생들을 갈아 넣는 과제였던 모양이다.

모든 대학생들이 조별과제를 싫어하겠지만, 개인주의가 강한 미대생들은 몇 배로 더 싫어했다.

'그런데 김진기 교수...분명 즐기고 있어...'

김진기 교수는 나름 인기 교수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일부러 악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진석 교수도 그러더니, 교수들은 다들 조금 변태 같았다.

"여기 학생들은 아마 대부분 2학년일 겁니다. 3, 4학년이 되면 바빠지겠지요. 조별과제를 할 기회도 줄어들 거고, 또 공모전이니, 취업이니, 졸전이니, 그래서 자신의 작업 외에는 진심으로 신경을 쓸 여력이 없어질 겁니다.

그래서 아마 2학년, 특히 내 수업이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 모릅니다. 의미 없는 과제에 의미 없는 노력을 쏟아 부울 기회. 그래서 여러분이 그 기회를 헛되이 날리지 않도록, 나는 여러분들을 처절하게 몰아붙일 생각입니다."

김진기 교수는 이상한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이번 과제는 이어지는 사진으로 내용 담기입니다. 대가들은 한 장의 사진에 많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가가 아니더라도, 사진에 여러 내용을 담을 수는 있습니다.

특히 두 장 이상의 사진을 연결하면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이 가공할 만큼 늘어납니다. 어째서일까요? 서양화과 이수진씨,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시 오늘도 수진 선배는 이름이 불렸다.

식판의 부재 이후, 교수에게 이름이 단단히 각인된 것 같았다.

'내가 교수라도...'

수진 선배는 착하고, 표정도 풍부했다.

그래서 놀리는 재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 갑작스런 질문으로 수진 선배가 당황하면, 교실 전체의 분위기가 따뜻해졌다.

수진 선배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사진과 사진 사이에 시간의 흐름이나, 장소의 이동을 담을 수 있습니다."

수진 선배의 대답을 듣고 김진기 교수는 크게 동의했다.

"그렇군요. 이수진씨. 훌륭한 답변이었습니다. 좋은 답변입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용하면 당연히 물리적으로도 담을 수 있는 내용이 늘어납니다. 하지만 사진과 사진 사이의 여백에도 많은 것들이 담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 해보셨을 겁니다. 영화의 예고편이 영화보다 훨씬 재밌는 경우. 때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훨씬 많은 의미를 담기도 합니다."

수진 선배가 칭찬받으니 옆에 있던 내가 다 뿌듯했다.

하지만 당사자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자, 잠시 쉬었다 하겠습니다. 휴식 후, 여러분의 선배들이 얼마나 열심히 과제를 수행했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수업 끝날 때까지 조별과제 멤버를 정해서 저에게 제출해주기 바랍니다. 한 조는 6명을 넘지 않도록 해주세요."

* * *

교수는 이미 전부터 여러 번 조별과제에 대해 경고했다.

그래서 쉬는 시간 학생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 조를 정하기도 하고, 벌써 과제를 의논하기도 했다.

'나야 뭐.'

성격 좋은 수진 선배와 정화 선배와 함께라면 아무 걱정이 없었다.

든든했다.

그런데 그때.

터벅터벅.

우리 셋 앞에 남학생 세 명이 다가왔다.

서양화과 복학생 선배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엔 장규오도 있었다.

장규오는 가끔 수진 선배가 무서워할 만큼 집요하게 쫓아다닌다는 그 남학생이었다.

그들을 보자, 수진 선배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복학생 선배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얘들아. 조별 과제 우리랑 하자. 빡센 과젠데 우리끼리 뭉쳐야지. 디자인과 애들 열심히 하는 거 알지? 우리도 서양화끼리 단결해야지."

장규오도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우릴 보고 말했다.

"그래. 특히 수진이 너는 교수한테 찍힌 모양인데 이번에 만회 해야지. 야, 1학년. 너도 넣어줄게. 같이 하자. 너도 이 참에 선배들이랑도 좀 친해지고."

찌이익.

그리고는 내 허락도 없이 내 노트 한 페이지를 잡아 찢었다.

"자, 여기 우리 이름 적어서 내자."

"저기 그런데요..."

정화 선배가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우리 뒤편에서도 커다란 그림자들이 다가왔다.

* * *

"하하, 이거 한 발 늦으셨네."

장규오의 일행이 우리 뒤를 바라봤다.

거기엔 형원 선배와 한철이가 서 있었다.

형원 선배는 복학생 4학년.

4학년만의 포스가 있었다.

그리고 한철이는 외모만으로는 사체과.

그리고 왜인지 4학년의 포스도 같이 가지고 있었다.

형원 선배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떡하죠? 여기 세 분들은 우리랑 같은 조 하기로 이미 결정했는데. 웬만하면 같이 하고 싶지만 여덟 명은 너무 많군요."

"맞아요. 여덟 명은 너무 많아요. 다섯이 딱 적당하죠."

한철이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끼어들 차례.

나는 우리 다섯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장규오에게 살랑살랑 흔들며 보여줬다.

"어떡하죠? 저희 이미 조 컨셉까지 다 정해뒀습니다. '청강생 군단'으로. 그래서 이번에는 아쉽지만 서양화과 선배들하고는 같이 못하겠네요."

정화 선배도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맞아요. 선배님. 저희 벌써 다 정해뒀어요."

선배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세 명의 복학생 선배는 허무하게 돌아가야 했다.

장규오가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나를 노려봤지만,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착한 여학생에게나 통하는 그런 수법...'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우리 다섯은 한 조가 되었다.

조 컨셉까지 정했다는 것은 사실 거짓말이었다.

정화 선배한테 괴짜 청강생 둘이 사실은 내 룸메라고 미리 말해뒀을 뿐.

그렇게 어쩌다보니 암묵적으로 우리가 같은 조를 하기로 결정된 것이었다.

'일종의 이이제이라고나 할까...'

의욕이 넘치는 두 청강생을 이용해 불편한 선배들을 몰아내기.

동기가 불순한 것은 똑같지만, 그래도 두 청강생은 심성은 착하니까.

어쨌든 모두 목적을 이뤘다.

나와 정화 선배는 수진 선배를 지켰다.

그리고 두 불순한 청강생은 강의실에서 제일 예쁜 여학생들과 한 조가 되었다.

모두가 행복한 순간이었다.

* * *

그리고 김진기 교수는 약속대로 선배들의 과제를 보여줬다.

과제의 이름은 '이어진 사진으로 내용 담기.'

과제의 수준이 후덜덜했다.

'이렇게 선배들 과제까지 보여주면서 압박하니까 그럴 수 밖에...'

게다가 여러 과가 섞여 있는 수업.

김진기 교수는 교묘하게 여러 과들을 경쟁시켰다.

그러니 과제의 수준이 계속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찰칵. 찰칵.

스크린에 사진들이 연속적으로 비춰졌다.

단순히 나열된 사진들이 아니었다.

어떤 선배들은 뮤직 비디오처럼 촬영했고, 어떤 선배들은 단편 영화처럼 촬영했다.

화보처럼 촬영한 팀도 있었다.

아예 퍼포먼스를 하면서 그 과정을 촬영한 팀도 있었다.

한 마디로 모두 장난이 아니었다.

"어떤 내용을 담을지, 어떤 방식으로 담을 지는 모두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사진 수업이긴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무엇이든 자유롭게 해석하고, 자유롭게 표현하면 됩니다. 제출하는 사진의 매수도 자유입니다. 가끔 동영상으로 촬영하는 조도 있었습니다. 동영상을 함께 제출하면 가산점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점수의 비중이 높은 만큼 이제까지 평가가 안 좋았던 분들은 한 번에 만회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모두 분발해주길 바랍니다."

* * *

수업 후, 우리 다섯은 진짜 회의를 가졌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

그런데 뭐가 그리 좋은 지 형원 선배와 한철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자, 그럼 우리 조 이름부터 정하죠."

그나마 제일 정상인 정화 선배가 회의를 주도했다.

"저, 아까 주원이가 말한 청강생 군단, 괜찮은 것 같아요. 청강생이 셋이나 되니까."

수진 선배가 조심스레 의견을 말했다.

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형원 선배가 단칼에 잘랐다.

"왜죠?"

"말 그대로 우린 청강생입니다. 우린 학점도 필요 없고, 학점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하긴 하겠지만, 역시 정화씨와 수진씨가 이 과제의 주가 되어야 합니다."

묘하게 배려하는 척 부담까지 주는 형원 선배였다.

그런데 옳은 말이었다.

역시 4학년다운 관록이 느껴졌다.

"일리가 있군요."

정화 선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괜찮은 이름이 있을까요?"

"수진씨는 지금 이 수업에서 가장 유명한 학생입니다. 그걸 이용해보면 어떨까요?"

"안 돼요! 무조건 안 돼요!"

"교수님이 분명 말씀하셨죠. 이번 과제를 만회의 기회로 삼으라고. 그러니 '팀 수진'이 어떨까요? 수진씨에겐 만회의 기회. 그리고 우리 조에겐 강렬한 인상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될 겁니다."

"절대 안 돼요!"

수진 선배가 모처럼 목소리를 높여 반대했지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수결로."

결국 4:1, 사실 상 전원 찬성으로 우리 조의 이름은 '팀 수진'이 되었다.

왜인지 형원 선배와 한철이 뿌듯해했다.

나도 사실 뿌듯하긴 했지만, 티를 내면 두 사람과 같은 취급을 당할까봐 적당히 자제했다.

그리고 우린 어떤 내용을 찍을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지.

의논을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잘 될 리가 없었다.

서양화부터 컴공까지.

우린 다국적 유엔군이었다.

평소 관심사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능력도 달랐다.

게다가 이번 과제가 너무 어려웠다.

내용과 함께 이미지까지 구상해야 하는 과제.

회의가 길어졌지만 우린 제자리걸음이었다.

화기애애했던 처음의 분위기도 회의가 길어질수록 조금씩 초조해지고 있었다.

'역시 회귀자인 내가 나설 차례군.'

"그럼 이렇게 하죠."

네 명이 나를 주목했다.

"우리 다섯은 각자 의견을 냈습니다. 하지만 서로 설득하는데 실패했죠. 그러니 전부 다 하는 것은 어떨까요?"

"전부 다?"

정화 선배가 너까지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형원 선배와 한철은 처음부터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수진 선배는 좀 맹하고 학점에는 초연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정화 선배는 그나마 정상인인 나를 은근히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입에서 '모두 다 하자'는 말이 나왔으니...

"이번 과제는 지금부터 시작해도 시간이 부족할 겁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회의만 하면서 시간을 끌 수는 없습니다. 다행히 우리에겐 강력한 무기가 있습니다."

"그게 뭐지?"

나는 형원 선배를 바라봤다.

"바로 신춘문예 단편소설 등단자."

이미 사진의 이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본인이 아니라 제 3자의 입에서 그 말을 듣자 느낌이 새로운 모양이었다.

심지어 형원 선배조차 살짝 놀란 것 같았다.

"맞군요. 우리에겐 신춘문예 등단자가 있었군요."

"그러네. 다른 조들이 각본을 짜봤자 아마추어 학생들이지. 하지만 우린 진짜 프로를 가지고 있었어."

수진 선배와 정화 선배가 잇달아 감탄하자, 형원 선배는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형원 선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 모두 각자 담고 싶은 이미지의 키워드를 세 개씩 적는 겁니다. 그리고 형원이 형에게 드리는 거죠. 그럼 형원이 형이 모든 내용을 담아서 책임지고 한 편의 각본을 쓰는 겁니다. 형,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죠? 형은 등단한 작가니까."

형원 선배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발사했다.

"맡겨만 줘. 누구도 믿지 못할 각본을 짤 테니까."

그렇게 조별과제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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