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55화 (156/287)

< 라이벌(3) >

케빈 체임벌린은 화가 났다.

88.7마일짜리 속구에 방망이를 헛돌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젠장,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조금 희생했다고?’

얼간이 같은 다저스의 선택 때문이었다.

그래, 에밀리오 가르시아가 좋은 투수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녀석은 이번 시범 경기에서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팀의 5선발로 낙점된 상태였으니까. 메이저에 적응만 한다면 최소한 3선발급, 거기서 포텐셜을 다 터트려준다면 1, 2년 뒤에는 리그에이스 급의 투수로 성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그 녀석이 본격적으로 뛸 수 있을 때가 된다면 케빈 체임벌린이 제대로 뛸 수 있는 시기가 다 지나간 다음일 터인데.

그는 이 바닥에서 굴러먹을 만큼 굴러먹은 베테랑이었다. 이러쿵저러쿵 말은 많았지만, 그가 판단하는 다저스의 뜻은 명확했다.

수익이 극대화되는 지점까지만 투자를 하겠다.

우승? 물론 하면 좋다. 하지만 단기전은 변수가 많다. 19번을 붙으면 15번을 이길 만큼 전력 차이가 나는 팀이라도 4번을 먼저 져버리면 패배하는 것이 포스트 시즌이다.

게다가 애초에 그만큼 실력 차이가 나기도 힘들다. 같은 리그에서 뛰는 팀이라면 아무리 심각한 전력 불균형이 있다고 해도 7:3정도? 둘 다 포스트 시즌, 특히 월드 시리즈쯤 나오는 팀이라면 6:4 정도가 한계다.

다저스의 선택은 굳이 지금 돈을 펑펑 풀어가며 7의 전력을 유지하는 대신, 6 이상을 유지하고 대신 미래에도 이 정도 금액으로 6 이상을 유지하겠다는 속셈이다.

가성비를 맞춘다는 뜻이다.

애초에 포스트 시즌에 나갈 전력만 유지하고, 그 이후는 운에 맡기겠다는 거다. 그렇게만 해도 팀의 인기는 유지된다는 것은 지난 사례들로 이미 입증됐다.

뭐, 솔직히 지금 정도 전력이라도 포스트 시즌에 도전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단지 마지막 반지를 움켜쥘 가능성이 조금 줄어들 뿐이니까.

하지만 그 조금의 가능성이 저렇게 눈앞에 보이는 지금.

37세의 베테랑 케빈 체임벌린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하지만 헬멧을 거의 집어 던지듯 내려놓고 글러브를 챙기는 케빈 체임벌린의 모습은 단순히 이번 타석에서 삼구삼진으로 물러난 자신에 대한 분노로 보였다.

그렇기에 다저스의 팀원들은 37세의 노장이 보이는 투쟁심에 그저 감탄했다.

“캡틴. 괜찮아. 이제 1회 끝났잖아. 게다가 나 오늘 느낌이 아주 죽여준다고.”

글러브를 챙겨 그라운드로 오르는 길. 디아고 헤밍턴이 케빈 체임벌린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케빈 체임벌린이 흠칫 놀란 눈으로 디아고 헤밍턴을 바라봤다.

등판일의 디아고 헤밍턴은 투쟁의 화신이었다. 선발 투수의 전형적인 모습보다 한층 더 격렬하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마인드 컨트롤이라고 봐야 했다.

마운드는 외롭다. 그런 사나움 없이는 버틸 수 없을 만큼 마운드의 환경은 가혹하다. 그 가혹한 곳으로 향하는 에이스의 자신감이 케빈 체임벌린의 분노를 달래주었다.

그래, 지금 보스턴의 마운드에 선 녀석은 잃어버린 커다란 치즈다. 하지만 우리 팀에는 그에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으로 대단한 녀석이 있다.

디아고 헤밍턴이 마운드에 섰다.

+++

야구에서 수비는 재능이다, 혹은 경험이다. 이야기는 많았다.

사실 다 맞는 이야기다. 야구에서 수비는 그 무엇보다 재능을 필요로 한다. 좌익수, 혹은 유격수나 삼루수에서 뛰기 위해서는 강견을 타고나야한다. 아무리 훈련을 해도 재능이 없다면 러닝쓰로우로 150을 던지지 못한다.

타구 판단? 그 역시 타고난 공간감각능력이 있어야한다. 순발력 역시 재능의 영역이며 유연성과 균형감각 역시 타고난 신체의 한계가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동시에 수비는 가장 많은 경험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타격은 자신에게 가장 좋은 폼을 찾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라면, 수비는 온갖 경우에 대하여 가장 적절한 해답을 찾아내야 한다. 물론 가끔 본능적으로 그것을 해내는 괴물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결국 당황하지 않고, 가장 좋은 선택을 한다는 것은 경험이 없이는 힘든 일이다.

보스턴의 어린 야수들은 재능이 넘쳤다. 그리고 타격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종종 보는 사람들도 깜짝 놀랄만한 대단한 수비를 보여줬다. 마치 1회 말에 랄로 가야르도의 그 훌륭한 포구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재 그들이 훌륭한 야수인가를 따지면 대답은 No다. 그들은 프로라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수준의 실수를 종종 저질렀다.

“그러니까 녀석들의 포텐셜이 그 종종 보여주는 놀라운 수비라면, 현재의 위치는 그 형편없는 실수인 셈이지. 그리고 결국 그 부분은 경험이 해결해 줄 문제야.”

“미친 소리 하고 있네. 경험은 무슨. 야, 그렇게 경험치 먹이겠다고 올렸다가 그대로 망한 애들이 하나둘이냐? 게다가 여긴 빅리그고, 우린 보스턴 레드삭스야. 네가 말하는 그 경험은 AA나 AAA에서도 충분히 쌓을 수 있다고.”

“그 부분은 역시 비용 때문이겠지. 사실 작년에는 그래도 지금처럼 유망주 비율이 높지는 않았잖아? 그러다가 작년에 와장창 나는 바람에 그거 싹 처리하면서 유망주들이랑 이것저것 받아오고 그 과정에서 연봉 보조 꽤나 해줬다잖아. 물론 오피셜은 아니지만 말이지.”

“젠장, 또 그놈의 미래 이야기로군. 현재가 없으면 미래도 없는 걸 왜 모르는 거야. 게다가 그럴 거면 성민이랑 에두아르도는 대체 왜 데리고 온건데? 걔들은 완전 리그 최정상급에 즉전감이잖아.”

“워워, 진정하라고. 내가 존 맥도웰 단장도 아니고. 지금은 그냥 그 양반 생각이 그럴 거라고 추측하는 거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니 생각은 어떤데?”

“그야 당연히 너처럼 지금 당장 성적에 흥분하는 애들 달래기 용이겠지. 뭐 조금 다르기는 하겠다. 성민은 나이도 있으니 앞으로 2년이고 에두아르도는 7년인가? 뭐, 대충 에두아르도 장기계약 기간 이내로는 달려보겠다. 그런 뜻 아니겠어? 아, 우리 애들 공격이다.”

타석에 매튜 쿠퍼가 올라왔다.

그야말로 앞서 설명에 그럭저럭 부합하는 남자였다. 포텐셜로 따진다면 그는 최고 MVP를 노릴만한 재능의 소유자다. 삼루수가 50홈런을 노릴 수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그리고 그는 앞선 다섯 경기에서 이미 하나의 대형 홈런을 기록하는 것으로 그 평가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5경기 1홈런. 짱깨식 산술로 따지자면 현재 그는 시즌 33홈런 페이스다.

‘타격으로라도 메워줘야지.’

전문가들에게 장차 준수한 삼루수가 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긴 했다. 하지만 매튜 쿠퍼 본인도 자신의 수비가 현재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답은 타격이었다.

디아고 헤밍턴? 물론 대단한 투수다.

하지만 매튜 쿠퍼는 시범 경기에서 그에 버금가는 대단한 이름값을 지닌 투수들을 상대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여줬다. 상대가 리그 최고의 투수라고 해서 미리부터 쫄아들 필요는 없었다.

초구.

빠른 공.

매튜 쿠퍼의 방망이가 힘차게 움직였다.

-딱!!

결과는 1루 관중석을 직격 하는 커다란 파울타구.

매튜 쿠퍼가 자신의 얼얼한 손바닥을 매만졌다. 속았다. 속구가 아니라 커터였다. 매튜 쿠퍼의 무식한 손목 힘이 아니었다면 파울은커녕 내야 뜬공으로 끝났을 공이다.

그가 두 번째 공을 준비했다.

같은 코스. 빠른 공.

-부웅!!

“스트라잌!!”

아니다.

슬라이더였다.

투수가 공을 손에서 놓은 시점부터 타자가 공의 구질을 파악하기까지의 구간을 피치 터널 구간이라고 한다. 당연히 그 구간이 길면 길수록 좋은 변화구다.

릴리즈 구간이 일정하고 공의 궤적이 흡사할수록 그 구간은 길어진다. 디아고 헤밍턴의 슬라이더는 그 모든 것이 완벽했다. 심지어 녀석은 디셉션도 훌륭한 주제에 공을 끌고 나오는 익스텐션도 터무니없다. 피치 터널 구간이 길 수밖에 없다.

볼카운트 0-2.

그리고 세 번째.

당연히 하나 빼겠지?

아니, 어쩌면 공격적으로 들어올지도.

그래도 일단 공을 걷어낸다는 느낌으로 좀 지켜볼까? 아니야, 상대는 리그 최고의 투수다.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게다가 어차피 주자도 없잖아? 땅볼이 돼도 상관없으니 좋은 코스로 오는 공이라면 마음껏 휘두르자.

디아고 헤밍턴이 세 번째 공을 뿌렸다.

온다!!

온다!!!

온······다?

아니!! 오지 않는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체인지업.

속구와 모든 움직임에 차이가 없었던 완벽한 체인지업이 매튜 쿠퍼의 타이밍을 완벽하게 빼앗았다.

삼구삼진.

다저스의 에이스가 마운드 위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앞서 다저스의 위대한 캡틴을 삼구삼진으로 돌려세웠던 성민의 호투에 대한 그 응답에, 경기장을 가득 메운 다저스의 팬들이 아낌없는 환호를 보냈다.

보스턴의 야수들은 재능이 넘쳤다.

게다가 타격에 한정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그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것은 타격이 강하기로 유명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팀들 사이에서도 절대 뒤처지는 힘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다저스의 마운드에 선 남자는 명백하게 그 이상이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태어난 남자가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타고난 강건한 신체는 절정기, 기술적인 기량 역시 완숙기에 접어들었다.

디아고 헤밍턴이 보스턴 타자들의 출루를 허용하지 않았다.

-괴물이로구만. 마치 밥 깁슨 그 양반이나, 스티브 칼튼 녀석을 보는 것 같아.

필 니크로가 그와 동시대를 뛰었던 그 시대 최고의 투수들을 입에 담았다. 그것은 그가 투수에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확실히 저 정도면 전성기 클레이튼 커쇼 부럽지 않은 수준이네요. 아니, 레퍼토리의 다양함은 그 이상이에요.’

하지만 엄밀하게 말했을 때 디아고 헤밍턴의 기량은 그 이상이었다. 시대를 풍미했던 그 위대한 투수들도 주 무기는 직구 커브 슬라이더 쓰리 피치에 불과했다. 물론 그 세 가지의 공 모두가 플러스급 이상에, 슬라이더는 최소 플러스플러스급이었다는 점이 사기였지만 시대적인 보정을 제외했을 때, 그들이 전성기 기량으로 2034년에 뛴다면 절대 디아고 헤밍턴만한 기량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마치 전성기의 필 니크로가 다시 마운드에 선다고 해도 지금 성민만 한 기량을 보여줄 수 없는 것처럼.

2회 말

0:0

성민이 다시 마운드에 섰다.

타석에 선 남자는 에드 맥밀란.

작년 한 해 성민의 공을 받기 위해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고, 시즌 막판 마침내 성민의 공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토록 바라던 우승 반지까지 손에 넣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1년 내내 그 개고생을 했는데 딱 다섯 경기 제대로 공을 받아보고 성민은 떠났다. 그리고 그 떠나간 성민이 이번에는 상대 팀의 마운드로 돌아왔다.

“여어, 에드. 오래간만이야. 그나저나 네 말처럼 성민의 너클볼. 확실히 어렵기는 어렵더라고. 뭐 그래봤자 피똥을 쌀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지.”

그것도 하필 최악의 라이벌 녀석과 함께.

< 라이벌(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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