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벌(1) >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디아고 헤밍턴 선수, 1회 초, 보스턴을 상대로 두 타자 연속 삼진입니다.]
[바로 어제 니콜라이 코스터 선수를 상대로 제법 괜찮은 타격감을 보여줬던 제롬 스튜버츠 선수에 이어 랄로 가야르도 선수까지!! 디아고 헤밍턴 선수, 과연 작년의 사이 영 위너 다운 모습입니다.]
작년 디아고 헤밍턴은 커리어 하이의 성적을 기록했다. 평균자책만 따진다면 그보다 낮았던 적도 있지만, 세부 지표까지 다 따졌을 때, 그의 커리어 하이는 분명 작년이었다.
사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작년 그의 나이는 26세. 투수로 막 절정기에 접어드는 나이였다. 슬슬 전설적인 시즌을 하나 찍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사람들은 작년 그의 성적을 그저 자연스러운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조금 달랐다.
작년 그의 놀라운 성적에는 성민이라는 강력한 경쟁자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경쟁심이 대단한 선수였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눈에 보이는 같은 팀의 사이 영 경쟁자는 일종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오늘.
그의 시선이 저쪽 덕아웃에 앉아있는 성민을 스쳤다.
어제 경기만 봐도 알 수 있다. 보스턴의 수비진은 다저스와 비교하면 형편없다. 아니 메이저 어느 팀과 비교해도 부족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친구는 여전히 여유롭다.
사실 지난겨울 성민의 선택은 디아고 헤밍턴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선택이었다.
우승을 할 수 있는 팀을 버리고 이상한 팀을 선택하다니. 디아고 헤밍턴을 비롯한 동료들이 몇 번이나 말렸지만, 성민은 뜻을 꺾지 않았다.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보여주고 싶다.
만 27세.
신체적으로는 이제 절정기. 기술적으로도 이제 완숙의 경지에 올라간 메이저리그 최고의 에이스가 라이벌 앞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뽐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세 타자 연속 삼진!! 1회 초. 디아고 헤밍턴이 삼진 세 개를 기록하며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 짓습니다.]
성민의 차례가 돌아왔다.
익숙한 다저스의 마운드. 바로 눈앞에 보이는 포수 뒤편 관중석에는 작년에 4, 50번씩 경기를 직관하러 왔던 익숙한 팬의 얼굴들이 보였다.
-짝짝짝
성민과 LA 다저스가 함께한 시간은 고작 1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성민은 작년 우승의 주역이었다. 게다가 트레이드 과정에서 트러블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저스의 팬들은 기꺼이 성민을 위해 박수를 보내주었다.
성민이 잠시 모자를 벗어 그들의 박수에 응답했다.
[참 훈훈한 광경이네요. 사실 고작 1년밖에 뛰지 않은 선수에게 이렇게 박수를 보내주는 건 흔치 않은 일이거든요.]
[그건 그만큼 김성민 선수가 다저스 팬들에게 좋은 선수였다는 방증이겠죠.]
타석에 다저스의 1번 타자 마르타 블랑코가 올라왔다.
-기억하지? 저 녀석 작년에 선두 타자 홈런만 9개를 쳤었다.
‘당연히 기억하죠. 그중에 제 경기에서 쳤던 게 2개나 되잖아요.’
-같은 팀일 때는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지.
‘그건 그렇죠. 하지만 저쪽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마르타 블랑코가 침을 삼켰다.
성민의 말처럼 필 니크로가 다저스를 바라보며 느끼는 같은 팀일 때 든든하던 녀석들이 적으로 만나니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는 그 감정을, 마르타 블랑코 역시 느끼고 있었다.
“성민이랑 디아고? 글쎄, 솔직히 난 적으로 만났을 때 더 무서운 쪽은 성민이라고 생각해.”
“마르타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뭐,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디아고도 물론 좋은 투수지만 성민은 단순히 좋은 투수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찝찝함이 있단 말이지.”
“맞아. 디아고랑 경기 뛸 때는 함께 경기를 뛴다는 느낌이라면 성민은 우리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느낌이랄까?”
“맞아!! 바로 딱 그 느낌이야. 페데리코 너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구나.”
디아고와 성민.
둘 다 좋은 투수다. 하지만 결이 조금 다르다.
둘 중 하나. 누구와 함께 뛰고 싶은가를 선택하라면 디아고 쪽이다. 하지만 누구를 더 적으로 두기 싫은가를 고르라면 단연 성민이다.
그리고 오늘 성민은 그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여실하게 증명하기 시작했다.
-뻐엉!!
“스트라잌!!”
초구 바깥쪽으로 완전히 빠질 듯하다가 살짝 걸치듯 들어온 고속 너클볼.
마르타 블랑코가 심판을 잠시 바라봤다.
물론 심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젠장.’
명백하게 빠진 공이다. 코스를 넓게 보겠다는 의미일까?
그럴 리가.
바로 직전 디아고 헤밍턴의 경우 이 정도 코스에는 손을 올려주지 않았다. 여기가 보스턴 홈구장도 아니고, 디아고 헤밍턴이 신인도 아닌 이상에서야 디아고에게 더 짜게 판정을 줄 리가 없다.
이건 역시 에두아르도 크루즈.
저 괴물 같은 포수의 능력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역시 에드 맥밀란과 함께 리그 최고의 포수, 명예의 전당급 포텐셜 소리를 듣는 포수답다.
너클볼을 그냥 받는 거로 모자라서 프레이밍을 할 정도의 여유라니.
마르타 블랑코가 불만을 표하는 대신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괴물 같은 능력에 경의를 표했다. 뭐, 존 판정에 컴퓨터를 사용해야 한다는 선수들도 많았지만, 마르타 블랑코는 심판을 속이는 능력도 선수의 역량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게다가 에드 맥밀란이 너클볼을 받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개고생을 했고, 그렇게 개고생을 했음에도 여전히 쩔쩔맨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정도 묘기라면 누구라도 인정해줄 수밖에 없다.
물론 그걸 인정했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마르타 블랑코가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성민과 많이 부딪혀본 팀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팀들인 다이아몬드백스, 자이언츠, 로키스, 파드리스였다.
하지만 성민을 가장 잘 아는 타자들은 그 팀 소속의 타자들이 아니었다. 성민을 가장 잘 아는 타자들은 그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LA 다저스 소속의 타자들이다.
타자와 투수의 싸움은 많이 마주치면 마주칠수록 타자에게 유리하다.
마르타 블랑코와 성민의 싸움 역시 마찬가지다. 성민의 고속 너클볼 하나에 마르타 블랑코가 대략적인 감을 잡았다.
게다가 상성적인 면을 볼 때 마르타는 성민을 상대하기 매우 좋은 타자다. 일단 어떻게든 공을 건드릴만한 컨택 능력이 있고, 1년에 20개가 넘는 홈런을 만드는 파워가 있었으며, 설사 내야 땅볼이라고 해도 높은 확률로 꾸역꾸역 1루까지 살아나갈 수 있는 빠른 발이 있었다.
두 번째.
마르타 블랑코가 성민의 공을 향해 방망이를 뻗었다.
-부웅!!
“스트라잌!!”
속았다.
빠른 너클볼.
그것도 존 밖으로 완벽하게 빠져나가는 빠른 너클볼이었다. 초구보다 공 두 개 가깝게 더 빠졌다.
‘오늘 컨디션이 좋은가 보네.’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것이, 보고 치기에는 조금 빠른 속도로 들어오는 절묘한 공이었다. 성민의 말에 따르자면 이건 잘 던진 너클볼이다. 작년만 하더라도 10개를 던져 2, 3개 정도 나오던 공이다. 2개 연속 이런 공이 들어오다니.
이건 아무리 마르타 블랑코라고 해도 그냥 존 안으로 공이 들어오길 바라며 방망이를 휘두르든지, 아니면 존 밖으로 나가길 기도하며 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마르타 블랑코가 세 번째 공을 기다렸다.
그래, 설마 3구 연속으로 그런 공이 오지는 않겠지.
이번에도 마르타 블랑코의 생각은 옳았다.
몸쪽 높은 코스. 88.7마일의 과감한 속구.
마르타의 본능이 소리쳤다.
빠지는 공이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이렇게 말했다.
기회다!!
설사 빠지는 공이라고 해도, 쳐낼 수 있다면 쳐내는 것이 좋다. 성민의 너클볼은 무조건 운에 맡겨야 하는 공이다. 실투가 들어오든지, 아니면 요행이 잘 맞아서 안타가 되든지. 하지만 속구는 다르다. 존에서 좀 빠지는 공이라고 해도 못 칠 이유가 없다.
마르타 블랑코의 방망이가 힘차게 움직였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 마르타 블랑코의 이성은 이번에도 옳았다. 분명 확률적으로 봤을 때 공략해야 하는 것은 성민의 하이 패스트볼이었다.
다만 그의 이성 속에 한 가지 고려되지 못했던 것은 그가 성민을 이해하는 만큼, 성민 역시 마르타 블랑코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투수와 타자의 싸움은 많이 마주치면 마주칠수록 보통은 타자 쪽이 유리하다.
그리고 성민과 세상 대부분 사람의 싸움은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 교환할수록 보통은 성민 쪽이 유리하다.
마르타 블랑코가 생각했던 것보다 반개 더 높은 곳을 지나가는 88.7마일의 빠른 공.
그의 방망이가 그 공의 밑동을 두들겼다.
-딱!!
높게 치솟은 타구.
쓸데없이 많이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공을 던진 성민이 정확히 여섯 걸음을 움직였다.
“아웃!!”
선두 타자 내야 뜬공.
마르타 블랑코가 쓴웃음을 지으며 타석에서 물러났다.
역시 성민도 놀고 지내지만은 않았다.
“속구가 한층 더 좋아졌어.”
“속구가? 구속은 1회 초라는 거 고려해도 좀 느려진 것 같은데?”
“구속이야 뭐 89마일이나 88마일이나 그게 그거지. 그보다 공의 궤적이 이전보다 훨씬 덜 떨어지는 것 같아.”
“오케이. 기억해두지.”
“아, 그리고 궤적 자체도 조금 묘한 것 같아.”
“묘하다고? 어떻게?”
“그거야 이제 공 하나 봤는데 뭐라고 말하기 힘들지. 하여간 주의하라고.”
“젠장, 마지막 그건 차라리 이야기 안 해주는 게 나았을 것 같은 정보잖아.”
현실은 게임이 아니다.
게임의 캐릭터라면 새로운 기술을 익혀도 이전의 기술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새로운 기술을 익힌다는 것은 그 기술에 몸이 익숙해진다는 의미다.
같은 달리기라지만 장거리 달리기 선수의 몸과 단거리 달리기 선수의 몸이 다른 것처럼 빠른 공을 던지기 위해 튜닝된 몸과 너클볼을 던지기 위해 튜닝된 몸은 조금 다르다.
세부적으로 필요한 근육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꼭 나이만이 아니더라도 성민의 구속은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나빠지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세 살 먹은 아이도 그 중요성을 알고 있는 회전수. 더 좋은 너클볼을 던지기 위해 강화된 악력과 섬세한 손가락의 감각이 속구의 회전수를 올려주었다.
게다가 손가락 간에 힘의 밸런스 역시 미세하게 달라졌다.
그리고 이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같은 그립으로 던진다고 해도 공의 회전은 투수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 유명한 마리아노 리베라의 커터 역시 포심 그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커터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유별나게 강력한 그의 특별한 중지였으니까.
물론 성민의 악력이 마리아노 리베라의 그것처럼 포심을 커터로 변신시킬 만큼 대단했다는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성민은 그쪽으로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타격은 타이밍이며, 피칭은 그 타이밍을 뺏는 일이다. 그리고 그 타격의 예민한 타이밍을 망가트리는 데는 아주 약간의 오차만으로도 충분했다.
-딱!!
빗맞은 땅볼.
보스턴의 유격수 루시 알베리가 공을 향해 돌진했다.
< 라이벌(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