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부터 끝판왕(3) >
허버트 로렌스가 성민의 손을 꽉 붙잡았다.
섹시 아이콘 소리나 들어가며 지냈던 20년 전의 허버트 로렌스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물간 배우 소리를 들어가며 바닥을 나뒹굴었던 지금의 허버트 로렌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연기에서 정말 어려운 순간은 외운 대사를 내뱉는 순간이 아니다.
누군가가 대사를 내뱉는 순간, 아무 말 없어 서 있어야 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물론 감정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대사만이 아니다. 하지만 대사는 무언가를 설명하기에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배우는 대사가 없다고 해서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조이!!’라는 그 단 한 마디.
그 이야기를 내뱉는 성민의 표정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십오 년이 넘는 방황 속에서 진짜 연기를 연습해왔던 그는 그 표정에 담긴 그 이야기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감탄했다.
또한, 허버트 로렌스는 오케이 사인이 나온 직후 순수 그 자체로 돌아온 성민의 얼굴에서 또 한 번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저 사내는 어떻게 저 어린 나이에 저런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나이가 서른하나라고?”
“네.”
물론 알고 보니 그리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허버트 로렌스 본인이 헐리웃의 섹시 아이콘 소리 듣던 그 나이 즈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놀라운 것은 놀라운 것이다. 심지어 다른 배우들처럼 전직 야구 선수에 현직 배우가 아닌, 정말로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야구 선수라고 했다.
“터무니없군. 이봐, 그러지 말고 이번 기회에 연기자로 나서는 건 어떤가? 내가 보기에 자네 진짜 적성은 연기야.”
“죄송하지만 제 적성은 야구라서요. 이래 봬도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원자거든요.”
성민의 이야기에 필 니크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허, 대체 야구를 얼마나 잘하길래.”
허버트 로렌스의 이야기에 조이 제임슨이 끼어들었다.
“작년에 사이 영 상 2위였어요. 거기다가 월드시리즈 MVP에 투수 실버슬러거였고요. 저희로 치면 골든글러브는 타고 에미상은 아깝게 2위 한 느낌 정도?”
“대단하군. 사실 야구라면 다저스 경기에 몇 번 가본 게 전부라 실감이 확 오는 건 아니지만, 말만 들어도 얼마나 대단한지 알 것 같아.”
“그러면 말만 들어보지 마시고, 혹시 시간 되시면 모레 제 선발 등판 경기 한 번 보러 오세요.”
“모레?”
“네, 안 그래도 이번에 다저스 원정이라서요.”
성민이 허버트 로렌스에게 미리 준비해둔 표 두 장을 건넸다. 포수의 뒤편 아주 좋은 자리다. 보통이라면 원정팀인 그가 구하기 힘든 표였지만, 작년 다저스에서 1년을 생활한 짬밥은 어디로 가지 않았다.
다저스의 클러비들은 제법 후하게 팁을 줬던 성민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성민의 좋은 점은 존중이었다. 성민은 그들을 단순히 팁으로 부려먹는다기보다, 부탁하고 그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는 감정과 함께 팁을 전달한다는 느낌을 클러비들에게 주었다.
“고맙군. 두 장이면 조이와 함께 오라는 뜻인가?”
“에이, 설마요. 당연히 조이 거는 따로죠. 한 장만 줄 겁니다. 허버트 씨는 같이 오실 분 많잖아요?”
“뭐, 그야 그렇지만. 그런데 설마 지금 이 늙은이를 경계라도 하는 건가?”
“어휴, 세상에 늙은이라는 말이 이렇게 안 어울리는 분은 또 처음이네요.”
허버트 로렌스가 성민의 립서비스에 기분 좋게 웃었다.
물론 본인이 잘생긴 건 알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잘생긴 녀석이 해주는 칭찬은 더 짜릿하다. 허버트는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성민이라는 녀석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좋아. 연기보다 잘한다는 그 야구. 내가 직접 보러 가도록 하지.”
“실망하진 않으실 겁니다.”
필 니크로가 잠시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아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지금 보스턴 애들 데리고 다저스 막는 건 전성기의 내가 아니라 스티브 칼튼이나 밥 깁슨이 마운드에 서도 무리일 것 같단 말이지.
***
사실 이번 시트콤 출연은 성민이 제법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었다. SNS 등을 통해서 유명인들과 친하다는 것만으로 유명해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을까?
사실 특정 쇼에 카메오로 나가는 것은 성민 정도의 위치라면 이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부족했다.
그리고 그때 마침 그와 침대를 함께 쓰는 조이에게서 좋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야구 선수 김성민이라는 역할로 시트콤에 등장할 수 있다?
심지어 그 시트콤이 이미 흥행 중인 시트콤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문제는 한 가지.
-겨울의 절반 이상을 촬영에 사용해야 한다라······.
“뭐, 일이 잘 풀렸을 때 이야기긴 하지만요.”
시트콤이 촬영되는 기간은 보통 11월에서 4월. 그리고 5월부터 8월까지 방영이 된다. 게다가 성민의 경우 2월 중순부터 스프링 트레이닝을 들어가야 했다.
뭐 그 부분이야 성민이 정말 필요하다면 우선으로 촬영을 해주는 식으로 해결이 되겠지만, 어쨌거나 그것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시간은 적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잘 풀려야 한다는 부분은 조금도 걱정이 안 된단 말이지. 왠지 그냥 알아서 잘 풀릴 것 같아.
“뭐,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대기하는 시간 중에도 기초적인 체력단련은 계속할 수 있고, 촬영 시간 자체는 그렇게 길지 않을 거예요. 조이도 인기가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아직 조연에 불과하고, 저도 잘 풀려봤자 조연의 남자친구역이잖아요. 게다가 애초에 계획도 경기 장면 같은 거 구단 협조 구해서 조금씩 사용할 예정이라고 하니까. 실제 촬영은 그리 많지 않겠죠.”
-역시 그렇겠지?
그리고 같은 시간.
“PD님. 무조건 계약서에 도장 찍어 주세요. 5회? 아니, 7회 분량으로요.”
“그렇게나 출연을 시키게?”
“당장 에피소드 뽑아낼 것들이 무궁무진해요. 안 그래도 다음 시즌에 허버트 연애 시작시킬 계획이었잖아요. 그러면 조이가 너무 붕 뜨는 느낌이었는데 그거 해결하기에 딱 좋아요. 일단 이번 시즌 방영 나가고 반응 봐야 알겠지만, 느낌이 아주 괜찮은 친구예요. 뭐 시즌 방영되고 시청자 반응 보고 이야기해도 나쁠 건 없지만 지금 잡아두는 게 싸게 먹힐 겁니다.”“동양인에 야구 선수라고 걱정할 땐 언제고. 일단 알겠어. 하지만 신인이라고 해도 본업이 있는 친구라서 그렇게 많은 분량 출연이 될지는 모르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말고.”
***
1차전.
보스턴과 다저스의 4선발 맞대결.
사실 선발 투수의 기량만 따지자면 그리 큰 차이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보스턴 쪽이 근소 우위라고 봐도 무방했다.
보스턴과 다저스 양 팀 모두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선발 유망주들을 4선발로 사용하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다저스의 선발 유망주인 니콜라이 코스터 역시 제법 괜찮은 유망주였다. 하지만 유망주 풀로만 따지자면 다년간 꼴찌를 하고, 즉전감까지 팔아가며 유망주를 끌어모은 보스턴을 이길 수가 없다.
분명 보스턴의 4선발인 알리시오 루비오 쪽이 미세하게나마 더 좋은 투수다. 다만, 문제는 그래봤자 둘 다 아직 메이저에서 선발로 뛰기에는 부족한 유망주들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딱!!
얻어맞고.
[1루 주자 달립니다!!]
“세이프!!”
도루 당하고.
-딱!!!
[큼지막한 타구!! 담장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넘어갔습니다!!]
또 얻어맞았다.
양 팀의 타격은 의외로 크게 차이가 없었다. 물론 다저스 쪽이 조금 더 노련하고 밸런스 맞는 타선이긴 했지만 그래도 보스턴 역시 제법 열심히 다저스의 4선발인 니콜라이 코스터를 두들겼다.
그들의 결정적 차이는 누구나 예상했듯이 수비였다.
“와, 시발. 저거 뭐야? 저걸 잡는다고?”
“야, 쟤 대체 뭐 하는 선수야?”
“어휴, 기억 좀 해라. 작년에 올스타전에 나왔던 유격수잖아. 페데리코 수.”
“올스타전? 거기 나온 선수들을 어떻게 다 기억하냐. 우리 지구 선수들 이름도 다 기억 못 하는 판국에.”
경기를 지켜보던 보스턴의 팬들이 문화충격을 받았다. 물론 자기 팀의 수비가 좀 부족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른 팀이라면 너끈히 잡아낼 만한 공도 매일 놓쳐대는데 그걸 모르면 바보다.
하지만 다저스의 수비는 그런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특히 저 키스톤.
페데리코 수와 마르타 블랑코는 마치 철벽처럼 자신들의 근처로 지나가는 모든 타구를 쏙쏙 잡아냈다.
당연히 안타겠지 하는 공이 그들의 글러브로 쏙 들어갔다.
그래, 거기서 끝이라면 참을 수 있다. 세상에는 괴물 같은 수비수들도 존재한다. 하필 그 괴물 중 둘이 저기에 서 있는 건 속이 쓰리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다.
보스턴 팬들이 못 참을 것 같았던 부분은 다른 부분이었다.
“아!!!”
당연히 잡겠지 하는 공들이 뒤로 쑥쑥 빠진다.
평소 평범한 수비를 보고 보스턴의 수비를 볼 때는 그저 좀 못하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선수도 사람인데 실수할 수도 있지. 뭐 그런 생각도 있었다. 다른 팀도 그 정도 에러는 가끔 하니까. 그리고 저건 애초에 못 잡을 공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저스는 그 애초에 못 잡을 공도 다 잡아낸다. 대비가 너무 극명해졌다.
투수로의 기량은 분명 보스턴의 선발인 알리시오 루비오 쪽이 더 좋았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들은 22살의 유망주들이다. 메이저리그라는 커다란 무대에서 어떻게 던져도 다 잡아줄 것 같은 든든한 야수들을 등 뒤에 둔 것과 어떻게 던지건 다 빠트릴 것 같은 구멍들을 등 뒤에 둔 것은 느낌이 다르다.
[아, 보스턴. 투수 교체하는군요.]
[작년 확장 로스터로 처음 메이저를 경험했던 알리시오 루비오 선수에게 오늘 경기는 조금 혹독한 풀타임 신고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5회 초. 원아웃 주자 1, 2루.
6실점.
알리시오 루비오가 완전히 무너졌다.
물론 알리시오 루비오가 무너졌다고 경기가 끝나지는 않았다.
경기는 계속됐고, 불펜들은 무사히 알리시오 루비오의 승계주자들을 홈으로 배달했다.
4.1이닝 8자책.
보스턴의 신인 투수가 평균자책점 16.74로 시즌을 시작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원정 첫 경기 15:7 완패!!]
[김성민 시즌 첫 승 미션, 불붙은 LAD 핵타선 봉쇄.]
[이번에도 부족함을 드러낸 보스턴의 뒷문.]
[개막전 승리 이후 4연패!! 보스턴 레드삭스 이대로 괜찮을까?]
-내가 이 경기를 보고 암이 치료됐습니다.-
-뭐야? 너 다저스 팬임?-
-아니, 암세포가 암에 걸려서 사망함.-
-난 다저스 팬이긴 한데, 솔직히 성민이는 응원하거든? 근데 어제 경기 보니까 걱정되더라. 내 입장에서 최고의 결과는 성민이는 잘하고, 다저스가 이기는 건데, 다저스 이기는 건 걱정이 안 되는데 성민이가 잘할 수 있을지가 걱정됨.-
-원래 성민이 걱정은 하는 거 아니라고 했음. 걔 마린스에서도 우승했던 투수임.-
-정확히 말하자면 마린스조차도 우승시켰던 투수지.-
-근데 보스턴도 빠따는 괜찮던데? 다저스 지난 시리즈 4연전 다 해서 7실점 했잖아. 근데 이번에 보스턴이 한 경기에 그 7점을 다 뽑았어.-
-그거야 다저스 4선발이 수준이 떨어져서 그런 거지.-
-에이, 걔가 그래도 작년 가을에 올라와서 제법 던졌던 녀석이야.-
-어차피 내일 선발 디아고 헤밍턴임. 그 친구 상대로 방망이 휘두르는 거 보면 답 나오겠지.-
그리고 2차전.
같은 편일 때 더없이 든든하던 디아고 헤밍턴이 마운드 위로 올라왔다.
-뻐엉!!
“스트라잌!!”
너무 이른 최종 보스의 등장이었다.
< 시작부터 끝판왕(3) > 끝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