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벌(4) >
프로의 세계에서 라이벌이란 조금 묘하다.
인연이 있어 스스로 승부욕을 불태우는 경우도 있지만, 딱히 인연이 없음에도 그 성적만으로 언론에서 라이벌을 만들어 주는 경우도 있다.
에드 맥밀란과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경우는 후자였다.
처음부터 스타일은 완전히 달랐다. 에드 맥밀란이 강력한 타자로 점차 포수가 갖춰야 할 수비적인 기량을 갖춰나갔다면,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처음부터 포수 그 자체였다.
아마 90년대였다면 둘은 라이벌이라고 칭해질 것도 없이 에드 맥밀란의 완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2034년인 지금. 현대의 각종 관측장비가 넘쳐난 덕분에 육안만으로는 구분하기 힘든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장점들이 객관적으로 드러났다. 그리하여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에드 맥밀란의 강력한 라이벌이 됐다.
대부분 위대한 선수들이 그렇듯 그들은 호승심이 있었다. 그것은 최소한 내 분야에서는 내가 최고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언론이 만든 라이벌은 곧 진짜 라이벌로 발전했다.
“흥, 나도 스프링 트레이닝 처음부터 전담으로 훈련했다면 피똥을 쌀 것까진 없었을 거야. 주전 포수로 시즌을 치르면서 간간이 여유 시간에 따로 훈련을 하다보니 그렇게 된 거지.”
“아, 그렇구나. 처음부터 너클볼을 전담시키기에 에드 너의 미트는 좀 불안했나보지?”
“그것보다는 타격에 더 집중해달라는 팀의 부탁이었지. 누구랑 다르게 나는 매년 30홈런쯤 기대할 수 있는 거포거든.”
“하긴, 포수가 수비가 안 되면 타격이라도 잘해야지. 안 그래?”
에드 맥밀란이 대답 대신 방망이를 움켜쥐고 타석에 섰다.
그의 라이벌은 등 뒤에서 멈추지 않고 입을 터는 에두아르도 크루즈였지만, 지금 상대해야 할 적수는 마운드에 선 성민이었다.
-신경 쓰이냐?
‘뭐가요?’
필 니크로의 시선이 다저스의 덕아웃으로 향했다.
그의 전성기 시절.
당시에도 리그에는 역사에 이름을 새길만한 투수가 몇 존재했다. 그 직후 세대에서 워낙에 압도적인 투수들이 넷이나 등장하는 바람에 조금 묻힌 감이 있었지만, 시대를 보정해서 본다면 그들 역시 랜디 존슨이나 그렉 매덕스, 페드로 마르티네즈 같은 투수에 뒤지지 않았다.
톰 시버, 밥 깁슨, 스티브 칼튼.
당시 필 니크로는 그런 위대한 투수들을 상대 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차라리 그가 아예 그들과 급이 다른 투수였다면 그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남들이 뭐라고 하건 간에 필 니크로 본인은 스스로를 그들에 뒤지는 투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기고 싶었다.
그렇기에 필 니크로는 성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투수로서 저런 피칭을 보고 어떻게 피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놀랍게도 딱히 피가 끓어오르지 않는 투수도 존재했다.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 잘 던지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게다가 저 녀석이 잘 던져서 우리 점수 안 나는 게 좀 힘들긴 하지만, 그게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제 상대는 방망이 들고나오는 녀석들이고 제가 해야 할 일은 점수를 안 주는 일인데요.’
-그래도.
‘저 녀석은 저 녀석 스타일이 있는 거고, 전 제 스타일이 있는 거죠. 게다가 라이벌이니 뭐니해도 결국 오늘 경기 어느 팀이 이기느냐로 승패가 결정 나는 라이벌도 아니잖아요. 짧아도 1년, 뭐 길게 본다면 한 20년쯤 지나야 누가 더 대단한 투수였다 결판나는 거 아닙니까? 야구는 원래 그런 스포츠죠.’
-그래, 야구는 원래 그런 스포츠지.
야구는 원래 그런 스포츠다.
성민이 첫 번째 공을 준비했다.
에드 맥밀란이 작년 내내 잡기 위해 그토록 고생했던 잘 던진 빠른 너클볼. 고속 너클볼 주제에 회전수는 고작 1.87회. 마치 춤을 추듯 날아오는 그 공에 에드 맥밀란이 방망이를 가져다 댔다.
-딱!!
3루 파울라인을 넘어 구르는 파울볼. 에드 맥밀란이 가볍게 혀를 찼다.
역시 까다롭다. 하지만 해볼 만하다. 다저스에 있던 시절의 성민은 대단한 투수였다. 그리고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스턴과 다저스의 수비는 다르다. 저 녀석들은 아주 엉망진창이다. 방망이의 중심을 맞출 필요도 없다. 질 나쁜 타구로도 충분히 출루할 수 있다.
두 번째.
-부웅!!
“스트라잌!!”
바깥쪽 낮은 코스. 심지어 바닥을 한번 내려찍는 빠른 너클볼.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안정적으로 공을 받아냈다.
타석에서 잠시 물러난 에드 맥밀란이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에두아르도 크루즈. 역시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녀석이다. 물론 에드 맥밀란도 낙차 큰 커브를 사용하는 투수들이 던진 원바운드된 공을 받아내는 것 정도는 그럭저럭 잘 해낸다.
하지만 이건 이야기가 다르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너클볼. 애초에 원바운드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공이 아니다. 심지어 존 밖으로 빠진 공이다. 이걸 저렇게 스무스하게 잡아낸다고? 실로 짐승 같은 반사신경이다.
볼카운트 0-2.
에드 맥밀란이 다시 타석에 섰다.
컨디션이 괜찮은 날의 성민을 공략하는 방법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힘있게 공을 두들기는 것이다. 휘두르다 보면 제대로 맞을 때도 있고, 그러면 넘어갈 때도 있다.
하지만 오늘 그가 공략해야 할 것은 성민이 아니었다.
보스턴 레드삭스.
성민의 등 뒤에서 글러브를 끼고 있는 저 애송이들이다.
세 개의 공이 더 날아왔다. 골라내고 쳐내고 골라냈다. 마지막 속구의 경우는 정말 아슬아슬했다. 에두아르도 크루즈 녀석이 손장난을 좀 쳤지만, 심판이 받아주지 않았다. 역시 아무리 녀석이라도 본래 사용하던 미트가 아닌 너클볼용 미트를 쥐고 100% 기량으로 프레이밍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
볼카운트 2-2.
여섯 번째.
느린 너클볼.
에드 맥밀란의 방망이가 그 공을 두들겼다.
낮게 깔린 타구.
루시 알베리가 서둘러 타구를 쫓았다.
반응속도도 움직임도 나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나빴던 것은 그의 판단이었다. 그냥 그대로 세 걸음 대각선 앞으로 이동하여 팔을 뻗어 공을 잡고 1루에 공을 뿌려야했다. 하지만 그는 안전하게 네 걸음을 대각선 뒤로 이동하여 몸의 중심으로 공을 잡았다.
-뻐엉!!
“세이프!!”
멍청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에러로 표기되진 않았다. 내야 안타. 필 니크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워낙 막장인 상황들을 많이 봐왔기에 이 정도로 흥분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래 내야 땅볼을 놓치고 놓쳐서 3루까지 가는 꼴도 종종 봐왔는데, 발이 그리 빠르지 않은 타자가 내야 안타를 치는 것 정도가 뭐 어때서.
에드 맥밀란이 재수 없는 미소를 띤 채 홈플레이트 너머 에두아르도 크루즈를 응시했다. 타석에 다저스의 5번 타자가 올라왔다.
그리고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 에드 맥밀란이 세 걸음의 리드폭을 가지고 갔다.
널리 알려진 너클볼 투수의 약점은 도루 저지다. 애초에 너클볼의 특징은 공이 느리고 포구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에드 맥밀란의 발이 빠른 것은 아니지만 성민의 너클볼 타이밍에 정확하게 달린다면 도루를 막는 것은 어렵다. 실제로 작년 성민의 전담 포수였던 마이크 올리버 역시 상당히 많은 도루를 허용했다.
초구
빠른 너클볼.
-부웅!!
“스트라잌!!”
에드 맥밀란이 타이밍을 헤아렸다. 성민의 투구폼은 누구 못지않게 익숙하다. 2루를 훔칠 수 있을까? 가능할 것 같다.
두 번째.
속구.
-뻐엉!!
“스트라잌!!”
아, 이건 안 된다. 마르타 블랑코나 페데리코 수만큼 빠른 발이라면 또 모를까. 에드 맥밀란 본인의 발로는 도저히 무리다.
에드 맥밀란이 힐끔 성민을 바라봤다.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다.
당연하다. 성민은 에드 맥밀란의 스타일을 잘 알았다. 평소 그의 지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에드 맥밀란 본인이 도루를 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지.
세 번째.
2구 연속 속구를 던질 리는 없다. 이번에 달린다. 세 걸음의 리드폭은 바뀌지 않았다. 바뀐 것은 몸의 중심. 그의 중심이 조금 더 2루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뻐엉!!
에드 맥밀란이 자신의 몸을 1루로 날렸다.
에드 맥밀란의 생각처럼 성민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에드 맥밀란은 합리적인 남자였다. 성민의 공을 받고 싶다는 욕심이 있음에도, 자신의 손가락 가치와 마이크 올리버의 능력을 고려하여 그 욕심을 참아낼 만큼 말이다.
보통의 경기였다면 그는 절대 도루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저스의 타선은 튼튼하고 에드 맥밀란의 몸값은 높았으며, 시즌 전체를 봤을 때 섣부른 도루 시도보다 그냥 남이 치는 만큼 움직이는 것이 팀을 위해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얽히는 순간에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언론이 만들어 낸 라이벌 관계는 어느새 본인이 더 크게 관심을 갖는 라이벌 관계로 발전했다. 게다가 그는 성민을 잘 알고 있었다. 기세를 탄다면, 그리고 수비가 좀 정상적으로 움직여 준다면 설사 다저스의 핵 타선이라고 해도 너끈히 막아낼 수 있는 대단한 투수다.
흔들린 합리성. 그리고 1점에 대한 욕심. 충분히 달릴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성민의 시선은 에드 맥밀란에게 향하지 않았지만,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시선은 에드 맥밀란을 살폈다.
“아웃!!”
아주 약간.
2루를 향하고 있던 몸의 중심이 많은 것을 갈랐다. 1루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전력으로 던진 성민의 견제구는 그 방향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속도만큼은 훌륭했고, 1루의 랄로 가야르도는 포구에서 만큼은 어디에서 뒤지지 않는 일루수였다.
경기가 계속됐다.
보스턴의 야수들은 종종 실책을 했다. 혹은 실책이 아니더라도 분통이 터질만한 멍청한 수비를 했다. 게다가 다저스의 선발 투수는 놀라운 역투를 선보였다. 그는 마치 오늘 경기를 혼자 끝내겠다는 기세로 공을 뿌려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민은 흔들리지 않았다.
고작 그런 일에 흔들리기에 성민의 경험은 너무 깊고 넓었다.
다저스의 위대한 선발 투수는 압도적인 피칭을 선보였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간간이 그의 공을 두들기는 타자가 있었다.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과거 성민이 있었던 어느 팀은 별로 위대하지 않은 선발 투수가 별로 압도적이지도 않은 피칭을 선보였을 때도 무기력하게 당했던 적도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한 가지.
[5회 초, 보스턴 레드삭스의 공격. 투아웃에 주자 1루. 타석에 김성민 선수가 올라옵니다.]
[3회 초. 첫 번째 타석에서는 아쉬운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던 김성민 선수!! 보통 투수가 타석에 들어오면 전혀 기대가 안됩니다만 이상하게 김성민 선수는 좀 다른 느낌이네요.]
[아무래도 작년 보여줬던 모습이 있으니까요.]
-그래, 마린스보단 낫다. 마린스보단. 마린스 시절에는 타자 놈들이 멍청하면 그냥 속만 터져야 했는데, 그래도 지금은 답내친이 되잖아.-
-답내친?-
-‘답답해서 내가 친다.’의 준말인데, 아무리 그래도 상대가 디아고인데 답내친이 될까?
-개인적으로 보스턴 하위 타순보단 훨씬 낫다고 본다. 작년에 성민이 평가가 어지간한 전문 타자만큼 대단하다는 평가였잖아. 성민이 쟤 빠따는 찐임.-
인터리그.
오늘 경기가 열리는 구장은 다저 스타디움이며, 인터리그는 홈구장의 룰에 따른다.
내셔널리그에는 지명타자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작년 성민은 실버 슬러거를 따냈던 리그 최고의 공격력을 갖춘 투수라는 점이었다.
< 라이벌(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