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 너에게 닿기를(2)
“진짜 괜찮아?”
“괜찮다니까.”
“아니, 그래도….”
주변을 맴돌며 걱정되어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된장찌개에서 눈을 못 떼는 찬이.
일본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경환 형과 찬이는 시무룩해졌다.
일본 음식 말고, 파는 음식 말고, 내가 해준 밥을 먹고 싶다고.
그 사건 이후 불을 무서워하는 터라 숙소에서도 밥을 안 한 지 좀 됐다.
아침 식사야 간단하게나마 꾸준히 챙겼지만, 스케줄 때문에 자주 무언가 해 먹기는 힘들었다.
계속 도시락, 파는 음식을 먹다 보니 아무래도 지치는 모양이었다.
그중에서도 충전식인 경환 형과 찬이는 유달리 기운이 빠져 보였다.
신날 일이 있어도 평소보다 방방 뛰는 게 미묘하게 줄어들었다고 해야 할까.
보고 있기 안쓰러워서 그대로 둘 수가 없다.
그동안 열심히 밥해 먹인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도 아니면 나를 밥 주는 사람으로 알아서 슬퍼해야 하나.
복잡한 감정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지만, 어쨌든 우리 애들이 기운 내는 게 우선이다.
호텔에서는 조리가 불가능하기에 우진 형을 붙들고 넌지시 물었다.
애들 밥을 해주고 싶은데 장소를 빌릴 수는 없는지.
처음에는 쉴 시간도 부족한데 왜 고생하냐고 고개를 젓던 형은 쫓아다니며 설득하는 내게 지고 말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종범 형은 이유 모를 한숨을 푹 내쉬었고.
어쩐지 종범 형도 점점 한숨이 늘어나는 것 같아서 조금 슬퍼졌다.
그렇게 팀장님과 우진 형을 설득하고 짬을 내어 빌린 어느 가정집.
우진 형이 설명해준 바에 의하면 일본 매니지먼트 직원 숙소 중 한 곳이라 했다.
일부 직원이나 외부 손님이 장기간 머물 때를 대비해서 숙소를 몇 곳 가지고 있다고.
대부분은 호텔에 머무르는 편이지만, 간혹 그런 장소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음식을 사서 먹는 것보다 직접 해 먹어야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세상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을 테니 그 부분은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그저 맘 편히 요리하고 애들 밥 먹일 수 있으면 됐지.
멤버들은 불을 바라보는 것까지는 이제 괜찮아졌다.
꾸준한 상담과 포잉의 노력 덕분에 그때의 공포를 나름대로 다스릴 수 있게 된 것.
하지만 불을 직접 이용하거나 가까이 있는 것은 꺼림칙함을 견디지 못하는 편이다.
그나마 나는 포잉의 아낌없는 애정 덕분에 큰 문제 없이 가스레인지를 다룰 수 있었다.
여차하면 포잉이 지켜줄 거라는 믿음과 밤마다 포잉이 퍼부어준 따뜻한 기운, 그리고 스킬의 콜라보랄까.
그런 나를 말리다 포기한 준이 형도 내 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영빈 형도 된장찌개 냄새에 배가 고픈 듯 주방을 기웃거렸다.
“조금만 기다려요. 거의 다 됐으니까.”
“아냐. 천천히 조심히 해. 형이 도와줘야 하는데….”
영빈 형은 머쓱했는지 슬그머니 등 뒤로 다가와 내 머리를 헝클었다.
영빈 형은 숙소의 가스레인지를 하이라이트로 바꾸는 걸 반대했다.
인덕션을 쓰자니 숙소에서 쓰던 조리 기구를 싹 바꿔야 하고, 하이라이트는 조리 속도가 너무 느리고.
형은 우리가 당장 눈에 보지 않는다고 해서 앞으로도 안 보고 살 수는 없지 않겠냐고 했다.
연예인을 업으로 삼았으니 언제, 어떤 현장에서 촬영할지도 알 수 없다.
촬영 장면 중에 불이 들어가면 그때마다 눈을 감고 촬영할 수도 없지 않냐고 우리 모두에게 말했다.
회식한다고 고깃집에 가면 거기 불은 또 어떻게 할 거냐고.
언제나 조리된 음식만, 가열 안 해도 되는 음식만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중에 필요에 의해서 바꾸는 건 괜찮지만, 피하기 위해서는 그러지 말자고 했다.
억지로 당장 익숙해지려고 할 필요는 없지만, 천천히 적응해나가자고.
그 말에 모두가 동의했기에 숙소의 가스레인지는 그냥 두었다.
멤버들도 포잉의 도움과 각자의 노력으로 조금씩이나마 그때의 두려움을 녹여내고 있으니 더 바랄 게 없다.
집에 있을 때처럼 익숙한 곳이 아니기에 가볍게 익숙한 음식을 했다.
폭신하고 두툼한 계란말이, 뭉근하게 오래 끓인 된장찌개, 간단하게 무친 무생채.
거기에 막내 라인이 좋아하는 분홍 소세지도 달걀 물을 입혀 구웠다.
“좀 달긴 한데 그냥 먹자.”
유난히 불고기를 좋아하는 찬이를 위해 급하게 불고기를 해봤지만, 영 간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
달거나 짜거나 간이 센 음식을 좋아하는 찬이 때문에 걱정이 많지만, 입맛이란 게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멤버들은 그사이 그럭저럭 적응한 건지 방 한가운데 상을 펴고 쪼르르 앉아있었다.
하나, 둘 쌓이는 반찬들에 점점 허물어지는 입매를 보니 고생한 보람이 있어 흐뭇하기도 했고.
“아으…. 이게 얼마 만에 먹는 집밥이야.”
“누가 보면 몇 년 못 먹은 줄 알겠다.”
앓는 소리를 내는 찬이에게 영빈 형이 핀잔을 주었지만, 그마저도 신나는지 찬이는 방실방실 웃기만 했다.
“환아, 고생했다. 고마워.”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형.”
“우리 지환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두툼한 계란말이를 보고 초롱초롱해진 세빈이와 얼른 앉으라고 성화인 경환 형.
모처럼 준이 형까지 들뜬 얼굴을 하고 있어서 뻐근했던 허리도 멀쩡해지는 것 같다.
“얼른 먹어요. 밥 먹고 치우고 이동해야지.”
“그래, 얼른 먹자.”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
“맛있게 먹겠습니다~!”
그나마 밥은 불을 보지 않아도 된다며 영빈 형이 도와주었다.
멤버들 먹는 양을 생각해서 넉넉하게 한다고 했는데 모자라진 않을지.
먹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절반 이상 없어진 경환 형의 밥그릇을 보고 걱정이 앞섰다.
“누가 안 뺏어 먹는다. 천천히들 먹어.”
준이 형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급하게 먹다 탈 나면 안 된다고 막내 라인을 다독였다.
“이제 엄마 밥보다 형이 해준 게 더 좋아요.”
“저런, 그래도 어머님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에이, 당연하죠. 저도 이제 그 정도 눈치는 있거든요?”
야무지게 밥알 하나 흘리지 않고 먹는 세빈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었다.
게릴라 공연은 환영받기도 했지만, 이유 모를 비난도 함께 받았다.
그사이 우리는 여러 도시를 돌며 공연을 이어왔고, 이제는 일본 콘서트를 앞두고 있었다.
꽤 이슈가 됐기에 기자들의 인터뷰도 몇 번 했고.
그 후로 실장님을 통해 넌지시 방송 출연을 찔러오는 곳도 생겼다고 했다.
뒤통수가 얼얼해질 만큼 세게 때려놓고 이제 와서.
하여튼 뻔뻔한 인간들.
그것들을 다 차치하더라도 닫힌 공간이 아닌 탁 트인 외부에서의 공연은 우리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왜 새벽 형들이 방송 출연보다 공연을 우선시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있는 반짝이는 별들.
먼 하늘에 있어 가질 수 없는 별이 아니었다.
내 바로 옆 멤버들과 우리 노래를 즐기는 팬들 두 눈에 무수한 별들이 반짝였다.
반짝이기에 별이라 부른다면, 보석보다 더 눈 부신 빛을 뿌리는 저 눈동자들은 별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물론 지금 내 눈앞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흘은 굶은 것 같은 모지리들이 있었지만.
괜히 유쾌해져서 소리 내 웃자, 경환 형은 자기가 뭔가 흘렸나 돌아봤고 찬이는 멀뚱멀뚱 나를 봤다.
“아, 그냥 너무 잘 먹으니까 좋아서요.”
“앞으로도 잘 먹을 자신 있으니까 힘내, 환아!”
“넌 조용히 해.”
“나한테만 맨날 뭐라 해!”
“찬아, 밥이나 먹어.”
“맞아, 찐빵 형은 흘리지 말고 먹기나 해요.”
잘 먹는 멤버들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간의 스트레스도 풀리는 것 같다.
비록 그동안의 일정과 앞으로 일정에 비하면 짧은 휴식이지만, 충분했다.
이렇게 계속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멤버들을 향해 웃었다.
* * *
진우는 지난번 만난 동생들을 떠올리며 착잡한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무슨 사건 사고가 그리 많은지.
자신이 팔이 부러졌던 거야 별일 아니다.
촬영하다 보면 배우가 다치는 일은 비교적 흔한 일이니까.
게다가 병원에서 놀랄 만큼 빨리 아물었고, 경과가 무척 좋다고 했다.
오죽하면 감독이 살았다고 자신을 껴안으려고 했을까.
징그러우니 저리 가라고 밀어버리긴 했지만, 진우도 얼떨떨하긴 했다.
자기 옆에서 몰래 웃고 있던 소원 요정이 있으리라는 건 꿈에도 모른 체.
하지만 자꾸 안 좋은 일에 휘말리는 동생들을 지켜보는 건 마음이 안 좋다.
그 일에 자신이 무언가 해줄 수 없어서 더욱더.
그저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동생들을 대해주고, 연락하고, 맛있는 걸 사주는 게 전부다.
이 병아리들은 바쁜 일이 좀 지나가면 그때는 다 같이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얼마 전에 큰 사건이 있었던 애들치고는 태연하게 굴었고, 평소처럼 장난치고 뒹굴었다.
병원에 왔으면서도 형 만나니 좋다고 엉겨 붙으며 방방 뛰는 것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와중에도 차분하게 웃으며 반겨주던 지환의 얼굴이 선명하다.
큰일을 겪어놓고 자신의 팔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걱정하던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골든 아워의 하겸과 단우도 같은 자리에 있었고, 하겸이 자신을 은근히 견제한다는 걸 알지만 그건 알 바 아니다.
어차피 그동안 병아리들과 쌓은 유대는 누가 넘본다고 어떻게 되는 게 아니니까.
더군다나 연예계 생활을 연수로 따지면 진우가 선배다.
물론 사고 현장에 새벽 멤버도 함께 있었고, 그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새벽 멤버들도 외부 활동을 중지하고 안정을 위해 숙소에만 머무르고 있다.
그나마 다진은 현장에 없었던 덕분에 지금 새벽 멤버들을 챙기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형들보다 동생들이 더 걱정된다.
알고 지낸 시간은 분명 새벽이 더 긴데, 언래블이 진우보다 어린 동생들이라 그런지 그들에게 더 마음 쓰였다.
당사자들이 알면 서운해할 테니 티 내지 않으려 애쓰는 건 진우 몫이다.
다만, 새벽 멤버들이 언래블을 끼고 돌던 걸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며 웃었다.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낸 진우는 곧 개봉할 영화를 생각했다.
‘DEAR’.
진우와 지환, 은주가 합을 맞춘 영화가 추석을 노리고 곧 개봉한다.
그때 지환이 맡았던 도한겸과 진우가 아는 공지환을 비교했다.
어딘가 모르게, 지환은 늘 어디론가 훌쩍 사라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듯한 그런 느낌.
분명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두 눈에 훤히 보일 만큼 선명한데도 그 느낌은 영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지긴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런 분위기가 흐려지고 있지만, 없어지진 않았다.
그런 분위기를 읽기라도 한 건지 지환에게 들어오는 역은 대부분 사연 많은 비극적인 캐릭터다.
그 때문에 소현 팀장이 신경질 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진우는 다음에 지환에게 연기 연습을 핑계로 밝은 캐릭터를 알려주려고 대본 몇 개를 챙겨놨다.
지환은 연기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비록 그게 노래보다 순위가 밀린다는 건 잘 알지만, 앞으로도 연기를 놓지 않았으면 했다.
함께 호흡을 맞추고 역에 빠져들던 순간 무척 즐거웠다.
호흡을 맞추기 위해 평소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주고받고.
그건 새벽 멤버들도, 언래블의 병아리들도 지환과 나눌 수 없는 경험이다.
자꾸만 우쭐해지는 어깨를 티 내지 않으려고 진우가 얼마나 애썼던가.
그런 자신을 본 진성은 혀를 찼지만, 상관없다.
누군가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건 무척 달콤한 일이다.
진우는 어쩌면 우리 병아리가 신인배우상을 탈지도 모른다고 혼자 김칫국을 실컷 마시고 있었다.
여러모로 지환이 알고 있던 여진우 배우님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체.
물론 지환은 지금의 진우가 더 좋은 것 같으니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