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하는 유망주의 조건(1) >
-하아.
필 니크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요?’
-왜요오? 너 지금 저걸 보고도 왜요? 라는 말이 나오냐?
‘에이, 저 정도면 양호하죠.’
-양호오?
‘영감님, 지난 1년 동안 너무 천국 같은 곳에 계시느라 잊으신 것 같은데 원래 그게 비정상이고 이게 정상입니다. 이게 리얼월드의 야구라구요.’
가벼운 수비 훈련.
성민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체 저걸 왜 못 받지? 그냥 몸 좀 날려주면 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리고 저거 받았으면 그대로 톡 던지고 슝 던져서 더블 아웃 하면 되지 대체 왜 글러브에서 공을 더듬는다고 타이밍을 놓칠까?
하지만 이내 이해했다.
아!! 내가 다저스에 너무 적응을 해버렸구나.
그 야구의 천국 다저스에서 인간 같지 않은 수비들만 봤더니 쓸데없이 눈만 높아졌구나. 그래, 저게 정상이다. 사람이 어려운 공이 오면 좀 더듬기도 하고 가끔 알도 좀 까고 1루 내야 관중석으로 송구도 하고 그러는 게 사람이지.
-아니다!!
성민이 지난 시범경기들에서 삼진 위주의 피칭을 가져갔던 것은 압도적인 위력의 피칭으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의도도 의도였지만 이런 현실적인 문제때문이기도 했다.
보통의 투수였다면 이런 납득할 수 없는 수비에 분노하는 것이 정상이다.
“빌어먹을 새끼들. 1사 1, 2루에 땅볼을 유도해줬는데 1사 만루라고?”
“젠장, 존 맥도웰 그 자식은 대체 무슨 생각이야. 멀쩡한 삼루수를 가져다 버리고 저런 폐급을 올린다고?”
사실 매튜 쿠퍼는 폐급이라고 할만한 유망주는 절대 아니었다. 그는 존 맥도웰이 트레이드 절대 불가 블록에 올려둘 만큼 대단한 유망주였다.
야구에서 점수를 낼 수 있는 절대적인 방법은 오직 홈런뿐이다. 1920년대 야구의 신 이후 야구계가 홈런을 등한시한 적은 없었다. 타격왕은 포드를 타지만 홈런왕은 캐딜락을 탄다는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
과거에 그냥 막연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스탯들이 현대의 분석을 거쳐 실제로는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 증명됐다. 하지만 홈런의 경우는 그 반대다. 홈런의 중요성은 현대 야구로 오면 올수록 더 커졌다.
매튜 쿠퍼는 당장 작년 투고타저였던 AA리그에서 39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홈런왕에 올랐던 재목이다. 전문가들이 예측하기를 그는 메이저에서 최대 50개의 홈런이 가능한 유망주다. 50홈런의 삼루수? 다른 스탯이 어지간히 엉망이 아니라면 MVP는 그야말로 떼놓은 당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아직은 ‘가정’이라는 점이었다.
라커룸으로 돌아온 매튜 쿠퍼의 표정이 어두웠다.
“이봐, 매튜 괜찮아. 아직 메이저 문턱도 못 밟아본 녀석에게 올스타급 수비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고. 그러니까 표정 펴. 이따 펍에서 맥주나 한잔 하자.”
“그래, 어차피 시범 경기잖아. 아무도 신경 안 쓰니까 인상 구기지 마.”
“맞아, 딱히 에러도 없었잖아.”
사람들의 위로에 매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 고작 ‘시범 경기’다. 시범 경기는 어디까지나 시범 경기일 뿐이다. 이번 시즌 누가 봐도 보스턴의 삼루수는 매튜 쿠퍼 자신이다. 기회는 많았다. AA에 올라갔을 때도 처음부터 리그를 폭격했던 것은 아니다. 상위 리그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하다.
매튜 쿠퍼가 자기자신을 달랬다.
그리고 성민의 시범 경기 다섯 번째 등판.
‘이제 제법 이름값 있는 녀석들이 나오기 시작하네요.’
-슬슬 시범 경기도 끝날 때가 다 됐으니까. 어느 팀이건 30명 내외로 선수를 추렸을 테니 쭉정이는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오늘 상대는 세계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만패 구단으로 유명한 필라델피아 필리스. 승패마진이 -1000을 넘어가는 상태로 만패를 달성했던 탓에 약팀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마켓의 크기나 코어팬의 숫자 등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빅마켓의 범위에 들어가는 팀이었다.
팬들의 극성맞음으로 따지자면 보스턴, 컵스와 함께 수위권에 드는 팀으로 메이저 사무국에서 꾸준히 보스턴의 라이벌팀으로 밀고 있는 팀이기도 했다. 실제로 야구가 아닌 다른 종목의 경우에는 보스턴과 필라델피아 지역의 라이벌 매치가 제법 됐다.
하지만 사무국의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라이벌리는 좀처럼 성립되지 않았다.
“저 친구가 그 친구라며?”
“어, 이번에 보스턴이 작정하고 데리고 온 투수라던데. 아주 괜찮은 친구야.”
이유는 간단했다.
공동의 적이 있는 사람들은 쉽게 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최대 적은 뉴욕 양키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최대 적은 뉴욕 메츠.
뉴욕에 대한 증오. 그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 공식과도 같았다.
그에 더해 20세기 중후반 꾸준하게 이어졌던 안습의 역사가 단단하게 묶어주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필리스의 빌어먹을 놈들이라면 보통 상대 투수가 잘하면 야유와 욕설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보스턴의 투수를 상대로는 조금 예외였다.
“멍청한 새끼? 그걸 못 친다고?”
“방망이를 거꾸로 쥐고 휘둘러도 그거보단 낫겠다.”
필리건들의 야유가 자기 팀 타자에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2회 초
바깥쪽 크게 빠지는 속구.
붕붕 방망이를 신나게 휘두르는 타자의 성향을 고려하여 헛스윙을 유도하려던 공이었다. 하지만 그 붕붕 신나게 휘두르는 타자의 역량이 상상 이상이었다.
-딱!!
어떻게든 따라 나온 방망이가 공을 건드렸다. 삼루 베이스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나가는 빠른 공. 매튜 쿠퍼의 글러브가 공을 스쳤다.
그의 실수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2034년의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강한 팀이었고 그런 팀의 주전 멤버를 상대로 이전과 같은 삼진율을 기록하는 것은 아무리 성민이라도 무리였다. 성민이 공을 던지는 4이닝 동안 매튜 쿠퍼는 무려 두 개의 에러를 범했다.
-4개다.
‘에이 하나는 솔직히 동엽이가 저기 섰어도 못 잡았습니다. 3개로 하죠.’
-아니!! 대체 왜 기준을 박동엽으로 하는 거냐.
‘동엽이도 나름 골글받은 유격수거든요. 3루 수비 정도는 껌이죠.’
-껌 같은 소리 하네. 장담하건대 그 녀석 여기 오면 3루 수비도 제대로 못 해서 쩔쩔맬 거다.
‘동엽이도 삘받은 날은 페데리코한테 뒤지지 않아요.’
-그 삘받는 일이 거의 없다는 점이 문제잖아. 게다가 아무리 삘을 받았다고 해도 페데리코 수는 좀 너무 나갔지.
‘아, 하긴 페데리코는 좀 넘사벽이기는 했죠? 하여간 매튜 저 자식이 페데리코도 아니고 뭐 좀 못 잡을 수도 있는거죠.’
-누가 페데리코 수만큼 바랐다더냐. 그냥, 그냥 좀 사람같기만 해도 되잖아!!
‘에이, 그럴 거면 그냥 다저스에 남았죠. 제 계획 잊으셨습니까?’
-그럴리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김성민이 아니라 김성민의 보스턴 레드삭스로 만들겠다는 그 말도 안 되는 계획 똑똑히 기억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건······
성민이 필 니크로의 말을 끊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영감님이 너무 편한 곳에 오래 있어서 감을 잃어버리신 것 같습니다.’
-그냥 그대로 감을 잃은 채로 죽어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어쩌다 내가 여기까지 따라와서는······. 내가 문득 든 생각인데 이 정도면 난 소원을 이룬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슬슬 성불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성불은 무슨. 아직 보셔야 할 것들이 태산같이 남았거든요?’
-꼭 봐야 할까? 나, 이대로도 성불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늘 볼일은 보고 싶은 일일 겁니다. 저 녀석에게 잔소리를 좀 할 생각이거든요.’
필 니크로가 되물었다.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너 쟤한테 별 불만 없다며.
‘플레이하는 건 불만 없죠.’
-플레이에 불만이 없다니? 다른 건 몰라도 플레이에는 지금 불만을 어마어마하게 가져야 하는 타이밍이거든?
성민이 필 니크로의 말을 무시한 채 매튜 쿠퍼를 바라봤다.
그의 주변 풍경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소처럼 선수들이 매튜 쿠퍼를 위로했다.
성민이 가만히 그 장면을 지켜봤다. 그리고 사람들이 각자의 볼일을 보러 흩어졌을 때, 조용히 매튜 쿠퍼에게 접근했다.
“너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
“네? 갑자기 무슨······?”
“쟤들 말에 동의하냐고. 시범 경기는 시범 경기일 뿐이고, 아무도 너에게 올스타급 수비를 기대하는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맥주나 한잔하자는 저 이야기 말이야.”
매튜 쿠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뭐, 너도 동의한다면 나도 더 이상 별말은 하지 않을게.”
“틀린 말은 아니죠. 시범 경기는 시범 경기일 뿐이니까요. 시범 경기에서 3할을 친다고 정규 시즌에 3할을 치라는 법도 없고, 시범 경기에 5점대 평자책을 기록해도 정규 시즌에서 2점대 평자책을 기록하는 투수도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너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거지? 뭐 그렇다면 나도 별 말을 할 생각은 없고.”
성민이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오늘 에러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아직 빅리그 데뷔도 못했습니다. 천천히 적응하면 저도 충분히!!”
“알았어, 알았어. 다시 말하지만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굳이 별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니까.”
“잠깐만요!!”
매튜 쿠퍼가 다급하게 성민의 팔을 잡았다.
“대체 왜 저한테만 이러시는 겁니까. 오늘 에러한 사람은 저 혼자가 아니잖아요.”
“눈빛이 달랐어.”
“눈빛이 달랐다고요?”
“그래, 나 정도로 뛰어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돼. 에러를 범하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자식과,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녀석의 눈빛은 달라.”
매튜 쿠퍼가 입을 멍하게 벌렸다.
눈빛? 눈빛이라니. 고작 그런 거로 사람을 구분한다고?
믿기 힘든 이야기다. 하지만 눈앞의 투수는 외국의 리그에서 11년간 프로 생활을 했고 데뷔 1년 차에 신인왕과 사이 영 2위 퍼펙트 게임, 월드 시리즈 MVP를 동시에 차지한 사람이다. 이런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면 저런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매튜 쿠퍼가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분합니다. 죽을 만큼 분해요.”
필 니크로가 대체 이건 뭐지? 하는 뜨악한 눈빛으로 성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거짓말 설마 진짜냐?
‘에이, 진짜겠습니까? 제가 무슨 초능력자도 아니고. 눈만 보고 남의 마음을 어떻게 압니까.’
-그러면?
‘그냥 에러는 매일 하는데, 할 때마다 얼굴은 죽상이잖아요. 아무리 에러를 범해도 그게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고작 그걸 가지고 이렇게 질렀다고?
‘뭐 손해볼 건 없으니까요.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쟤들 하는 이야기가 좀 거슬리긴 했거든요.’
-뭐가?
성민이 매튜 쿠퍼에게 답했다.
“그게 정상이야. 시범 경기는 시범 경기일뿐이다? 맞는 말이지. 단! 베테랑들에게는 말이야.”
“!?”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이네. 자, 잘 들어봐. 시범 경기는 시범 경기일 뿐이라는 말은 애초에 시범 경기 성적이 정규시즌 성적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야. 어째서일까?”
“그야 아직 몸이 덜 만들어졌고······.”
성민이 매튜의 말을 끊었다.
“간단해. 이건 시범 경기이기 때문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이네. 잘 들어. 베테랑들은 애초에 이걸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 몸을 풀어주고, 이번 시즌에 어떤 식으로 경기를 운영할까를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로 시험을 해보지.”
“아!!”
“하지만 넌 어땠어? 대체 뭘 시험해봤지? 시범 경기는 시범 경기일 뿐이다? 웃기지 마. 지금 팀 상황에 삼루수가 없으니 널 주전으로 사용할 거라고 생각할 거야. 최고의 유망주라고 여기저기서 떠받들어주니 그것도 믿고 있겠지. 하지만 그거 알아? 여긴 메이저리그야.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이는 리그지. 그리고 우리는 보스턴 레드삭스야. 어떻게든 최대한 많은 자리에 유망주를 박아넣고 키워야 하는 스몰 마켓이 아니야. 팀의 전력이 괜찮은 상황이면 한두 자리 정도는 충분히 오버페이 할 수 있는 팀이라고. 어때? 아직도 시범 경기는 시범경기일 뿐이라는 말로 위로가 돼?”
< 성공하는 유망주의 조건(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