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29)화 (429/456)

429. 기적(4)

드라마 ‘영원한 밤’은 이미 여러 작품을 흥행시킨 드라마 작가와 PD의 합으로 시작 전부터 인기를 끌었다.

근현대사의 가장 아픈 부분을 시대 배경으로 삼아, 그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을 섬세한 붓질로 그려냈다.

혼돈의 시기.

자고 일어나는 아침마다 새로운 절망이 꽃피우던 날들.

그저 숨만 붙어있는 오래된 고목의 비명처럼.

잡초가, 들풀이 자신을 밟아 죽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척 하찮았다.

그저 짓이겨진 살점과 핏물을 상대의 신발에, 바짓단에 물들이는 것뿐.

하지만 옅은 풀물이 차곡차곡 쌓이면 더는 그 옷은 입을 수가 없을 것이다.

민초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일이었다.

풀물을 들이고 들여서 입고 있던 옷을, 신발을 못 쓰게 만드는 것.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특별한 신분을 가진 특출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었고, 부당함이 무엇인지 분노가 무엇인지 알아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한줄기 들꽃이, 잡초가 거대한 초원을 만들어갔다.

그래서 드라마 시작은 넓은 들판에 드문드문 주인공들이 서 있는 장면이었다.

각자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표정을 짓고, 의상을 입고 넓은 들판에 흩뿌려놓듯 서 있었다.

열심히 홍보했던 덕인지 드라마는 시작부터 반응이 좋았다.

유명한 아이돌 노래를 OST로 썼다더니, 생각보다 그 곡도 잘 어울린다는 평을 받았다.

아이돌 팬덤이 아닌 대중에게 그렇게 ‘그믐달’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오늘.

드라마 공식 채널에 OST 특별 영상이 공개되었다.

[소란스러운 밤, 우리는 눈을 감아요.]

미성숙한 소년의 목소리가 슬픔을 삼킨 듯 노래를 시작했다.

달빛이 희미하게 쏟아지는 벌판, 군복도 아닌 교복을 입은 소년들이 달린다.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욕설과 일본어.

제일 앞장서 달리던 소년들의 몸에는 핏물이 배어 나오는 붕대가 둘려 있었다.

- 탕!

뒤에서 달리던 아이 하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쓰러진 아이는 뛰어가는 친구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저 멀리 도망가서 그들만이라도 무사하길.

쓰러진 소년은 동네에서도 수줍음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

형제가 많은 집의 막내라 유독 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어려워했던 순한 아이였다.

소년, 세빈은 울컥 피를 토하며 입을 열었다.

[그 짧은 날을 힘껏 피었으니, 이제 그만 쉬어도 된다고]

아이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못했지만, 바람이 그 대신 노래했다.

[유난스레 바람이 울던 날, 모두 저버린 꽃처럼.]

들판을 휩쓰는 거친 바람 사이, 사이로 다 자라지 못한 비명이 흩어진다.

검은 교복은 동백보다 붉은 피로 물들어가건만, 달빛이 희미해서 그저 검어 보일 뿐이었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울음을 삼키며 품 안을 더듬었다.

이들 중 몇몇은 다른 곳에 이 소식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지들이 이 들판에 숨을 놓았다.

[단단히 걸어둔 새끼손가락, 굳건한 맹세가 있으니 괜찮다 했죠.]

한편, 초조하게 그들을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다.

세상이 흉흉했다.

저번 주에는 건넛마을의 아무개가 죽었다고 하고, 오늘은 뒷마을의 김 씨가 끌려갔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풍랑에 휩쓸려 살자고 나를 놓기에는 억울했다.

억울한 이들이 뜻을 모았고, 조선 각지의 억울함이 함께했다.

[잠들 수 없는 밤]

아이들조차 억울함을 알아 발 벗고 나서는데 어른이 돼서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대문 밖에 서서 하늘과 골목 어귀를 기웃대던 그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대를 놓을 수 없어, 잠들 수 없었던 밤.]

엉망이 된 교복 차림의 소년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재빨리 달려가 소년을 부축해 집 안으로 들였다.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에는 핏자국을 지웠다.

소년의 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남자는 직감했다.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쏟을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밤들]

덜덜 떨리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 대한 독ㄹ….

소년의 숨 사이로 생명이 흘러내렸다.

- 어, 어머니….

소년의 손을 꽉 잡고 있던 남자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하니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소년의 품에서는 꺼낸 것은 태극기에 쌓인 밀지들이었다.

어설픈 솜씨로 그려낸 아름다운 태극기가 피로 흠뻑 젖어있었다.

눈도 감지 못한 앳된 얼굴이 서럽다.

이 소년은 많은 아이에게 의지가 되어주던 듬직한 소년이었다.

그렇게 소년, 하준은 마지막 숨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보지 못한들, 꽃이 아니 피던가요]

일본 학생들에게 희롱당하는 조선 여학생.

그에 분개한 조선 남학생들의 항의, 싸움, 그리고 이어진 불합리한 처벌.

오로지 조선의 학생들만 처벌받는.

[듣지 못한들, 그대 오는 걸음 모를까]

그동안 억눌러왔던 마음이 터져 나와 대규모 항의로 번졌다.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했고,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점차 격렬해지는 항의에 돌아오는 건 더 거친 폭력.

[내 걱정일랑 지는 달 아래 묻어두고 내 손을 잡아요.]

지하에 있는 비밀 장소에 모인 소년, 소녀들은 차가운 빛을 뿌리는 전등 아래서 궐기를 결의했다.

두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울음을 터트리는 이도 있었고, 손을 떠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소란스럽던 밤, 함께 눈을 감아요.]

같은 심장이 뛰고 있는 한, 우리는 모두 한목숨이고 동지라고 약속했다.

달도 뜨지 못한 밤, 울상을 한 어린 여동생에게 꽃을 따다 주며 영빈이 웃었다.

[기나긴 밤, 혼자는 외로울 테니 함께 꽃잎을 세어보아요.]

아직 많이 어린 동생은 왜 자기만 두고 모두 집을 나서는지 알지 못했다.

한 명, 한 명, 자신이 맡은 역할을 다하며 총칼에 망설임 없이 몸을 내던졌다.

경환은 날아오는 칼날을 막을 팔을 잃었기에 몸을 날려 동생, 힘찬을 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였고, 뿌옇게 변한 세상이 이윽고 붉은 안개처럼 번졌다.

여동생에게 꽃을 따다 주며 다정히 웃던 영빈도 붉은 안개가 되었다.

붉은 풀물로 그들을 뒤덮기를 바라며, 그렇게라도 약탈자들을 내쫓길 바라며.

[온 세상 눈물을 그러모아 강을 만들까, 바다를 그릴까]

순경들에게 붙들려 고문당하던 소년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소년, 지환은 그저 대청마루에 앉아 자신을 기다릴 여동생을 떠올렸다.

다시 책을 읽어주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비보를 전해 들은 부모들은 통곡했다.

누군가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고, 누군가는 누런 종잇조각이 전한 죽음을 움켜쥐었다.

[일렁이는 숨을 잡아 저 달을 채울까]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꾸렸다.

숨고 피하기만 해서는 잃기만 할 뿐이라는 걸 너무 뼈저리게 알아버렸다.

[오래된 달이 뜨는 밤, 나는 이미 그대 앞에 있을 테니]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모든 것을 털어 더 많은 동지를 찾아갔다.

[기나긴 밤, 혼자는 외로울 테니 함께 꽃잎을 세어보아요.]

화면은 빠르게 흘러가고 어쩌면 최후의 날일 지도 모를 어느 날이 되었다.

[꽃바람에 꿈결처럼 웃던 그대]

홀로 남아있었던 어린 여동생은 어느새 총을 든 한 사람의 의병이 되어있었다.

[손톱 달이 뜬 이 밤에도]

그녀와 동지들 뒤로 먼저 그 길을 걸었던 이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대 외롭지 않도록 손잡아줄게요.]

* * *

영상이 공개되는 걸 기다렸지만, 막상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심장이 울렁거려서 토해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악착같이 촬영에 임했다.

나도, 우리 애들도.

익숙하지 않은 연기에 몇 번이나 흙바닥을 구르고 이를 악물고 했다.

좋은 기회라는 걸 알아서, 놓치고 싶지 않아서 더 죽어라 열심히 했다.

비록 타락한 소원 요정이 나타나 두려웠던 시간도 있었지만, 멤버들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우리 애들… 어쩌면 연기 천재 아닐까?”

중얼거리니 포잉이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올려다 봤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일부러 멤버들과 떨어져 개인 연습할 때 영상을 봤다.

왠지 모르게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리고 영상을 본 후,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영상을 보면서 눈물을 찔끔 흘렸으니까.

멤버들이, 특히 찬이가 봤으면 놀렸을지도 모르겠다.

‘너의 그 팔불출은 왜 자꾸 자라기만 하는 거임?’

‘이건 팔불출이 아니라 진실이야. 포잉도 봤잖아! 우리 애들 연기가…. 하아, 예전에 못 했던 건 다 못 배워서였어.’

홀로 중얼거리며 아직도 울렁이는 심장 근처를 꾹 눌렀다.

“지금이라도 연기해 보라고 권할까?”

중얼거리며 영상을 한 번 더 볼까, 덮을까를 고민하던 그때.

“누구한테?”

“응?”

갑자기 홀로 있던 공간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하겸 형이 서 있었다.

“형?”

“오냐, 병아리야. 형 왔다.”

다정한 웃음, 부드러운 목소리 톤.

평소 같은 모습의 하겸 형이었다.

헛것이 보이나 싶어 눈을 깜박거렸다.

“형이 여기서 왜 나와?”

“왜, 형이 오면 안 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한 내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형이 성큼 다가왔다.

“다 정식 절차를 밟아서 온 거니까 너무 그렇게 유령 보듯 보지 말고.”

“갑자기 형이 튀어나오니까 놀라서 그랬죠.”

훌쩍 옆으로 다가온 형이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빨리 노트북을 덮어버리자 그마저 재밌다는 듯 하겸 형은 웃었다.

“전에 형이 말했잖아. 같이 작업해보고 싶다고.”

“어…. 그랬었죠?”

한창 새벽, 골든 아워, 멜트 형들이랑 아웅다웅할 때 나왔던 말이었다.

농담이겠거니 하고 흘려보내고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단우랑 둘이 앨범 내려고 준비 중인데 너도 좀 도와줬으면 해서.”

“에? 제가요?”

“응. 형은 진심이었는데, 우리 환이는 형을 못 믿었구나.”

짐짓 슬프다는 듯 어깨를 늘어트리는 하겸 형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언제부터 댁이 그렇게 상처받는 성격이었다고?

“놀리지 말고요. 진짜예요?”

형의 어깨를 툭 치며 툴툴대자 씩 웃던 하겸 형이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진짜지. 앨범만 내는 게 아니라 활동도 할 거야. 단우는 찬이 꼬시러 갔을걸?”

“단우 형이랑 같이 왔어요?”

“응. 단우 꼬시느라 힘들었다.”

우리 애들 영상 보면서 벅차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이 눈앞에 ‘쿵’하고 떨어졌다.

아니, 무슨 내 인생은 매번 이런 식이야….

스케줄 갔다 오면 갑자기 다른 사람이 일하자고 붙들질 않나, 친한 형들이 불쑥 찾아와서 일을 주질 않나.

어쩌면 나, 일복을 타고난 사람이었던 걸까?

갑자기 너무 슬퍼졌다.

일, 하기 싫다….

재밌지만 일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하기 싫어졌다.

가뜩이나 타락한 소원 요정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덕질하다 방해받아서인지 괜히 심술부리고 싶어졌다.

불퉁해진 내 얼굴을 본 하겸 형은 들고 온 생과일주스를 밀어주며 나긋나긋하게 말을 걸었다.

“솔직히 나도 전부터 환이랑 같이 작업해보고 싶었는데, 너희 바쁜 거 같아서 꾹 참고 있었거든.”

형이 이렇게까지 말하니까 삐쭉삐쭉 튀어나오려던 심술이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나야 자리를 어느 정도 잡고 있긴 하지만, 너희는 지금이 정말 중요한 시기니까. 그래서 응원만 하고 있었는데 형이 최근에 어떤 영상을 봤어.”

“영상이요?”

갑자기 튀어나온 영상이라는 말에 이번에는 호기심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응. 형이 평소에도 너희 영상을 좀 보는 편이거든.”

“아니, 부끄럽게 그런 걸 왜 봐요!”

“자주 만나지 못하니까 그렇게라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데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그짓말하지 말고요!”

“하하, 들켰어? 그냥 너희 모습이 좋아서 그랬지.”

하겸 형은 예상치 못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평소 사적으로 만날 때의 우리 모습은 무척 좋아하지만, 방송용 얼굴은 어쩐지 우리 같지 않아서 싫었다고.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 거 알지만 그래도 더 자연스러운 너희가 좋았다며 말해오는데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지금 뭐라는 거야, 이 사람이?!

“그러다 우연히 너희 팬 영상을 몇 개 보기 시작했는데, 다들 새벽이나 여진우는 말해도 우리는 잘 모르더라고.”

눈웃음짓던 형이 말했다.

“골든 아워랑 언래블 인연이 더 먼저였고, 우리가 얼마나 친한데. 억울하잖아.”

“네? 저기요?”

지금 형이 우리 덕질하다 성덕 인증하고 싶어서 왔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 맞아요?

“그래서 안 되겠다, 우리가 그동안 같이 활동을 안 해서 그렇구나 싶어서 머리를 좀 굴렸어.”

대놓고 솔직하게 말하는 하겸 형의 모습에 더 당황해서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원래 형은 뒤에서 흑막처럼 굴었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원래 같이하고 싶었으니까. 그러니까 같이 일해보자, 환아.”

“…어휴, 진짜. 부끄러운 소리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야 늘 너희에게 솔직하지.”

안 그러던 사람이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오자 심술이고 뭐고 뭐라 할 수가 없어졌다.

“같이 할거지?”

“아니….”

“안 할 거야?”

“해요, 한다고요! 에휴….”

한숨처럼 대답하자 하겸 형은 활짝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뭔가 속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너는… 아무래도 안될 것 같다, 계약자야.’

‘나 왜?’

‘아무것도 아님.’

포잉은 그저 평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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