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29화 (29/203)

■ 29. 헬프 □

"유나야. 나 좀 도와줘."

"뭘?"

유나와 나는 일종의 공생관계였다.

벌써 많은 도움을 받긴 했지만, 대부분은 쌍방이고, 자연발생적인 도움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내가 일방적으로 유나의 도움이 필요했다.

* * *

이론 과목의 중간고사도 거의 끝났고 실기 과목들의 과제 폭풍도 한차례 지나갔다.

기말을 앞두고 한 번 더 큰 파도가 밀려오겠지만, 잠시 여유가 있었다.

사업도 순조로웠다.

다만 주문이 너무 많아서 내가 신규 디자인을 못하고, 승희씨와 함께 디자인 수정을 하는 게 문제였다.

나는 승희씨에게 전화를 걸어 의논했다.

"역시 직원을 한 명 더 뽑는 게 낫겠죠?"

원래 승희씨의 계획은 아이가 어린이집 간 사이 잠깐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밤에 남편과 아이가 자는 사이 혼자 일어나 일을 할 정도였다.

"글쎄요. 진짜 바쁘긴 해요. 하지만 앞으로 계속 주문이 지금 같으리란 보장이 없잖아요. 저 많이 봤거든요. 잘 될 때 직원 늘렸다가 나중에 힘들어지는 회사들이요."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노력 상점도 있었고, 이제 한 달 후면 여름 방학이 시작된다.

여름 방학동안 미친 듯이 밀어붙이면 매출은 당연히 늘 것이다.

"직원을 뽑읍시다. 괜찮을 겁니다. 제가 구인 공고를 올릴 테니 일단 승희님이 승희님과 잘 맞을 사람들로 골라주세요."

승희씨는 아직 걱정하는 눈치긴 했지만, 내가 강하게 나가자 결국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저도 열심히 할게요."

사실 승희씨는 열심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지금 처럼만 하면 된다.

우린 잘 해낼 것이다.

크리스털 시네마의 안수정에게선 거의 매일 문자가 왔다.

[보셨어요? 저희 영화 방금 텔레비전 뉴스에 나왔어요!]

[아직 개봉전인데 홈페이지 이벤트 참여자가 벌써 8천명이에요. 이 사람들만 다 관람해도! 대표님께 홈페이지 맡기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

매일 이런 식이었다.

'굳이 나한테 보고할 필요는 없는데.'

귀찮긴 했지만, 고객 관리 차원에서 일단 일일이 답장은 했다.

[ 축하드려요! 저도 기대가 큽니다! ]

어쩌면 답장 때문에 더 연락이 자주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원래 이렇게 연락 많이 하는 손님은 블랙리스트인데...'

하지만 안수정과는 한동안은 친하게 지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학교도 일도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나는 약속대로 포항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래서 유나가 필요했다.

* * *

"너, 내가 돈 많이 번 건 알지?"

"많이 일한 건 아는데, 많이 번 줄은 몰랐지. 많이 벌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나는 평범한 대학생 입장이라면 상상도 못할 금액을 벌고 있었다.

"나 포항에 잠깐 다녀올 생각인데, 어머니 옷을 살 생각이야. 그런데 네가 좀 골라주면 안 될까? 사례는 충분히 할게."

현금으로 드리면 쓰지 않으실 게 분명하니 선물로 드려야 했다.

부족하긴 했지만 나는 나름 디자인 전공이었고, 미대생이었다.

하지만 여자 옷에 대해서는 전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이번 생은 아직 시도해 본 적이 없지만, 지난 생에서 내 선물을 받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 차라리 현금으로 주지. ]

내가 자주 듣던 말이었다.

덕분에 여자의 옷이나 보석은 내가 절대 도전해서는 안 되는 영역으로 여겨졌다.

"오올, 효잔데? 그래. 도와줄게."

어라?

유나가 도와줄 거라곤 생각했지만, 분명 조건이나 흥정을 제시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순순히 응하다니.

살짝 아쉬울 정도였다.

"어머니가 몇 살이셔? 체형은? 좋아하시는 브랜드는 있어?"

"그게..."

난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백화점은 안 돼."

"응?"

지난 생에도 가끔 어머니께 고가의 선물을 드린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랬더니 장롱에 넣어두곤 몇 년에 한 번 씩 꺼낼 뿐이었다.

"그래서 비싼 선물은 나중에 드리기로 하고, 지금은 당장 편하게 입으실 옷을 여러 벌 사드리고 싶어. 미안. 이러면 네가 더 귀찮겠다."

나는 망설이다 겨우 말했는데 유나는 오히려 활짝 웃었다.

"오올, 괜찮은 생각인데? 그래, 그럼 동대문에 가자. 실은 나도 백화점보다 동대문이 편해."

"고마워. 그날 음식은 내가 책임질게."

의상디자인 전공이 아니더라도 디자인과 학생이라면 동대문에 갈 일이 종종 있었다.

'뭐, 이쪽 사람이 아니더라도 동대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래서 여자 옷은 전혀 모르지만, 동대문 주위의 맛집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선뜻 도와주겠다고 한 만큼 음식만큼은 후회 없이 먹게 해 줄 생각이었다.

* * *

우린 저녁 늦게 동대문에 도착했다.

하지만 난 미처 알지 못했다.

오늘 밤 어떤 일이 생길지.

내 계획은 이랬다.

'두 세 시간 가볍게 쇼핑하고, 맛집 가서 느긋하게 밥 먹고 첫차 타고 돌아오면 되겠지.'

오랜만에 동대문에 온 나는 반가운 마음에 유나에게 아는 체를 했다.

"여긴 소매점들이잖아. 신기한 게 도로 하나만 건너가면 동대문 도매 시장이 있거든. 그런데 거긴 모든 옷들이 반값이야."

그러자 유나의 표정이 변했다.

"옷이 반값이라고?"

"응, 도매상이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거기는 상인들만 갈 수 있는..."

"앞장 서."

나는 웃으면서 유나를 달랬다.

"거긴 도매로만 파는 곳이야. 옷을 사는 단위가 달라."

"우리 어차피 오늘 옷 많이 사러 온 거잖아."

"그렇긴 한데, 도매상인들이 눈치가 진짜 빨라. 일반 손님인지 소매상인들인지 한 눈에 알아본대. 그래서 우리는 가 봤자...."

아차.

말을 뱉고 나서 내 실수를 깨달았다.

내 말은 유나의 승부욕을 자극하고 말았다.

유나는 짧게 말했다.

"안내해."

"그...그럴게."

저녁 9시가 조금 지나는 시간.

동대문 도매상들이 하나씩 오픈하고 본격적인 장사를 시작했다.

과연 도로 하나만 건넜을 뿐인데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방에서 대절해온 버스에서 커다란 사입 가방을 맨 옷가게 사장들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수첩과 이어폰 마이크로 무장한 사입 삼촌들이 바쁘게 뛰어다녔고, 옷 보따리를 실은 퀵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달리고 있었다.

이곳은 거의 전쟁터.

하지만 유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늘 이런 곳을 꿈꿨어."

유나와 나는 식혜를 마시며 잠시 거리를 관찰했다.

"이제 작전을 짜자."

길옆의 잡화점에서는 상인들을 위한 온갖 물품들을 팔고 있었다.

유나는 가게에 들어가 물었다.

"저기 검정색 사입 가방 얼마예요?"

"대짜는 만 이천, 중짜는 팔천!"

"중짜 하나 주세요!"

그리고 유나는 같은 가게에서 수첩과 볼펜도 사서 내게 쥐어주었다.

"넌 이 수첩을 들고, 내가 말을 걸 때까지 아무 말도 하면 안 돼. 그냥 조용히 따라 오는 거야. 알겠지?"

"그럴게."

디자이너 클럽, APM, 누존, 광희시장 등등.

층마다 각기 다른 스타일의 옷을 파는 도매 빌딩들이 몇 개나 있었다.

유나는 입을 꾹 다물고 몇 층을 둘러보더니 금방 이곳의 용어들을 배워서 구사하기 시작했다.

"이 옷은 깔이 몇 개나 돼요?"

"사이즈는? 이게 면이 몇 수예요?"

놀라운 적응력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유나는 예쁜데다가 당찬 이미지.

그게 묘하게 도매상인들에게 어필한 모양이었다.

'도매상인들을 속이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유나가 지나가면 상인들이 알아서 유나를 붙잡았다.

"언니 인터넷이지?"

"어떻게 알았어요?"

유나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딱 보면 알지. 언니 몸매만 봐도 알아. 언니는 스타일이 좋아서 금방 대박치겠다."

"고마워요!"

"고마우면 이거 보고 가. 이거 양파주머니랑, 핑크걸에서도 들어가는 옷이야."

"한 번 줘 봐요."

내 우려와는 달리 어느새 검정색 중짜 비닐 백은 어머니의 옷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심지어 모두 도매가로 구매했다.

뜻밖의 횡재였다.

예산의 절반으로 더 많은 옷을 구매했다.

그것도 전부 남자인 내가 봐도 예쁜 옷들이었다.

원래 도매상들은 인터넷 쇼핑몰 사장들을 귀찮아하기도 했다.

누구나 쉽게 시작해서 금방 망하니까.

하지만 유나는 뻔뻔하게 시장에 스며들어 어느새 처음 본 상인들과 언니 동생을 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나는 정말 죽었다 깨어났구나.'

그런데 유나가 나를 붙잡고는 건물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저기, 혹시 나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물론.

얼마든지 가능했다.

난 돈이 많았고, 또 유나 덕분에 헐값으로 품질 좋은 어머니 옷을 한 가방이나 구매했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한 달 치 카페 아르바이트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유나에게 건넸다.

"고마워. 계획에 없었는데, 옷들이 너무 싸길래. 제주도는 옷값이 비싸거든."

그리고 유나는 자기 가족들의 옷을 구매했다.

물론 옷이 담긴 봉지는 전부 내가 들었다.

"동생이 올해 고 3이 됐거든. 지금 한창 스트레스 많이 받을 땐데, 갑자기 옷상자 택배로 받으면 진짜 좋아할 거야."

항상 나한테는 짓궂던 녀석이라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니까 혼란스러웠다.

"남동생은 중학생인데 키가 너무 빨리 자라서 진짜 아무거나 주워 입거든. 아빠 옷도 같이 입고. 걘 좀 신경 써야 해. 너랑 키가 비슷하니까 네 옷이랑 같이 사면되겠다."

"난 옷 알아서 잘 입으니까 동생이랑 아버지 옷만 사드려."

"풉. 네가?"

그런 식으로 유나는 내가 건넨 거금을 대부분 가족들 옷을 구매하는 데 써버렸다.

조금 뜻밖이었다.

'큰딸이 살림 밑천이란 게 이런 뜻이었구나.'

유나는 옷만 보는 게 아니었다.

가끔 내 귀에 속삭였다.

"형제옥 스팸 구이. 제일 평화 비빔 국수. 수첩에 적어."

동대문 도매상인들의 배달 식사는 맛있기로 유명했는데, 유나는 지나가면서 그것들까지 전부 체크했다.

'미술로 익힌 관찰력을 이런 데 쓰다니...'

유나는 어쩌면 동대문을 위해 태어난 사람같이 느껴졌다.

'여자랑 쇼핑하는 게 힘들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평소의 쇼핑이 커피라면 오늘의 쇼핑은 TOP였다.

나는 어깨와 양손에 커다란 옷봉투를 메고, 사람들이 바글 거리는 시장 골목을 새벽까지 유나를 쫓아다녔다.

나는 틈틈이 [숲 속 산책]같은 아이템을 쓰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러 번 숨이 찼다.

하지만 유나는 저녁부터 새벽까지 한결같은 얼굴로 뛰어다녔다.

'내가 숲속 산책을 하는 것처럼 유나는 옷 가게 산책을 하고 있구나. 그래서 지치지 않는 거야.'

다행히 날이 밝았고, 우리의 쇼핑은 마침내 끝났다.

나는 겨우 살았다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유나는 여전히 생생했다.

* * *

우린 순대 볶음을 주문했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유나는 옷 봉투를 들여다보며 좋아했다.

'자기 옷은 하나도 안 사 놓고는 저렇게 좋아하다니. 유나 약점은 가족이었구나.'

의외의 발견이었다.

"오늘 빌린 돈은 방학 때 아르바이트 해서 갚을게."

급한 돈도 아니었고 이제 곧 방학이었다.

돈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유나는 영리하지. 무슨 일이든 금방 배우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잘하면 겨우 몇십만원 빌려주고 유나를 잡아둘 수 있겠는데?'

그래서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오늘 재밌었어. 우리 종종 동대문 도매시장에 놀러오자."

"정말? 나 여기 완전 좋아! 네가 지루해하는 것 같아서 망설였는데! 그래, 또 오자. 언제? 약속한 거다!"

유나는 정말 좋아했다.

후후후.

귀여운 녀석.

유나가 아무리 대단해봤자 역시 1회차 인간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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