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어머니 □
포항으로 내려가는 버스 안.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종종 노력 상점의 기능들을 테스트하고 분석했다.
그 중 하나가 노력한 시간을 집계하는 방식.
난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전생에서는 직장 생활을 핑계로 결국 멀리하게 됐지만...'
두 번째 생인만큼 꾸준히 읽을 생각이다.
그런데 교양서적이나, 전공 서적을 읽으면 당연히 그 시간이 노력으로 집계되었다.
하지만 소설책은 달랐다.
어려운 고전이든, 신나는 무협지든 전부 노력 외 시간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니까 애매한 경우에는 전부 노력 외 시간으로 취급받는다는 말이지.'
하지만 그렇게 빡빡한 규칙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무협지를 읽고 난 후에, 주인공이 왜 그렇게 행동했고, 감춰진 복선은 무엇이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잠깐 노트를 꺼내서 그 정도만 정리해줘도 무협지를 읽은 시간이 노력으로 집계되었다.
물론 열심히 집중해서 읽은 경우에 한정해서만 그랬다.
'다시 말해서 생산적으로 놀았다면, 노는 시간도 결국 노력으로 인정받는다는 말이지.'
그림을 그리는 것도 비슷했다.
나는 무척 열심히 그리긴 했지만, 그림 그리는 것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예외 없이 전부 노력으로 집계되었다.
아, 그리고 유나와 함께 쇼핑한 시간도 전부 노력으로 집계되었다.
'그걸 노력으로 쳐주지 않았으면 진짜...'
그것은 노력 상점이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이 아니라, 충분히 나를 배려하고 이해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런 요령들을 적절히 찾아서 활용했기 때문에 노력 코인은 꾸준히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이 정도 저축이면, 나중에 갑자기 어떤 일이 들이닥쳐도 충분히 대비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또 하나 업그레이드.
내 노력 상점은 처음 생기고 6개월 만에 레벨 2로 업그레이드되었다.
하지만 레벨 2가 된 후 거의 1년 반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 레벨 3으로 업그레이드되지 못하고 있었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성장에 필요한 거래량도 같이 증가하는 게 아닐까?'
뭐, 내가 당장 불편을 느끼는 것도 아니니까, 그 정도야 이해할 수 있었다.
'오히려 불편을 느끼지 않아서 성장이 더딘 것은 아닐까. 최근에도 열심히 살긴 했지만, 확실히 입시 때만큼 절박하게 굴지는 않았어.'
나는 이번 여름 방학을 기점으로 강력하게 일을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그때 노력상점도 예전 생각날 만큼 극한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노력 상점이 상점이나, 코인 같은 이상한 방식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내 초능력일 거야. 내가 극한으로 육체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초능력.'
그러니 노력 상점도 나의 필요나 욕구에 맞춰 성장하고 구성되는 것일 지도 몰랐다.
아무튼.
이제 포항이 가까워졌다.
나는 읽고 있던 책을 접고, 노트를 꺼내 간단히 읽은 내용을 정리했다.
평일에 다녀오는 여행이라 버스 자리는 널널했다.
그래서 옆자리에는 어머니 옷이 가득 담긴 가방이 있었다.
뿌듯했다.
* * *
포항 도착.
잠깐 미술학원에 들렀다.
[축! 이주원 한국대 서양화과 합격]
학원 간판 밑에 내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이거 기분 괜찮네.'
한 손에는 원장 선생님께 드릴 한우 세트를, 또 한 손에는 학원 학생들을 위한 과자와 음료수, 간식 따위를 들고 있었다.
"너, 이 녀석. 이런 거 사오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냐? 한 번 만 더 이런 거 가져오면 출입금지다."
원장 선생님은 오히려 버럭 화를 내셨다.
아마 내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는 지 모르셔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한우 세트는...'
원장 선생님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나와 어머니를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오늘 어머니께 선물도 드리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챙겨드릴 생각이다.
그런데 내가 신세를 진 분께 아무것도 해드리지 않는다면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할 지도 모른다.
'뭐, 다음부터는 부담되시지 않게 적당히 조절해야겠다.'
그리고 간식들을 내려놓자 미술학원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학생들이 제법 늘어난 것 같았다.
'설마 내 덕분일까?'
그렇다면 정말 뿌듯할 것 같았다.
한 녀석이 내게 물었다.
"한 번만 만져 봐도 돼요?"
"뭘?"
"선배님이요."
"나를? 왜?"
"기 받아가게요."
돌하르방이었나?
석상을 만지면서 기도하면 아들을 낳게 된다는.
이 녀석들에겐 내가 돌하르방이었다.
한 녀석이 시작하자 나머지 녀석들도 똑같이 따라했다.
내 팔과 소매를 붙잡고 막 당기더니 어떤 놈은 눈을 감고 잠시 소원까지 빌었다.
재밌는 녀석들.
"오빠, 저는 한 번만 안아 주세요."
"안 돼. 저리 가."
그렇게 매몰차게 학원을 빠져나왔다.
* * *
일부러 어머니께 내가 온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
'안 그래도 피곤한 분인데.'
내가 온다고 말했으면 또 이것저것 신경 쓰고 준비하셨을 것이다.
오랜만에 집에 왔더니 집이 썰렁했다.
'이럴 줄 알았지.'
냉장고를 열어봤더니 밑반찬 서너 개가 전부였다.
그나마 내가 있을 땐 계란 후라이라도 꾸준히 식탁에 올라왔었는데, 냉장고에 이제 계란도 없었다.
나는 집 앞 마트로 달려가 이것저것 장을 봤다.
달걀이며 야채도 사 와서 냉장고에 가득 채웠다.
그리고 갈비도 사와서 물에 담가 핏물을 뺐다.
오랜만에 집도 청소하고.
'옛날 생각나네.'
노력 상점을 얻은 것도 대청소를 마친 직후였다.
그렇게 청소도 마치고 어머니를 위한 갈비찜도 완성했다.
전생에 혼자 산 기간이 길어서 요리는 나쁘지 않게 잘 했다.
그렇게 환하게 불을 켜두고 기다렸더니 새벽 1시가 다 되어서 어머니께서 들어오셨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빨리 앉으세요. 오늘 저녁은 갈비찜입니다."
작은 밥상 위에는 내가 만든 갈비찜과 몇 가지 반찬이 차려져 있었다.
작고 소박한 차림이었지만, 내가 번 돈으로 제대로 대접하는 첫 번째 자리였다.
'대체 몇 년 만일까.'
왜 지난 생에선 이렇게 작은 여유조차 갖지 못한 걸까.
갈비라고 해봤자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직장인들은 일 때문에 식사를 대접할 때는 항상 특별한 메뉴를 고른다.
'하지만 어머니께는...'
혼자 사는 어머니에게는 갈비찜은 가끔 보는 메뉴였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어머니야말로 직장 거래처보다 몇 배나 더 소중한 고객인데.
왜 그런 분명한 사실을 잊고 지냈는지 모르겠다.
간단히 씻고 오신 어머니가 밥상에 앉았다.
"이게 다 뭐야. 서울서 공부한다고 고생할 텐데. 돈을 뭐 하러 이런 데 써."
"엄마, 나 이제 잘 벌어요."
"학생이 벌면 얼마나 번다고!"
글쎄, 지금은 어머니보다 한 대여섯 배 정도.
딸깍.
소주병을 열었다.
어머니가 술을 드시는 걸 내가 합격한 날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어머니도 기쁜 날은 한 잔 드실 줄 아는 분인데, 그걸 오랫동안 모르고 지냈다.
"엄마, 한 잔 받아요."
"어이구. 대학 갔다고 이젠 술도 마시고 다니니?"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래, 한 잔 따라 봐."
어머니는 호기롭게 술잔을 내미셨다.
그리고 소소한 이야기들.
"아, 엄마 드릴 게 있어요."
나는 신문지로 꽁꽁 싸 맨 캔버스를 내밀었다.
"이건 또 뭐니?"
술 한 잔 걸치신 어머니는 신문지를 뜯으셨다.
거기엔 내가 처음 그린 유화, 금붕어 그림이 들어 있었다.
정말 사진처럼 그리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니 어머니가 보시기엔 다른 그림보다 괜찮아 보일 거야.'
어머니 안목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마다 그림에서 찾는 게 다르니까.
어머니는 그림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하셨다.
"잘 그렸네. 우리 아들 미대생 맞구나. 네가 미대 간다 그래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걸까, 걱정했었는데. 미대 안 갔으면 큰일 날 뻔 했네. 물고기가 살아있네. 진짜 잘 그렸다. 진짜 잘 그렸어. 미대 잘 갔다. 우리 아들이 이런 소질이 있었네."
벌써 취하신 건지 어머니는 그림을 보며 같은 말을 계속 하셨다.
'소질이라...'
같은 과에 나보다 뛰어난 괴물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그 녀석들을 모르니까.
지금 이 순간 어머니에겐 내가 최고의 화가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잘 됐네. 이 그림 걸어둬야겠다. 안 그래도 집이 허전했는데. 너무 잘 됐다. 용하기도 하지. 뭐 하나 해 준 것도 없는데, 그림을 어떻게 이렇게 잘 그려."
"엄마, 이제 그만 해요."
"내가 좋아서 그러지."
"엄마, 그런데 선물이 또 하나 있어요."
"또? 그림이야?"
그림보다 더 좋은 것.
난 가지고 온 가방을 내밀었다.
무뚝뚝한 아들이라 포장도 안 하고 그냥 가방에 담아온 게 전부였다.
어머니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어머나. 이게 다 뭐야?"
어머니는 가방에 담긴 옷들을 하나씩 꺼내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자기 옷 하나 제대로 못 고르는 스무 살 남학생이었다.
청바지 두어 벌.
티셔츠 몇 장.
체크 남방.
그런 것들이 주로 내가 입는 옷이었다.
어머니는 가방에 담긴 옷들을 의심스런 눈으로 하나씩 살펴보셨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마침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울 앞에 서서 옷을 한 벌씩 몸에다 대보셨다.
"네가 골랐니?"
"뭐, 대강."
"미대는 학교에서 옷 고르는 것도 배우니?"
그럴 리가요.
어머니는 너무 좋아하셨다.
솔직히 말하면 내 그림을 받으셨을 때보다 훨씬 더 좋아하신 것 같다.
방금까지 남아있던 피곤한 기색은 전부 사라지고 옷들을 살펴보며 소녀처럼 좋아하셨다.
심지어 마법 가방에서 옷이 끊이지 않고 계속 나왔다.
정말 어머니는 산타클로스를 만난 어린 아이 같았다.
'이렇게 좋아하실 줄도 아는 분이 평생 그렇게 사셨다니.'
너무 좋아하시는 모습이 오히려 씁쓸하게 느껴졌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게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는데, 한 번 죽고 나서야 겨우 이걸 해내다니.
지난 생 내내 어머니는 이런 날을 모르시고 평생 포항의 구석에서 혼자 쓸쓸히 지내셨을 것이다.
"그렇게 좋아요?"
"무슨 옷을 이렇게 많이 샀어? 십년은 입어도 되겠다."
"십년은 무슨. 전부 도매가에 샀어요. 그냥 편하게 입어요."
유나 이 녀석.
유나와 함께 도매상에 가지 않았더라면 정말 후회할 뻔 했다.
아무리 예산을 넉넉히 잡았더라도 소매점에 갔더라면 이렇게 옷을 많이 사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들은 정말....'
난 수십 년을 어머니를 알고 지냈는데도 어머니 옷을 고르지 못했다.
하지만 유나는 어머니에 대한 내 몇 마디 말만 듣고서 이렇게 근사한 옷들을 한 가방이나 골라줬다.
옷에 관해서라면 여자들은 정말 초능력자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유나가 대단한 건가.'
아무튼 유나에게 자꾸 신세를 지게 되는 것 같았다.
난 지난 생의 어머니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한동안 감자탕집 주방에서 계속 일하신다.
하지만 허리가 나빠지셔서 일을 그만두고 쉬게 된다.
'그때 어머니 치료비랑 생활비 드리는 문제로 아내랑 싸웠었지. 그런데 어머니가 저축이 있다고 받지 않겠다고 하셔서 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알고 봤더니 어머니는 다시 일을 구하신 후였다.
모텔의 청소부.
알게 된 후에 나는 어머니를 야단쳤다.
"왜 그런 일을 해요? 나한테 말도 안하고."
젊은 사람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오히려 일을 구해서 다행이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일한 이유를 이제는 안다.
어쩌면 지난 생에서도 알았을 지도 모른다.
'알면서도 모른 척 했겠지.'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나를 키우기 위해 일하셨다.
그리고 내가 학교에 가서는 학비를 보태기 위해서.
내가 직장에 다닌 후에는 내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전부 나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다를 것이다.
'엄마에겐 아직 기회가 있어.'
어머니는 아직 젊으셨다.
그리고 나도.
나도 아직 기회가 있었다.
아들 노릇을 할 기회.
이번 생은 반드시 어머니에게 어머니의 삶을 되찾아 드릴 것이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