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 BEcause(1)
포잉은 불길한 느낌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공을 달렸다.
여태까지 여자가 보였던 행동에 비하면 그 마지막이 너무 어처구니없었다.
궁지에 몰려 자기 손으로 끝낸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이렇게 순순히 포기할 사람이었던가.
‘제발 얌전히 기다려라, 제발.’
초조한 마음으로 허공을 질주하던 포잉은 순간 우뚝 그 자리에 멈춰서서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오, 이 등신!’
포잉은 아직 초급 요정이기에 장로님들처럼 공간을 무작정 넘어 다닐 수는 없다.
차라리 포포에게 이동시켜달라고 말했어야 했다.
아마 등 뒤에서 외치던 포포의 목소리도 그걸 말한 것이리라.
하지만 이미 꽤 멀리 달려왔으니 돌아가는 건 시간 낭비.
그렇다면 정령계로 돌아가야 했다.
정령계에서 계약자 곁으로 이동하는 건 가능하니까.
평소에 늘 사용하던 능력조차 기억하지 못할 만큼 포잉은 당황한 상태였다.
재빨리 정령계로 넘어간 포잉.
그리고 갑자기 튀어나온 포잉에게 옥사가 무어라 말을 걸었지만, 그걸 받아줄 시간이 없었다.
“옥사, 나중에! 미안!”
정령계에서 다시 지환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포잉의 등 뒤로 옥사가 외쳤다.
“조심해, 포잉!”
급히 지환의 곁으로 돌아온 포잉의 눈앞에는 새파란 불꽃이 가득했다.
푸르고 붉은 불길이 넘실대는 병실.
불길은 병실과 입구 한가운데서 일렁이고 있었다.
‘공지환!’
포잉은 눈이 뒤집힌 상태로 계약자를 불렀다.
‘포잉!’
다행히 침대를 불구덩이 쪽으로 밀어놓은 상태로 창문 쪽에 언래블 멤버들이 붙어 있었다.
다들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은 듯했다.
입구 쪽에는 우진이 의사 가운을 입은 채 기절한 누군가를 바닥에 밀어놓고 소화기를 들고 있었다.
종범과 우진이 불을 끄려 애쓰는 사이, 새벽 멤버들도 달려왔다.
“그 새끼 잡아, 가영아!”
“너 뭐야!”
가영은 의사 가운을 입은 인간의 멱살을 붙들고 흔들었지만, 이미 정신을 잃은 인간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윤혁아! 안돼!”
“놔, 형! 얘들아!”
세비는 병실 안으로 뛰어들려던 키스를 붙잡고 진정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키스의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늘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던 키스는 겁에 질려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팔을 허우적거리는 걸 세비가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인간들의 외침이 사방에서 울리고 너무 많은 소리로 정신이 없던 그때.
지환이 침착한 목소리로 포잉을 불렀다.
‘포잉, 믿을게.’
그래, 나만 믿어라. 계약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포잉은 흔들리던 정신을 꽉 움켜쥐었다.
어린 계약자가 포잉을 믿는다고 말했다.
자신보다 배는 더 놀랐을 작은 인간이 애써 태연한 척 꾸며내고 있는데 포잉이 멍청하게 굴 수는 없다.
‘상황 설명 좀.’
‘저 사람이 뭔가 구슬 같은 거랑 라이터를 던졌는데, 경환 형이 물병을 던져서 쳐냈어.’
하준과 영빈이 가장 앞에, 그리고 그 옆에는 경환이 지환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얼마나 강하게 쥐고 있는지 붙잡은 손이 하얗게 질린 것 같았다.
‘구슬이 물병이랑 닿으면서 바닥에 떨어지더니 불꽃이 저렇게 타오르기 시작하더라. 다행히 더 다가오진 않는데 꺼지지도 않아.’
그들 뒤에 힘찬이 세빈을 품에 꽉 끌어안고 있었고, 병실 밖의 인간들은 소화기로 불을 끄려 애쓰고 있었다.
119는 언제 오냐는 외침과 환자들이 대피하는 소리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얘들아! 창문 쪽에 꼭 붙어 있어!”
“금방 소방서에서 올 거야!”
“몸 낮추고 코랑 입 막아!”
소화기로 아무리 애를 써도 잡히지 않는 이상한 불이었지만,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밖에 인간들은 정신이 나간 듯 악을 쓰며 멤버들에게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병실 끝에 모여있는 멤버들의 얼굴은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어리게만 보였던 인간 아이들이 이 자리에서 가장 침착한 얼굴로 서로를 붙들고 있었다.
‘포잉,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일반적인 방법으로 꺼질 불이 아님. 기다려.’
마치 불기둥을 기준으로 세상이 분리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포잉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했다.
저 불을 포잉이 억누르는 건 가능하지만, 그건 자연스럽지 않다.
아직 포잉은 인간들과 합을 맞춰본 적이 없기에 좀 더 세심한 제어가 가능한 상급 혹은 장로들이 필요했다.
지환은 인간들 틈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야 할 아이다.
이상한 일이 지환의 주변에서 계속 일어난다면 어쩔 수 없이 위화감이 든다.
포잉은 지환이 사람들 속에서 오래도록 행복하기를 원했다.
포잉은 재빨리 포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새벽을 지키던 상급 요정들은 이번 일의 마무리 때문에 그쪽으로 불려간 터라 요정은 포잉 뿐이었다.
포잉이 급히 메시지를 보내고, 매캐한 검은 연기가 아이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바람의 방향을 틀었다.
조심스럽게 열린 창문으로 흘러나가도록.
연기 때문에 콜록거리던 멤버들의 숨소리가 조금씩 진정되었다.
“저희는 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
몸을 낮춘 멤버들은 최대한 불길과 멀리 떨어진 상태라 멀쩡한 편이었다.
지환은 병실 밖의 인간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떤 조작을 해둔 건지 불길에도 스프링클러는 작동하지 않았다.
붉은 혀를 날름거리듯, 불길은 계속 타오르기만 했다.
‘너한테도 불이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보인다고 했지?’
‘응.’
‘영감님이 곧 올 거야. 그때까지 아주 잠시만 기다리면 된다. 내가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지?’
‘응. 나 얌전히 기다렸어.’
분명 무서울 텐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커다란 불길이 일렁이는데 두렵지 않을 리 없었다.
사전에 자기들끼리 무슨 다짐이라도 한 것처럼, 지환도 언래블 멤버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떨리는 몸이나 생리적으로 흘러내리는 눈물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지환은 계속해서 불길을 노려보고 있었고, 경환은 그런 지환을 품에 안았다.
혹시라도 위험한 행동을 할까 염려한 듯했다.
영빈은 등 뒤에 동생들에게 쉴 새 없이 속삭였다.
“괜찮아. 조금만 기다리면 곧 나갈 수 있어.”
하준은 그런 영빈의 떨리는 손을 동생들 몰래 꽉 잡아주었고.
실제로도 꺼질 듯 위태로운 것 붉은 불길뿐, 푸른 불꽃은 조금씩 더 커지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와 장비를 갖춘 소방대원들이 도착했고, 창문을 통해 구조할 테니 아이들에게 피하라고 했다.
“이불! 이불 뒤집어써!”
우진의 외침에 지환이 발치에 있던 이불을 멤버들 머리 위에 씌웠다.
그 상태로 최대한 벽에 붙어 창문과 거리를 벌린 멤버들.
포잉은 저들이 이 불을 끌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니 어서 포포가 와야 했다.
‘결국 이렇게 됐구나.’
‘늦었잖아요!’
‘그쪽 건물이 폭발해서 수습하다 건너왔다, 이 녀석아.’
그 호텔에 무슨 장치를 해둔 건지, 결계를 해제하자마자 강한 폭발이 있었다.
인간들이 휘말리지 않도록 그 자리의 모든 요정과 명계 사자들이 달라붙어야 할 만큼 큰 폭발이었다.
그 와중에 포포만 급히 빠져나온 것.
포포는 협소한 장소 탓에 인간 형태로 몸을 바꾸고 있었다.
소화액을 퍼부어도 좀처럼 잡히지 않는 푸른 불꽃.
다른 인간들의 눈에는 모두 붉은 불꽃으로 보일 테지만, 포포와 포잉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갈 곳을 잃어버린 영혼의 원망이었다.
여자는 복수를 이루고서는 속이 시원해졌다고 믿었지만, 지금 남아 타오르는 불꽃이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가장 밑바탕에 고여있던 응어리를 정작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원망으로 포장해버렸다.
이제 와서는 깨닫게 해줄 방법조차 없어졌지만.
‘우리 애들 다 타죽는다! 청승 그만 떨고 빨리 꺼요!’
하지만 그건 포잉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문제였다.
그런 넓은 시야로 보는 거야 장로들로 족하다.
자신은 초급 요정이니, 자신의 계약자만 챙기면 됐다.
‘너도 할 수 있을 거다.’
‘뭐요?’
한시가 바쁜데 포포는 그런 기색이 없어 포잉은 속이 터졌다.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네가 해야 할 일이란다, 포잉.’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네 계약자가 믿는 게 나냐, 아니면 너냐, 이놈아!’
포포의 일갈에 포잉은 안절부절못하던 몸짓 그대로 굳었다.
‘겁을 내는 건 너냐 아니면 저 지환이라는 아이더냐.’
포포는 포잉을 안아 올리며 지환에게 눈인사했다.
‘아가, 포잉. 너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단다. 이번에도 네가 네 손으로 계약자를 지켜내는 게야.’
포포는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포잉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불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자, 네 아이를 지켜보자꾸나. 이렇게나 기특하게 너를 믿고 있지 않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환은 여느 때처럼 포잉에게 미소 지으리라는 것을.
밖에서는 몸을 낮추라는, 지금 창문을 깰 거라는 외침이 들렸다.
줄어들지 않는 푸른 불꽃 때문에 소방대원들이 애를 먹고 있었다.
멤버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이불을 꽉 쥐던 그때, 비죽 열려있던 창문 틈을 쥐고 밖에서 문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포잉은 홀린 듯이 기운을 흘려보냈다.
불길 위로 쏟아지는 소방액을 감싸서, 격렬하게 저항하는 푸른 불꽃을 조금씩 눌러 내렸다.
그렇게 포잉의 기운과 부딪힌 불꽃은 여태까지 버틴 것이 무색할 만큼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마치 그 모습은 밀려오는 파도에 허물어지는 바닷가의 모래성처럼 덧없어 보였다.
점점 더 짓눌릴수록 불꽃 사이사이에서는 성별조차 알 수 없는 비명이 흘러나왔다.
소원 요정에게만 들리는 비참한 외침이었다.
‘옳지, 아주 잘하는구나.’
포포는 포잉이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 깊게 상황을 살피며 기운을 흘려보낼 방향을 조금씩 틀어주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잔인하고 이기적이었던 여자의 흔적은 천천히 세상에서 지워져 갔다.
그 사이 멤버들은 소방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부서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지환이 밖으로 나가기 직전 돌아본 포잉은 어느 때보다 환한 빛에 휩싸여 있었다.
‘중급 요정이 된 것을 축하한다, 포잉.’
포포는 아직도 멍청한 얼굴을 한 포잉을 바라보며 다정히 웃었다.
* * *
“얘들아! 무사하니? 괜찮아?”
“실장님!”
“저희는 괜찮아요.”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기자들이 가득했기에, 우진 형이 급히 병원 직원분들의 도움을 받아 병실 한 곳에 우리를 모아두었다.
불이 났던 것에 비해 우리는 조금 긁힌 상처뿐이라 상태를 보러 오셨던 의사 선생님조차 당황할 정도였다.
우리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잠깐 일 때문에 자리를 비웠던 팀장님은 세빈이를 보자마자 펑펑 우셨다.
그리고 그사이 도착한 정윤 실장님.
“세상에, 이게 다 진짜 무슨 일이니.”
얼마나 급하게 오신 건지, 늘 깔끔했던 실장님이 겉옷은커녕 실내화를 신고 달려오셨다.
매니저 형들과 우리가 무사한 걸 확인하자 기운이 빠진 건지 병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실장님.
종범 형이 바로 잡아드린 덕분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너희 진짜 다 무사한 거 맞지?”
“네. 저희는 무사해요. 우진 형이랑 종범 형이 좀 다쳤어요….”
불 안쪽에 있었던 우리는 비교적 멀쩡한 데 반해, 매니저 형들은 팔에 약간의 화상을 입었다.
“우린 괜찮으니까 너희 몸이나 신경 써.”
“어떻게 그래요….”
“얘들아! 우진아!”
“아, 대표님 오셨네.”
우진 형이 지친 얼굴로 하준 형의 어깨를 토닥이는 사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실장님은 언제 주저앉았냐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매무새를 점검했다.
“저 인간한테 이런 꼴을 보이는 날이 오다니.”
“네?”
“못 들은 척해, 이놈들아.”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실장님은 역시나 평소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곧이어 벌컥 열린 병실 문, 그리고 대표님과 새벽 형들.
곧장 우리에게 달려들어서는 어디 하나 다친 곳은 없는지 한참 동안 확인한 후에야 죄다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 광경이 뭐라고 자꾸만 마음이 풍랑이 이는 바다 위 작은 배처럼 흔들거렸다.
“너희가 무사하니 됐다…. 무사하니 됐어.”
대표님은 고장 난 녹음기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며 벌게진 눈가를 연신 쓸어내렸다.
가영 형은 평소와 달리 잔뜩 굳은 얼굴로 찬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몇 번이나 손을 뻗어 몸을 만지고, 체온을 확인하면서도 불안한 얼굴을 했다.
슬쩍 빠져나오려던 찬이는 형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결국 포기해야 했고.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너희를 잃는 줄 알았어.”
키스 형은 연신 마른세수하다 간신히 한마디를 꺼냈다.
떨리는 목소리로 어렵게 꺼낸 말들이 너무 낯설어서, 흘러넘치는 감정이 무거워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건강검진 받으려다 졸지에 줄초상 치르는 줄 알았잖아.”
“너는 말을 해도 꼭!”
잔뜩 얼어붙어 있던 분위기가 가영 형의 한마디에 간신히 풀어졌다.
가영 형의 등짝을 후려치는 세비 형, 겨우 웃음이 돌아온 가영 형의 얼굴.
그제야 우리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고생했다. 진짜.”
“침착하게 잘했어. 이제 쉬어도 괜찮아.”
실장님과 팀장님의 떨리는 목소리가 우리를 감싸 안은 그때.
그때까지 버티던 멤버들이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비틀거리며 하나, 둘 침대 위에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저희… 조금만.”
“너무 피곤해요, 팀장님….”
“응. 자고 일어나면 평소랑 똑같을 거야.”
순식간에 익숙한 어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