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28)화 (428/456)

428. 기적(3)

여자, 카야노키 이치카는 자신의 지난 생을 기억한다.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는 첫 번째 생에서 유리를 만났다.

종달새처럼 어여쁘게 울던 자신만의 요정.

그녀가 태어난 시대에 홀로 사는 여자는 여러모로 위험했다.

재산이 많아도, 지혜로워도, 아름다워도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기 무척 쉬운 사냥감이었으니까.

여자의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여자는 많은 것을 배웠고, 세상을 바로 볼 수 있었다.

아비는 누구인지 모른다.

그저 여자에게는 어머니가 전부였고, 숲속 작은 집이 전부였다.

가장 안타까운 일은 어머니는 무척 아름다웠고, 여자도 어머니를 빼다 박은 것처럼 아름다웠다는 것.

누구나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조금 더 참혹한 일이었다.

우아하고 지혜로웠던 아름다운 어머니.

사람들은 그런 어머니를 흙발로 짓밟고 진창에 처박았다.

- 아가….

여자는 지금도 한숨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던 어머니를 기억한다.

모든 것이 어렸던 여자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여자는 어머니의 핏물과 살점이 꽃처럼 피어나는 광경을 지켜보며 울부짖었다.

두렵고, 두렵고, 두려운 시간.

더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악마들은 여자를 바라봤다.

아, 나는 지옥에서 태어난 거구나.

지나친 절망은 어머니의 피를 마시고 자라나 꽃피웠다.

이 세상에 사람은 없고 모든 이가 악마라면, 나도 악마가 되자.

사람은 죽으면 썩어버릴 뿐이니, 악마가 되어 잊지 말자.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면서도 마지막 순간 여자는 악마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웃었다.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사람으로 죽어간 어머니를 눈동자에 새기며 사람이었던 여자는 그날 절명했다.

그 후 만난 소원 요정이라던 작은 새.

처음부터 이렇게 유리와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다.

여자는 의심하고 원망하며, 자신이 쏟아낼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작은 새에게 토해냈다.

소원을 이뤄줄 거라면 저 인간들을 모두 자기 앞에서 갈가리 찢어 짓이겨달라고.

슬프게 울던 작은 새는 무슨 여자에게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도왔다.

작은 소원 요정 유리는 여자에게 숨이 되어주었고, 가족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유리의 애틋한 보살핌에도 여자 안의 절망은 사라지지 않고 졸아들어 단단해졌다.

여자는 지난 생의 원수들을 씹어먹기 전까지 내면에 뭉친 감정이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결국 여자는 해냈다.

지난 세계에 갈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영혼을 찾아내어 악마들에게 주었다.

복수의 순간은 달콤했고 무엇보다 상쾌했다.

다만 그 과정은 전혀 쉽지 않았고, 유리도 여자도 여러 금기를 범했다.

함께하는 동안 유리는 여자를 누구보다 깊이 사랑하고 이해했고, 여자에게는 이제 남은 것은 유리뿐이었다.

최후의 순간, 유리와 여자는 서로의 영혼을 묶었다.

언제가 되었든 다시 만나도록.

그리고 무수한 삶을 거쳐 드디어 다시 만났다.

바스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자신의 요정을.

여자로 인해 형태도 목소리도 잃은 가여운 유리.

만일 자신만 벌을 받았다면, 이치카는 소원 요정을 증오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리는 그저 자신을 도왔을 뿐인데, 소원 요정의 본분을 충실히 이뤘을 뿐인데.

왜 자신의 작은 요정까지 이렇게 비참해져야 하는가.

모두 타올라 재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이치카가 ‘공지환’을 인지했던 것은 아니다.

전생을 떠올리고 유리를 찾아 데려왔을 당시,

이치카는 소원 요정을 원망하는 것보다 눈앞의 유리를 돌보는 게 더 중요했다.

다시 만난 유리는 이치카에게 의지를 전달할 수 없을 만큼 무너져있었다.

혼이 조각나서 그 조각을 찾기 위해 이치카는 돈을 벌었다.

그녀는 돈으로 시간도, 목숨도 살 수 있었다.

다행히 부유한 집안에 태어났기에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여전히 이치카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의 겉가죽을 뒤집어쓴 무언가만 득실거렸다.

그래도 이치카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도 자신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우연히 언래블을, 공지환을, 그리고 그 곁의 소원 요정을 보았다.

처음 마주하는 다른 소원 요정과 계약자였다.

처음엔 그저 자신과 결이 다른 삶을 살아가는 그가 신기했다.

하지만 유리가 그 요정을 보자 발작을 일으켰다.

자신의 혼을 조각내었던 장로 요정의 흔적이 깊이 남아있다며 공포에 질려 밤새 울었다.

이치카의 가여운 요정은 이제 정신조차 온전치 못했다.

공지환과 그 소원 요정이 이치카의 적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치카에게는 유리만이 소중했기에, 유리를 위협하는 존재는 적이다.

그때부터 이치카는 그들을 없애기로 했다.

유리가 아팠던 만큼 그들도 아프길 바랐다.

“유리, 울지마…. 많이 아파?”

노트북 화면에서 언래블에 관한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돌이라는 직업 특성상 그들의 정보를 얻는 건 무척 쉬웠다.

푸른 불꽃이 이치카의 손바닥 위에서 가늘게 떨었다.

이치카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불꽃 위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이번엔 내가 유리를 지킬게.”

이치카는 노래하듯 소중한 숨에게 속삭였다.

* * *

“진우 형, 괜찮아?”

“너네 이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아?”

“형은 그게 문제야, 지금?”

찬이가 깁스한 팔을 흔들며 장난스럽게 웃는 진우 형을 향해 왈칵 성을 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무슨….”

세빈이도, 준이 형도, 멤버들 모두가 진우 형을 걱정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콜라보 앨범의 예약판매가 시작되었고, 무대를 위해 형들과 피를 토할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기준들이 높은지 형들을 만족시킬만한 소리가 나올 때까지 바짝 조여지고 있었다.

그때, 우진 형이 조금 심각한 얼굴로 들어와선 진우 형 상황을 전해주었다.

진우 형이 영화 촬영 중에 다쳐서 입원했다는 소식을.

놀란 우리가 연습을 접고 팀장님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우진 형이 막아섰다.

이미 허락하셨으니 조심해서 가자고.

우리의 평소 행동 패턴을 익히 알고 있던 팀장님이 우진 형에게 미리 다 말해두었던 것.

새벽 형들과 우리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정작 병실에서 마주한 진우 형은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잠깐 당황하긴 했지만.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그러니까요. 여태 큰 사고 없이 잘 지내 왔는데.”

세비 형이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진우 형에게 캐물었다.

이어진 설명을 들은 우리는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우 형은 양수리 세트장에서 촬영하던 중이라고 했다.

학교처럼 꾸민 세트장에서 촬영을 이어가던 중, 갑자기 천장에서 조명이 떨어졌다고.

“조명이 갑자기요?”

“응. 천장 조명 떨어지면서 난리도 아니었다. 난 뼈에 금 간 것뿐이지만, 유리 조각 박혀서 수술한 스태프도 있어.”

그래도 정말 큰일 난 사람은 없다며 다행이라고 웃는 진우 형.

팔에 금이 간 게 큰일이 아니라니, 이게 뭔 소리야.

속이 답답하고 한숨이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야, 아무리 제작비 줄이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어설프면 안 되지.”

“사전 조사했을 때는 멀쩡했다니까요.”

가영 형은 눈살을 찌푸리며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며 투덜거렸다.

진우 형이 우리에게는 다 말하지 않았지만, 새벽 형들은 무언가 조금 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이것도 그 새끼들 때문인 거야?

경환 형의 이상을 확인한 포잉과 나는 외부에서 스며들어오는 그들의 힘에 대응할 필요를 느꼈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다가와 우리 애들에게 영향을 끼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궁리하다 포잉이 내놓은 해결책은 평소 지니고 다니는 물건을 구해오라는 것.

그 물건에 멤버들을 보호할 수 있는 주문을 걸어오겠다는 것이었다.

포잉은 할 수 없지만, 장로들은 가능할 거라고.

하지만 늘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을 찾는 게 더 어려웠다.

핸드폰도 귀찮다고 잘 챙기지 않는 멤버가 있을 정도니, 당연히 액세서리도 즐겨 하지 않았다.

우리 애들이 이렇게 물욕이 없는 애들이었구나.

역시 우리 애들이구나 하는 감탄하던 나는 포잉에게 욕을 한참 얻어먹고 다시 머리를 굴렸다.

그나마 자주 챙기는 게 다 같이 맞춘 반지인데, 그마저도 하는 날도 안 하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내게 포잉이 한숨 쉬며 말했다.

차라리 네가 팔찌 같은 걸 선물하라고.

무난해서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으로.

경환 형은 한번 끼워주면 계속할 것 같긴 한데 찬이나 세빈이는 옷차림에 신경 쓰는 애들이라 안 할 것 같았다.

내 얘기를 들은 포잉은 미묘한 얼굴이 되었다.

‘너는 눈치가 있다가도 없구나.’

한탄하듯 중얼거린 포잉은 속는 셈 치고 해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때부터 눈물겨운 쇼핑몰 뒤지기가 시작되었다.

모든 멤버가 최대한 안 빼고 숙소나 회사에서만 빼야 했다.

적어도 이 일이 모두 끝나기 전까지.

그러자니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 각자 쥐여줘야 할 것 같았다.

처음에는 기성 제품을 사서 나눠 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의미를 부여하자니 기성 제품은 좀 약했다.

결국 직접 만드는 수밖에.

그렇게 눈물겨운 팔찌 제작기가 시작되었다.

하다 하다 이제는 팔찌 조공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건만.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만들었다.

끈을 엮고 작은 펜던트를 달고.

멤버별로 끈의 색은 달라도 같은 펜던트를 달았다.

직접 만들고 요정 장로의 축복까지 받은 세상에 둘도 없는 팔찌가 완성된 날.

멤버들에게 나눠주고 늘 끼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소원 팔찌 같은 거라며 건네주었다.

생각과 달리 멤버들은 장난치거나 놀리는 기색 없이 전부 팔찌를 냉큼 찼다.

영빈 형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울 것 같은 얼굴을 해서 날 당황하게 했고.

그렇게 멤버들을 팔찌를 선물하자, 경환 형의 악몽도 사라졌다.

그렇게 멤버들을 지킬 보호막이 생겼다고 안도한 게 불과 며칠 전인데.

이번에는 진우 형이 다쳐서 병원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옅어졌던 죄책감이 다시 목 끝까지 차오른다.

누군가 목을 꽉 틀어쥔 것처럼 숨이 모자랐다.

“우리 병아리, 왜 그런 표정이야.”

별거 아니라고 다친 팔을 흔들어 보였지만, 그런 사고가 별거 아닐 리 없었다.

진우 형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다쳤다고 했다.

주연 배우가 다쳤으니 촬영은 미뤄질 것.

저예산으로 빠듯하게 돌아가는 현장이라던 말을 생각해보면, 그 현장의 모든 사람이 피해를 보는 셈이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나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좀먹었다.

너무 미안해져서 차마 진우 형 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 상황에서도 우리 멤버들만 생각했다.

우리 애들이 나 때문에 다치게 될 것만 염려했다.

우리 애들을 노릴 수 있다면, 내 주변 사람들도 노릴 수 있다는 걸 간과했다.

내가 진우 형을 지키지 못했다.

‘계약자 놈아. 이상한 생각 하지 마라.’

‘하지만….’

‘하지만이고 나발이고 환자 앞에서 왜 네가 죽상임?’

포잉이 냉정한 목소리로 나를 혼냈다.

정신 차리라고.

그때 진우 형이 팔을 뻗어 내 손목을 잡았다.

“환아, 형 진짜 별로 안 다쳤어. 이런 거 금방 나아.”

“그짓부렁이잖아요.”

“얼씨구? 그건 또 무슨 말투야.”

“왜 네가 더 울상이야.”

늘 그랬던 것처럼, 진우 형은 아무렇지 않게 다정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던 내가 투정 부리듯 중얼거려도 그저 웃었다.

새벽 형들까지 슬그머니 내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툭 건드렸다.

“우리 병아리가 진우 엄청 좋아하나 보네.”

“당연하죠. 형이랑 영화 찍으면서 사나이들끼리의 우정을 쌓았다고요.”

다친 건 내가 아닌데 사람들은 울상짓고 있는 내게 신경 쓰고 있었다.

하다못해 다친 진우 형도.

겨우 목구멍으로 넘어오려는 죄책감을 삼키며 장난 섞인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제야 소리 내 웃는 찬이, 세빈이.

어슬렁거리며 병실을 돌아다니는 가영 형, 키스 형.

세비 형과 준이 형, 영빈 형, 나는 진우 형 옆에 앉아 사정을 캐물었다.

소중한 일상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웃는 동안에도 내내 몸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피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해서는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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