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벌(2) >
‘풀을 베는 사람은 들판의 끝을 보지 않고 대청소를 하는 주부는 찬장을 한 칸씩 정돈해 간다.’
‘천릿길도 발밑에서부터 시작된다.’
‘중요한 일을 먼저 처리하면 나머지 일은 거의 완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굳이 이런 유명한 말들이 아니더라도 시작의 중요성은 누구나 알고 있다.
선두타자의 내야 땅볼. 그리고 돌진하는 유격수. 그 순간 필 니크로는 정말 간절하게 외쳤다.
-제발!!
물론 그 간절함은 필 니크로만의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총 다섯 경기.
루시 알베리가 출전했던 경기 숫자다. 그리고 고작 그 다섯 경기로 그는 보스턴의 팬들에게 선명한 불신을 선물하는 기염을 토했다.
별것 아닌 땅볼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자세가 불안했다. 잡을 수 있을까?
-하아.
루시 알베리가 세실리아 마토스의 타구를 글러브로 받아내는 순간, 보스턴의 모든 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 쫄깃한 거지? 아니, 어지간한 유격수라면 베어 핸드로 잡아도 이상하지 않을 공을 간신히 글러브로 잡았는데 왜 이게 기쁜거지? 아냐 복잡한 생각은 하지 말자. 그래도 일단 잡았으니 된거야.
하지만 보스턴의 모든 팬들이 안심을 하는 그 순간에도 필 니크로는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지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바닥 밑에는 지하가 있고, 지하 밑에는 심연이 있다는 것을.
무려 1년이라는 긴 시간을 심연 속에서 살아본 귀신의 감각이 소리쳤다.
‘아직 끝이 아니다.’
루시 알베리가 오른손을 들어 글러브의 공을 움켜쥐었다. 비록 글러브에서 공을 뽑는 속도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일단 공을 더듬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필은 기꺼이 합격점을 줄 용의가 있었다.
루시 알베리의 넓은 시야에 세실리아 마토스가 1루를 향해 최선을 다해 달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약간의 조급함. 몸을 반 바퀴 돌려 왼발을 내디디며 그대로 손에 쥔 공을 1루를 향해 뿌렸다.
빨랫줄 같은 송구가 1루 베이스를 향했다.
루시 알베리는 그래도 AA에서 준수한 모습을 보여줬던 유격수였다. 어깨 하나는 일품이다. 만약 그의 어깨가 낙제점이었다면 차라리 제롬 스튜버츠를 유격수로 사용했을 것이다.
다만 방향은 썩 좋지 못했다. 너무 낮게 깔린, 그리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을 향해 날아가는 공.
필 니크로가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보스턴의 팬들 역시 안도의 한숨 직후에 다시 바짓단을 꽉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랄로 가야르도의 거대한 덩치가 실로 유연하게 움직였다. 마치 기계체조 선수라도 되는 것 같은 유연함.
-뻐엉!!
베이스를 밟은 왼쪽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의 다리를 찢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의 곡예였다.
“이런 미친?”
많은 사람이 선수의 기량을 타격과 수비라는 식으로 간결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실제로 타격에도 여러 가지 범주가 있는 것처럼, 수비 역시 여러 가지 툴이 존재한다. 랄로 가야르도는 분명 송구 능력이 형편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수비가 부족한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그가 싱글A에서 뛰던 시절 그에게 죽어라 송구 연습을 시켰지만, 결국 실패했던 한 코치는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랄로 가야르도? 아쉽지. 아쉬워. 젠장할. 그 썩을 자식은 대체 왜 어깨도 멀쩡한 게 공을 똑바로 못 던지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 솔직히 그 정도면 입스가 아닌가 의심이 갈 지경이야. 만약 그 자식이 1루로 똑바로 공만 던질 수 있었다면 우린 어쩌면 브룩스 로빈슨급이나 아드리안 벨트레급의 삼루수를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고.”
비교 대상이 무려 브룩스 로빈슨, 그리고 아드리안 벨트레다.
물론 그런 식의 허풍은 패시브 스킬 같은 이 바닥이었지만, 그래도 그 이름들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마이크 슈미트가 역대 최고의 삼루수라면, 그 두 사람은 역대 최고의 삼루 수비를 보여줬던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이다.
게다가 마냥 허풍만은 아닌 것이 그 코치의 말처럼 실제로 랄로 가야르도의 포구 능력은 보스턴의 모든 야수 가운데서 최고라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아웃!!”
심판의 손이 올라왔다. 그것은 비디오 판정까지 갈 필요도 없는 완벽한 아웃이었다.
-오, 랄로!! 그래, 난 네가 한 건 해줄 줄 알았다.
개막전에서 어처구니없는 송구 미스로 타자 주자를 1루에 내보냈던 기억은 이미 없었다. 필 니크로가 랄로 가야르도의 환상적인 수비에 연신 칭찬을 보냈다. 경기를 보는 보스턴 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단한데?”
“그러니까, 저 녀석 저 커다란 몸이 쫙 펴지는데, 그냥 와우, 와우네.”
“야, 근데 지금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이거 우리가 이렇게까지 좋아할 상황은 아니지 않냐? 이거 쟤가 저렇게까지 호수비를 할 필요가 없었던 단순한 상황 아니었냐?”
“아이, 뭐 그런 걸 따지고 그래. 그런 거 일일이 다 따지면 머리 아프다고. 일단 멋진 모습 나온 거에 환호나 하자고.”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세실리아 마토스의 마음에 아쉬움이 깃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거 그냥 평범한 어림없는 땅볼이 분명한데, 뭔가 이상하게 아까운 느낌이다.
성민이 랄로 가야르도에게 엄지를 치켜주었다. 덩치도 산만 한 녀석이 코를 쓱쓱 비비며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타석에 다저스의 3번 타자가 올라왔다.
양키스에 Mr. 양키스 리암 루카스가 있다면, 다저스에는 이 남자가 있다.
케빈 체임벌린.
돌이켜보던데 성민의 다저스 시절이 평탄했던 것은 성민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성민이 팀 내의 역학관계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이 야구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던 점도 주요했다.
케빈 체임벌린은 성민이 만났던 그 어떤 선수보다 캡틴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케빈 체임벌린과 리암 루카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리암 루카스는 이제 선수로서의 기량은 평범한 메이저리거 수준에 불과한 40대의 선수임에 반해, 케빈 체임벌린은 아직 전성기의 기량이 남아있는 37세의 선수라는 점이었다.
물론 이제 그는 33세, 34세 시절처럼 시즌 내내 날아다니지는 못한다. 하지만 지금은 4월 초, 아직 체력이 가장 쌩쌩하게 남아있는 시기다.
성민을 바라보는 케빈 체임벌린의 표정이 복잡했다.
본래라면 그의 계약과 성민의 계약이 끝나는 시기는 정확히 일치했다.
올해, 그리고 내년.
그에게 성민은 자신의 마지막 영광을 함께하고 싶던 투수였다. 그는 실제로 작년 다저스의 우승에는 성민의 활약이 매우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아쉬웠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메이저 15년 차의 베테랑이었다. 오늘 함께 웃으며 점심을 먹던 선수가 저녁에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되는 것 정도는 익숙하다. 심지어 그렇게 트레이드된 선수가 바로 다음 주 경기에 상대 팀의 유니폼을 입고 나오기도 한다.
그것에 비하자면 겨울에 트레이드되어 다음 해에 적으로 만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 저 친구 아직도 야구를 하고 있네?”
“자기, 케빈 체임벌린을 알아? 야구는 잘 모른다면서”
“내가 예전에 제우스의 유희라는 드라마를 촬영할 때 다저스의 경기를 관전하는 장면을 촬영한 적이 있었어. 그때 워낙 인상적이던 친구라서 얼굴은 기억하고 있지.”
“아, 그 두 번째 말아먹었다던 그 드라마?”
“크흠, 뭐 말아먹은 건 아니고. 그래도 나름대로 시즌 2까지 갔던 드라마라고.”
허버트 로렌스가 타석에 들어선 케빈 체임벌린을 알아봤다. 주변의 반응을 보니 그때 그 대단했던 신인은 아직도 선수로 남아, 이제는 경기장 전체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대단한 선수가 된 듯싶었다.
‘하긴, 그 당시에 야구를 잘 모르던 나도 기억할 수 밖에 없는 대단한 녀석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한층 더 흥미로워졌다.
과연 성민은 얼마나 대단한 야구 선수일까? 그는 빈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가 목격했던 성민의 연기에 대한 재능은 진짜였다. 그냥 연기해보지 못한 일반인 치고 잘한다. 뭐 그런 느낌이 아니다. 허버트 로렌스가 보는 성민은 비언어적인 표현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천재였다.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성민이 첫 번째 공을 준비했다.
-저 녀석 당장 은퇴해도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 선수다.
‘저도 압니다.’
-뭐, 그래도 여전히 긴장 같은 건 전혀 하지 않는구나.
‘상대 선수 커리어만 가지고 긴장하는 애송이 시절은 진즉에 지났죠. 당장 은퇴해도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 선수라는 말은 이제 당장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선수라는 말의 동의어 아닙니까.’
-앞으로 2, 3년은 멀쩡할 녀석이야.
‘하지만 그래봤자 전성기의 케빈 체임벌린과 비교하면 별것 아니죠.’
필 니크로가 성민의 대답에 만족했다. 아니, 대답하는 성민의 신체 반응에 만족했다. 지금 성민은 방심한 것이 아니었다. 상대방이 대단한 것을 알지만, 그것에 먹히지 않고 ‘그게 뭐 어때서?’ 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무장할 때의 모습이다.
그것은 필 니크로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마운드 위 투수의 모습이었다.
초구.
가장 좋은 고속의 너클볼.
케빈 체임벌린이 가장 좋은 선택을 했다.
-부웅!!
“스트라잌!!”
물론 그 가장 좋은 선택이 가장 좋은 결과로 이어지리라는 법은 없었다. 시원한 헛스윙. 잠시 타석에서 물러난 케빈 체임벌린이 15년간 쌓아온 루틴을 수행했다.
확실히 더러운 공이었다.
여기로 오는 것 같다고 확신하고 방망이를 휘두르면 거기랑 상관없는 곳으로 날아간다. 뭐 심리전 같은 것도 소용없다. 던지는 투수도 받는 포수도 그 공이 거기로 갈 것이라 확신할 수 없는 공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일종의 찍기다.
괜히 눈치를 보지 말고 내가 휘두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스윙으로 방망이를 휘두른다. 내가 맞아떨어진다면 다저 스타디움은 끓어오를 것이고, 아니라면?
‘그래도 최소한 2번은 더 기회가 남는 거지.’
케빈 체임벌린이 다시 타석에 섰다.
두 번째.
마찬가지로 술에 취한 것처럼 날아오는 너클볼.
하지만 이번 케빈 체임벌린의 선택은 가장 좋은 선택이 되지 못했다. 힘차게 돌아가던 그의 방망이가 멈췄다.
-뻐엉!!
“스트라잌!!”
느린 너클볼.
케빈 체임벌린의 타이밍이 완벽하게 어긋났다.
‘큭.’
사실 느린 볼을 던지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물론 그냥 느리게 공을 던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빠른 공을 던질 때와 똑같은 폼. 그리고 똑같은 타이밍으로 던지는 느린 공을 말하는 것이다.
애초에 휘두르는 동작이 같은데 공이 더 느려진다? 이것이 말이 되려면 동작은 같으면서 공에 실리는 힘은 더 적은 모순이 생겨야 한다. 그리고 체인지업이라는 구종은 그 모순을 해결한 위대한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성민의 경우는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민은 그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본래라면 느리게밖에 던질 수 없는 너클볼을 빠르게 던지려고 노력한 결과, 빠르게 던질 수‘도’있게 된 셈이다.
정확히는 팔꿈치의 튕김에 차이를 두는 것인데,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봤을 때, 성민의 느린 너클볼은 폼만으로는 그 구분이 지극히 어렵다.
작년 케빈 체임벌린은 성민의 너클볼을 그 움직임으로 구분했다. 물론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15년간 쌓아올린 그의 경험. 그리고 타고난 그의 재능이 만들어 낸 감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케빈 체임벌린의 감각은 성민의 너클볼을 도저히 구분할 수 없었다.
혼란.
그 혼란 속에서 성민의 속구가 케빈 체임벌린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부웅!!
‘아!! 속구가 훨씬 높은 곳으로 들어온다고 했는데!!’
“스트라잌!! 아웃!!”
삼구삼진.
다저스의 오랜 자존심이 그들의 홈에서 허무하게 물러났다.
< 라이벌(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