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하는 유망주의 조건(2) >
세상에 노력하는 사람을 기특하게 생각하지 않는 자는 없다.
그것은 본인이 필사적으로 노력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아니, 애초에 성공한 사람 가운데 자신이 노력 없이 그 자리에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체가 드물다.
남들이 보기에는 대충 설렁거린 것 같아 보여도 본인 스스로는 치열한 노력을 했다고 생각한다.
성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 때는 말이죠. 22살 23살 이럴 때는 매일 공 하나라도 더 던지고, 어? 선배들이 이거 조금 가르쳐줄까? 이러면 아이코 감사합니다. 이러고 넙죽넙죽 배우고 그랬다고요. 뭐? 시범 경기는 시범 경기일 뿐이다? 웃기지도 않아요. 어? 루키면 루키답게 시범 경기에 목숨 걸고 여기서 잘못하면 짤린다. 뭐 이런 마음으로 미리 몸도 만들어오고 그래야죠.’
-너 때는? 잠깐만, 혹시 내가 알고 있는 김성민은 평행세계 지구 4의 김성민인가?
물론 필 니크로가 듣기에는 기도 차지 않는 이야기다.
그가 보기엔 성민이나 여기 보스턴의 유망주들이나 그놈이 그놈이다.
‘올리버 자식도 솔직히 마음에 안 들었었어요. 만약 여기가 한국이었잖아? 그만한 재능 있는데 그러는 놈들 보면 코치님들이 아주 가만히 안 둬요. 여긴 재능 있는 애들 어차피 다 모인다고 하여간에 너무 자유 방임이라니까.’
-그러면 거기서 네가 올리버한테 지금처럼 잔소리 좀 하지 그랬냐?
‘에이, 거긴 내가 굳이 그런 거 안 해도 어차피 우승할 팀인데 뭣 하러 사서 악역을 합니까.’
-그러면 여긴? 여기선 악역을 하겠다고? 너 그럴 생각이 없어서 지금 에두아르도 앞에 내세우고 이러고 있는 거 아니야?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누가 악역 한답니까? 그런 거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요.’
-그러면?
‘제가 보기에 저 녀석이 진짜 원하는 말은 위로가 아닙니다. 그런 녀석이면 저렇게 죽상일 이유가 없죠. 욕을 먹고, 더 열심히 하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녀석이에요. 저놈은.’
필 니크로가 매튜 쿠퍼를 다시 바라봤다.
성민의 말이 맞다면 성민이 놈과는 완전히 다른 녀석이다.
진짜배기 스포츠 맨이다.
-네 말이 맞는다면 근래에 보기 드문 기특한 놈이로구나. 그런데 아까도 말했지만, 만약 네 생각이 틀렸으면 어쩌려고 그런 거냐?
‘애초에 손해를 볼 건 없다니까요. 제가 했던 이야기도 그냥 너도 그 생각에 동의한다면 할 말이 없다는 정도였잖아요. 물론 전해 듣는다면 듣기에 따라 약간 기분이 나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지금 제 위치에 크게 영향이 올만 한 사건은 아니죠. 어차피 하루 이틀 지나면 까먹고 말 그런 사소한 리스크였어요. 반면 이득은······.’
-저 녀석을 자극해서 팀 전체의 실력을 올릴 수 있다 뭐 그런 거로구나. 하긴 동엽이 자식도 시즌 초보다는 시즌 후반이 확실히 나아졌지. 마이크 올리버 녀석처럼 마지막까지 어정쩡한 놈보다는 동엽이 놈이 훨씬 보기 좋은 것도 사실이고.
‘아니. 그건 부차적인 문제고요.’
-그러면?
필 니크로의 질문에 성민이 답했다.
‘제가 이전에도 한 번 이야기 했잖습니까. 후배에게 베푸는 것은 선배의 의무라고요.’
-그래서 설마 네가 베풀고 싶은 마음에서 하는 거라고? 순수하게?
‘아니죠. 세상에 순수하게 베풀기만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딨습니까. 원래 의무에는 권리가 따라오는 겁니다. 이 경우는. 그래. 의무를 다한 선배에게 생겨나는 선배의 권위 정도가 되겠군요.’
성민이 자신의 일침에 침울한 표정을 짓던 매튜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조용히 두들겼다.
“내가 뻔하지만 좋은 이야기를 하나 해주지.”
“뻔하지만 좋은 이야기요?”
“그래, 예전 나의 동료 둘에 관한 이야기야.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만, 경험이 부족했지. 만약 탱킹을 하는 팀이었다면 조금은 괜찮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팀은 우승을 노리는 팀이었어. 인터넷에서는 수많은 욕설이 쏟아졌고 많은 사람이 공공연하게 녀석을 비난했어. 심지어 경기장에서 녀석에게 욕을 쏟아내는 팬도 있었지. 덕분에 그 두 녀석 모두 그 욕설에 지독하게 괴로워했었어.”
“그래서요?”
“하나는 죽도록 노력했어. 물론 노력한다고 해봐야 딱히 달라지는 건 없어서 여전히 욕을 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욕을 했지. 아마 지금도 여전히 그 욕을 먹고 있을 거야. 그리고 또 하나는 그냥 참고 버티기만 했어. 덕분에 녀석은 이제 욕을 먹지 않게 됐지.”
매튜 쿠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방금 뻔한 이야기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러면 당연히 노력에는 대가가 따르는 교훈적인 이야기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건 정반대인 것 같은데요?”
필 니크로 역시 매튜 쿠퍼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물론 세상일이라는 게 노력한 대로 풀리지는 않는다지만 그래도 그건 지금 조언으로 적절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구나.
성민이 그들의 의문에 답했다.
“아니, 뻔한 이야기 맞아. 죽어라 하고 노력한 녀석은 메이저로 치자면 골드글러브에 실버슬러거 합친 것 같은 상을 타고, ‘네 놈이 그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느냐!!’같은 욕을 여전히 배터지게 먹으면서 지금 리그 최고의 유격수로 뛰고 있어. 그리고 그냥 참고 버티기만 했던 녀석은 뭐 이제 다시는 빅리그에서 뛸 기회를 받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설마 지금 네가 말하는 리그 최고의 유격수 이야기라는 게 박동엽 이야기는 아니겠지?
성민이 필 니크로의 말을 무시했다.
“프로 선수가 욕을 먹는 건 어쩔 수 없어. 네가 못하면 너랑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거고 대단한 활약을 하면 너랑 다른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게 정상이야. 그리고 그걸 넘어서는 건 쉽지 않지.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냐? 열심히 죽어라 하고 노력해서 계속 욕을 처먹는 삶을 살고 싶어? 아니면 그냥 이대로 언젠가는 지나가겠지 생각하며 버틴 끝에 아무에게도 관심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싶어?”
“지금 너무 뻔한 답을 원하시는 거 아닙니까?”
“내가 뻔한 이야기를 했으니, 당연히 답도 뻔해야지.”
매튜 쿠퍼가 자신의 라커에 집어넣었던 방망이를 다시 꺼냈다.
성민이 그의 어깨를 슬쩍 두들겼다.
“아, 물론 노력한답시고 자기 몸 망가트리는 건 안 된다. 여기 코치들 현역 시절에 다들 나름대로 날아다녔던 사람들이야.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마이너 뚫고 빅리그 코치까지 됐다는 건, 나름대로 이론 공부 빠삭하다는 이야기고. 나야 야수가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내가 알기론 여기 타격 코치님도 운동생리학 석사까지 땄다고 하더라. 그런 사람 개인적으로 고용하려면 억만금이야. 공짜인 거에 감사하고 가서 열심히 도와달라고 하라고. 알겠어? 그리고 부탁할 때는 음료라도 하나 사서 들고 가고. 그런 사소한 거 하나가 많은 걸 바꿔놓는다.”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선배님.”
“왜?”
“말씀하신 대로라면 프로 선수로 생활한다는 건, 욕을 계속 먹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나 다름 없는데 선배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성민이 웃으며 답했다.
“말했잖아. 그런 게 ‘보통’이라고. 나 정도 되면 그 ‘보통’을 넘어선 곳을 바라볼 자격이 생기는 법이야.”
“보통을 넘어서는 곳이라고요?”
“그래, 하지만 아직 빅리그를 밟아보지도 못한 애송이가 그런 거 신경을 쓰기에는 십 년은 일러. 일단은 내년에도 욕 처먹으면서, 이왕이면 너랑 다른 옷 입은 사람들에게 욕 처먹으면서 여기 꾸역꾸역 버티는 걸 목표로 해보라고.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필 니크로가 말했다.
-아주 입에 발린 말 몇 마디 해줬다고 눈에서 존경의 광선이 뿜어져 나올 것 같구나.
‘그냥 몇 마디가 아니죠. 자기가 꼭 듣고 싶던 이야기를 자기가 존경할만한 커리어를 가진 사람이 해준 건데요.’
-그래서 아까 하던 말을 좀 이어가자면 이렇게 널 존경하는 애들이 생기면 권위가 생긴다. 뭐 그런 이야기로구나.
‘에이, 그건 너무 날로 먹으려는 거죠. 말 몇 마디로 권위가 생길 리가요. 세상이 어디 그렇게 쉬운 줄 아십니까?’
-그러면?
‘지속해서 선배답게 행동해주고······.’
-주고?
‘녀석도 일 인분은 하는 선수가 돼야죠. 원래 권위라는 건 밑에서 받쳐주는 녀석들도 어느 정도 입지가 있어야 생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거지들의 존중을 받는 사람은 기껏해야 거지 왕초에 불과하지만, 귀족들의 존중을 받는 사람은 진짜 왕인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녀석은 귀족이 될 싹수가 있고?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다만 요즘 측정기술 워낙 발달했잖아요. 재능이 있다는 건 진짜일 겁니다. 게다가 재능이 충분한 놈이 향상심까지 있습니다. 못하는 놈들끼리 서로 핥아주는 개떡 같은 분위기에서만 빼놔도 알아서 성장해줄 겁니다.’
필 니크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성민이는 다 생각이 있었다.
-야 근데 잠깐만. 그러고 보니 동엽이도 나름대로 너희 리그에서는 재능이 있다는 소리 듣던 녀석이잖아.
‘그래서 고작 2년 만에 골글 탔잖아요. 뭐 논란이야 좀 있다지만 어쨌거나 그 정도면 재능 있는 걸 넘어서 아주 재능이 넘치는 거죠.’
-근데 걔 작년에도 에러 19개 했잖아.
‘와, 영감님 진짜 동엽이 팬이에요? 혹시 제 스탯보다 동엽이 스탯을 더 잘 기억하는 거 아니죠?’
-아니, 그러니까 재능이고 뭐고!! 수비가!!
‘수비야 제가 좀 더 잘하면 커버 되는 거죠. 거, 괜히 1년이나 다저스에 있는 바람에 영감님 눈만 높아져서는. 원래 내야수가 일 년에 에러 2, 30개씩 하는 거 지극히 정상입니다.’
-아니다. 이 악마야!!
***
보스턴 레드삭스의 타격 코치인 카일 몬타나는 현역 시절 2천 안타에 300홈런을 달성한 대단한 타자였다. 비록 명예의 전당에는 첫턴에 광탈했지만, 올스타에만 네 번. 커리어하이 때는 MVP 3위까지도 해봤다.
그게 다가 아니다. 그는 현역 은퇴 이후, 구단의 지원 프로그램 도움을 받아 대학 수업을 이수했다. 게다가 마이너에서 코치로 있으면서 석사과정까지 밟았다. 그는 경험과 이론을 겸비한 흔치 않은 인재였다.
물론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경험과 이론을 겸비한 인재인 카일 몬타나에게는 아주 사소한 결점이 존재했다.
“하여간 요즘 녀석들은 근성이 없어. 근성이. 나 때는 말이야. 어? 딸기잼만 바른 빵을 열 조각씩 먹어가면서 방망이를 휘둘렀었다고. 요즘은 뭐 루키 리그만 가도 피넛버터를 기본으로 준다며. 나 때 그런 게 어딨어. 잼도 항상 한 가지였어. 내가 싱글A 올라가서 제일 좋았던 게 뭔지 알아? 딸기잼 대신 마멀레이드잼이 비치되있던 거였어.”
성공한 대부분 노인들이 그렇듯, 자신의 성공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고, 바뀐 환경은 고려하지 않은 채 그 시절의 근성을 바란다는 점이었다.
그런 그에게 현 보스턴의 선수들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머저리들이었다. 하루에도 열두번도 더 잔소리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이미 마이너를 뚫고 메이저까지 올라 온 선수들이다. 그는 그 근질거리는 입을 항상 펍에서 동료들에게 풀었었다.
“뭐라고? 타격을 지도해달라고?”
“네!! 물론 지금이 정식 훈련시간 이후인 건 잘 알지만, 지금 상황이 단순한 적응이 아니라 AA에서 통하던 제 방식에 약간의 변화를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코치님. 그리고 이건 별 건 아니지만.”
“아니, 뭐 이런 걸 굳이. 나야 너희들 가르치라고 구단에 돈 받는 사람인데. 아직 빅리그 올라오지도 못 해서 돈도 없을텐데 말이야.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거 가지고 오지 말고 그냥 오라고. 알겠어?”
요 근처 타코 트럭에서 사온 타코와 음료 하나를 받아드는 카일 몬타나의 얼굴에 웃음이 감돌았다. 이 녀석 요즘 놈들 같지 않게 사람이 된 녀석이다.
이미 돈의 구애는 받지 않는 늙은 코치의 갈 곳 없던 열정이 마침내 방향을 찾았다.
< 성공하는 유망주의 조건(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