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53)화 (453/456)

453. 너에게 닿기를(3)

- 여러분! 행복해요?

- 네에!!

- 행복해!

우진은 무대 뒤에서 무대 위 언래블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하루 조바심내며 의기소침해하던 아이들은 이제 없다.

어지간한 아이돌들보다 훨씬 단단하고 심지가 굳은 아이들이다.

오죽하면 소현 팀장이 더 오래된 연차의 아이돌보다 얘네가 멘탈은 더 낫다고 할까.

이전에는 품 안의 병아리들이었다면, 지금은 마당 넓은지 모르고 뛰노는 강아지들 같았다.

낑낑거리던 아이들이 무대만 올라가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이제는 익숙했다.

그게 연예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고.

한국도 아니고 일본에 와서도 무대 위 아이들은 다르지 않았다.

“아이고, 신났네, 신났어. 지환이 쟤 아까 감기 기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요.”

미열이 있어 약 먹고 내내 목을 감싸고 미지근한 물만 마시며 웅크리고 있던 지환.

가뜩이나 팀 내 최약체라 신경이 많이 쓰였다.

최대한 체력을 보존한다고 먹기 싫어죽겠다는 얼굴을 하고서도 죽 한 그릇을 꾸역꾸역 먹던 애다.

그간 쓰러지고 아팠던 날이 제법 되어 죽은 쳐다보기도 싫다고 진저리치던 지환.

그런 애가 무대 올라야 한다며 자진해서 죽을 요구하고 꼼짝없이 누워 몸을 챙겼다.

“곧 죽어도 무대는 해야 한다잖아요.”

“오죽하겠어?”

소현은 혀를 차면서도 기특해 죽겠다는 눈으로 무대를 펄펄 날아다니는 멤버들을 바라봤다.

앵콜 무대라 무대 의상이 가볍다.

콘서트 굿즈인 알록달록한 반팔 티.

거기에는 멤버들이 직접 그린 작은 그림과 문구가 그럴싸하게 프린팅되어 있다.

서울 콘서트의 ‘The Revolution’과 연결 고리를 만들고 싶었던 언래블.

하지만 이번 공연은 번외편 같은 느낌의 공연이다.

원래는 아시아 투어의 마지막이 일본이었다.

그러나 방화 사건으로 스케줄이 꼬이면서 일본 팬들이 기다린 시간을 보상해주고 싶다는 의견이 있었다.

앨범 배송 지연에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하지 않았으니 팬들이 실망할 것 같다고.

그 의견을 받아들인 회사는 이것저것 궁리하다 게릴라 공연이 아닌 제대로 된 공연장을 대여해 작은 콘서트를 마련했다.

짧은 기간 안에 진행된 일이라 큰 공연장은 무리였지만, 공연만으로도 언래블은 만족한 듯했다.

팬들도 한국 콘서트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지만 신났다는 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 공연을 끝으로 아시아 투어가 시작된다.

준비는 진즉부터 하고 있었기에 다행히 일정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우진이 염려하는 건 멤버들의 상태.

사건 때문에 뒤로 밀렸던 스케줄을 일본 공연 중간중간 한국에 돌아가 촬영해야 했다.

아무리 언래블을 좋게 보던 곳이라 해도 자신들 일정에 피해를 주는 걸 달가워할 리 없다.

최대한 좋게 협의가 이뤄진 곳도 있지만, 절대 변경할 수 없다며 으름장을 놓은 곳도 있다.

아이들은 군말 없이 몇 번이나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촬영 중에는 지친 기색 없이 뛰어다녔다.

이동하는 사이 사이에는 죽은 듯이 잠만 자면서도 절대 외부인들에게는 자신들의 고생을 내색하지 않았다.

멤버들이 온전히 자기 자신을 내보이는 건 소현이나 우진이 있을 때뿐이다.

종범과도 친근하게 지내지만, 그에겐 모든 것을 터놓지 않았다.

워낙 외부 사람에 대한 경계가 심한 애들이라 그 부분은 몇 번이나 종범에게 말해두긴 했다.

종범은 서운한 기색을 다 감추지 못하면서도 이해했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몇 마디로, 한순간에 얻을 수 없다는 건 그도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사건 이후부터는 아이들이 종범을 조금씩 우진처럼 대하긴 했다.

자신들을 위해 위험한 상황에도 물러서지 않는 걸 똑똑히 보았으니까.

촬영 현장의 누군가는 그런 멤버들의 노력도 모르고 다들 멀쩡한데 괜히 뭉그적댔다고 비아냥대기도 했다.

발끈한 종범이 주먹을 꽉 쥐었을 때 막아선 것도 우진이다.

우리에게는 소중한 아이들이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니까.

예전에는 우진도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삼키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간의 경험은 점차 우진을 더 진중하게 만들었고, 섣불리 움직이지 않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복수는 잊지 않았다.

우진은 그런 태도를 보이는 인간들은 빠짐없이 적어 소현에게 보고했다.

그 내용은 모두 정윤 실장과 정균 대표에게 전해질 터.

아마 지나친 태도를 보인 이들과는 앞으로 함께 일하지 않아도 되리라.

- 皆さん、愛してます!

(여러분, 사랑해요!)

힘찬과 경환이 외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언래블의 에너지는 공연장의 크기와 상관없었다.

언제나 주어진 무대에 최선을 다하는 가수.

그런 가수가 전적으로 의지하는 매니저.

그게 우진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언제나 고된 일상 속에서도 우진의 중심을 잡아준다.

아마 졸업 후 경호 쪽에서 커리어를 쌓았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을 것.

그러나 우진은 그때 이쪽 일을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그쪽 일을 했다면, 나름의 보람을 찾으며 살아갔겠지.

하지만 지금 이 아이들을 만나진 못했을 것이다.

이후 다른 아이돌을 맡게 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문득 우진은 지환이 자신을 붙들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 형, 우리 오래오래 같이해요. 나중에 막 우리 응? 월드 투어 같은 것도 하고 막!

- 얼씨구, 기지도 못하는 게 날겠다고 하고 있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자주 놀라고 조그만 일에도 파드득거리던 정말 병아리였다.

오죽하면 우진이 그렇게 말했을까.

그런데도 먼 미래를 꿈꾸는 분홍빛 뺨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죠!

- 오냐, 돈 많이 벌어서 형도 부자 되게 해줘라.

- 걱정 마요, 우리만 믿어요!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눈으로 믿기 힘든 일도 여러 번 겪었다.

완치가 불가능하리라 진단받았던 병도 나았다.

뜬금없이 귀신 같은 무언가가 지환을 노린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화상 입었던 팔로 잠시 시선이 닿았지만, 피식 웃었다.

이 정도 상처로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다면 무척 싸게 먹힌 거니까.

어느새 앵콜 무대도 끝난 건지 땀에 흠뻑 젖은 멤버들이 달려왔다.

“형! 봤어요? 나 백 덤블링 한 거?”

“봤어.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니까.”

“크, 내가 이렇게 몸도 잘 쓰고 춤도 잘 추고!”

“그만하고 옷이나 갈아입어!”

순식간에 멤버들의 웃음소리와 조잘거리는 목소리로 무대 뒤가 시끌벅적해졌다.

지쳐서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어서 칭찬해달라는 듯 눈을 빛내며 자기들이 잘한 걸 쏟아낸다.

칭찬 먹고 자란다며 언제나 당당하게 칭찬을 요구하는 멤버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우진은 못 말린다는 듯 웃다가 멤버 한 명, 한 명 어깨를 두드려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잘했다, 멋있었다, 고생했다 등등.

서포트 팀 모두가 언래블에게 칭찬을 쏟아내자 그제야 배부른 강아지처럼 녹아들 듯 웃는다.

“아주 내가 애를 키운다, 애를 키워.”

“저 아직 미자라 애 맞는데요?”

“내가 아주 우리 찐빵 앞에서 무슨 말을 못 해!”

“아, 왜 팀장님까지 찐빵이라고 해요!”

툴툴거리면서도 세심하게 멤버들을 살피던 소현에게 힘찬이 종알댔다.

“종범 형, 아까….”

“응, 그거 저기에 있어. 잠깐만.”

경환은 종범에게 무언가 부탁했던지 둘이 속닥거렸다.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며 우진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분명, 언래블을 선택한 건 인생에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다.

* * *

연희는 지환이 보낸 일본 공연 사진을 넘겨보며 못 말린다는 듯 혀를 찼다.

그렇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 때문에 연희가 지환을 무척 대견해하고 있다는 걸 감추지는 못했다.

큰 사건이 있었는데도 무대에서는 이렇게 세상을 다 가진 듯 웃고 있다.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동생은 착실하게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자신의 품에만 있던 어린 동생이 아니라는 건 머리로 알고 있으면서도 놓기가 쉽지 않다.

아니, 놓는 게 가능할까?

연희는 이제 지환에게 자신이 해줘야 할 것은 언제가 됐던 모든 걸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울타리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큰 사건에 휘말렸지만, 동생이 무사하니 됐다.

그 일은 더 꺼내 봐야 자신에게 하나도 도움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

기사를 접하고, 회사 연락을 받고 도저히 맨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어 오랜만에 소주를 마셨다.

왜 그럴 때는 취하지도 않는지.

무사하다는 동생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와 한참을 울었다.

동생이 속을 썩이지 않으니 이제는 사건 사고가 동생을 따라다니는 기분이라 피가 마른다.

하지만 연희가 그런 티를 내면 동생은 더 숨기려 할 테니 애써 속으로 삼켰다.

그래, 동생도, 동생의 주변 사람들도 무사하니 됐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억지로 주먹을 움켜쥐며 숨을 천천히 뱉었다.

다시 요동치던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연희는 거실로 나왔다.

“이사를… 할까.”

정갈하게 정돈된 집안을 둘러보던 연희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언래블 멤버들이 한 번 집에 놀러 오고 싶어 하는 걸 안다.

다른 멤버의 가족들도 아이들을 전부 친자식처럼 챙겨주고 있다.

지환이 굳건히 설 수 있도록 서로 어깨를 잡아주는 또 다른 동생들.

지금 집은 그 애들이 편안히 놀다 가기엔 너무도 작았다.

연습생 생활은 잘 모르지만, 데뷔 직전부터 지금까지 매일 같이 붙어사는 애들이다.

어쩌다 틈이 나도 가족들과 하룻밤 지내고 다시 숙소로 돌아온다고 했다.

숙소를 집이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어련할까 싶다.

이 집에서 너무 아픈 기억이 많다.

하지만 연희에게는 그것조차 소중해서 이사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픈 기억이 조금씩 행복한 기억으로 바뀌고 있는 지금이라면, 새집에서 조금 더 행복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지금 집은 주택가에 자리한 오래된 빌라라 사람들이 많이 오간다.

이런 위치가 동생에게 부담이 되진 않을까 고민되기도 했다.

지환과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랬다가는 자기 통장을 넘길 것 같아 절로 고개를 젓게 되었다.

연희가 틈날 때마다 금전 감각을 길러야 한다고 잔소리를 했지만, 이 망할 놈의 동생은 들어먹질 않는다.

어린 나이에 적지 않은 돈을 벌고 있는데 사치에 눈뜨지 않은 건 무척 대견하다.

하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의 문제니까.

연희는 한숨을 내쉬며 지환의 방으로 들어갔다.

텅 빈 방을 잠시 돌아본 후, 지환이 오면 입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두었던 옷들을 꺼내 보았다.

옷에는 아직 희미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남아있었다.

뭘 이런 걸 사놨냐고 입으로는 종알거리면서도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걸 놓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옷을 매만지는 손길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주책맞게 눈물이 날 뻔도 했다.

그깟 옷이 뭐라고.

명품도 아니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더 사줄 수 있다.

그런데도 누나가 선물해준 옷이 신기한 건지, 아니면 좋은 건지 밥 먹을 때조차 조심조심 먹었다.

지환이 이전과 너무 달라져서 연희가 당황했던 때도 있었다.

어릴 때는 초밥을 무척 좋아해서 크게 다툰 후에는 초밥을 시켜주며 은근슬쩍 화해를 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동생은 해산물이 비려서 거의 안 먹는다고 했다.

지금이야 예전 일을 곧잘 기억해서 둘이 떠들기도 하지만, 교통사고 직후에는 기억이 오락가락했다.

그보다 더 연희를 당황하게 했던 건 지환의 눈빛과 행동이었다.

자신의 방을 낯설어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연희에게 늘 무언가 미안해했다.

처음에는 그저 연습생 하겠다고 뛰어나갔던 때의 다툼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

지환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하나뿐인 가족이 모르는 사람을 보듯 낯설어한다는 건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다.

오죽하면 ‘누나’라고 부르는 게 자신을 향한 말이 맞나 하는 생각도 했다.

지금 자신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정말 자신의 동생이 맞는지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는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행히 서운하고 속상함도 잠시였다.

그동안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았는지 지나치게 성숙해진 동생은 되려 연희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생활비에 보태라고 자꾸 돈을 보내오기에 혼쭐을 내기도 했다.

낯선 사람을 대하듯 굴던 동생에게는 어쩌면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점차 어릴 때처럼 자신을 대하고 집을 편해하기 시작하면서 연희는 조마조마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연희는 지환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느 날 갑자기 아이돌 그만둔다고 집에 돌아와도 기꺼이 반겨줄 생각이다.

그저 지금처럼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의지하며 살 수 있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엄마, 아빠…. 우리 막둥이가 이렇게 잘 자라고 있어요. 지켜줘서 고마워요….”

연희는 잠시 살폈던 동생의 방을 나서며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님께 감사 인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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