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30)화 (430/456)

430. 기적(5)

하겸 형이 질투 난다고 했던 것들이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길은 없다.

다만, 같이 곡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말은 진심인 듯했다.

형은 늘 느긋한 척했지만, 굉장히 철두철미한 성격이라는 걸 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모든 상황을 고려해보고 이해득실을 따져보는 사람이니까.

여태까지 형이 출연했던 프로그램, 협업 목록, 평소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평소에는 말랑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사람들을 대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말랑한 얼굴은 비즈니스용이라는 것을.

음악방송에서 만났을 때, 라디오에서 다른 게스트와 마주했을 때 등등.

형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이제는 제법 봤으니까.

더군다나 멜트와 일이 있으면서 그 추측들은 점차 확신이 됐다.

하겸 형은 자신만의 좁은 선 안에만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런 사람이 나나 우리 애들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 어쨌든 좋은 일이니까.

“또 딴생각하지.”

“아니거든요?”

“눈동자 흔들리는 거 다 보인다.”

“아니라니까요. 그냥 여태까지 형이랑 지냈던 날들을 떠올렸어요.”

“그래?”

형이 내밀었던 서류를 컴퓨터 책상 한쪽에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형은 바로 일 얘기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우리 영상을 봤던 일을 떠들고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당사자 앞에서 그걸 말하면 내가 쪽팔려요, 안 쪽팔려요?

형이라 차마 뭐라 하진 못하고, 그저 다른 생각으로 머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근데 이 귀신같은 형은 용케 그걸 알아채고는 눈치를 주고 있었고.

결국 하겸 형에게 형들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더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씩 웃는 얼굴이 잘생겨서 더 얄미운 사람.

세비 형이 조각 같은 미남의 정석이라면, 하겸 형은 확실히 준이 형과 느낌이 비슷했다.

성격보다는 외모가 주는 분위기가.

온화해 보이는 짙은 밤색 눈동자, 살짝 쳐진 눈꼬리, 늘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

물론 그 속이 새카만 사람이지만 생긴 것만큼은 따뜻해 보였으니까.

“그래서 어떤 앨범을 만들 생각인데요?”

“뭐, 대충 보고용으로 내가 끄적거린 건 저 서류에 있고….”

흥얼거리듯 말하던 하겸 형이 갑자기 방긋 웃었다.

지극히 불길한 느낌의 미소라 순간 소름이 돋았다.

뭐야,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자세한 건 우리 다 같이 이야기해보지 않을래?”

“그래서 결론은 아무것도 없다?”

“뭐, 콘셉트야 회의 과정에서 엎어지는 거, 흔한 일이잖아?”

그래도 뭔가 생각이 있어서 일을 벌이는 줄 알았더니, 그건 연막이었고 없단다.

“환장하겠네, 진짜….”

“오, 우리 병아리 많이 컸네. 이제 형 앞에서 그런 말도 하고.”

“아, 쫌!”

일하기 싫다, 진짜로.

이 형이랑 일하면 왠지 화병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밖으로 새어 나왔고, 하겸 형은 그게 또 재밌다고 낄낄대고 있었다.

- 똑똑

“네, 누구세요?”

“환아, 형이야.”

“들어간다!”

악당같이 웃어대던 하겸 형의 웃음소리 사이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날 구해줄 사람이 왔구나!

발랄한 우리 찬이 목소리와 함께 단우 형을 닮은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찬이 혼자 왔으면 벌컥 열고 들어왔을 텐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반겼다.

“형, 왜 이제 왔어요….”

“저 영감탱이가 괴롭혔어?”

“야, 내가 영감님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지 않냐?”

“형은 속이 썩었어.”

“그게 무슨 상관이야!”

단우 형이 오자마자 하겸 형은 눈을 반짝거리며 단우 형을 슬슬 긁었다.

그 틈에 잽싸게 뒤로 빠진 나를 찬이가 이상하다는 듯 봤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할 거야?”

“응. 해보려고.”

“잘 생각했어.”

찬이는 생각보다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이 더 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야기가 잘 풀린 모양이었다.

우리 찬이는 자신의 목소리에 늘 확신이 없다.

더 잘할 수 있고,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는데 자신을 믿지 않았다.

그 틀을 깨주고 싶어서 조금씩 두드려왔고, 이제는 제 발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우리 애가 이제는 겁내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기특한 놈.

뿌듯한 마음에 찬이 어깨를 툭 건드리자 왜 그러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우리 모지리가 이제 제법이네.”

“아씨, 그놈의 모지리!”

히죽거리며 모지리라고 부르자, 울컥했던 찬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애정 표시라니까. 특별히 지어준 별명인데 왜.”

“내가 너한테 모지리라고 해도 그렇게 나오나 보자.”

“해도 돼. 마음껏 불러.”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하니 찬이는 천불이 난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그사이 단우 형과 하겸 형의 투덕거림도 끝났는지 형들이 우리를 돌아봤다.

“너희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였네, 미안해. 작업실에서 이거 참.”

“뭐 어때, 막내와 리더의 사이 좋은 모습인데.”

“형은 제발 그 입을 닥쳤으면 좋겠어.”

“단우야, 단우야. 병아리 앞에서 그런 말 쓰면 못써.”

아니, 아직 안 끝났나?

단우 형은 조금 전 찬이처럼 속이 터진다는 얼굴을 했다.

반면 하겸 형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조금 더 반짝반짝 해졌다.

저 형님은 남을 놀려야 살아나는 사람인가.

“자, 그러면 일 얘기를 해볼까.”

여러 사람 가슴에 불을 지른 하겸 형이 혼자만 산뜻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 * *

“공장에 불이 났다고요?”

“네. 다행히 금방 진압해서 다친 사람은 없다네요.”

“이게 무슨….”

정윤은 어질어질하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예약 판매를 시작하고 제작도 순조로웠다.

사전 물량이 어느 정도 제작된 상황에서 갑자기 제작사 창고에 불이 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최근에는 뭔가 안 좋은 소식만 자꾸 들려오는 기분이라 정윤은 무척 심기가 불편했다.

멤버들의 상태가 돌아가면서 좋지 못했다.

힘찬이 아팠고, 경환이 예민해졌었다.

그 사이 세빈이나 영빈처럼 원래 섬세한 성정을 가진 멤버들이 많이 힘들어했다.

지환은 어째서인지 잔뜩 풀이 죽어있었고, 하준은 그런 멤버들을 부둥켜안느라 힘들어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화재라니.

“최대한 빨리 상황 정리해서 공지 올리고 그쪽에 사람 보내서 수시로 상황 체크해요.”

“네. 도연이 보내놨으니까 금방 자세한 소식 보낼 거예요.”

정윤과 소현은 갑자기 꼬이는 상황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일본 회사의 제의를 거절한 뒤로 그쪽에서 은근히 여기저기 말을 흘린 건지 일본 활동도 쉽지 않아 보였다.

치졸한 수법이라고 욕을 한바탕 쏟아냈지만, 그런 것에 굴할 ON 엔터가 아니다.

어차피 ON 엔터는 늘 비주류에서 주류로 올라왔던 곳이니까.

다행히 JC 엔터가 계약 위반을 수습하면서 꽤 여러 정보를 넘겨주었다.

언래블의 해외 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알기에 현지에서 믿을 만한 파트너를 소개해 주기로 한 것.

다만, JC 엔터가 간과한 게 있다면, ON 엔터도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윤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만족할만한 정보를 움켜쥐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해외 활동을 하려고 움직인다는 건,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이 부분을 파악하지 못한 JC 엔터에서 수박 겉핥기 수준의 정보를 넘기려다 되려 덤터기를 썼다.

얍삽해 보이던 그쪽 실장을 떠올리며 정윤은 피식 웃었다.

‘실장씩이나 돼서 현장 파악하는 게 그렇게 느려서야.’

어설프게 넘기려다 덜컥 뒷덜미가 잡힌 셈이라, JC 엔터 쪽은 눈물을 삼키며 알짜 정보를 넘겨야 했다.

해외 활동할 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현지 활동을 보조해줄 사람이다.

그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는 정말 활동만 하면 되는데.

하필 이 시기에 이런 사고라니.

“애들 놀라지 않게 잘 전달해주고, 새벽 쪽에는 누가 갔어요?”

“제가 공문 보냈고, 우진 매니저가 갔어요.”

아무리 서로 친한 사이라고 해도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정식 공문을 보냈고, 더 자세한 이야기는 우진이 방문해서 잘 전달할 테니 일단 안심이다.

사고가 난 업체를 고른 게 ON 엔터였기에 수습할 책임도 ON 엔터에 있다.

“이제 별일 없이 잘 풀린다 했더니, 별일이 다 생기네요.”

“이것도 잘 넘기면 또 좋은 일이 생기겠죠.”

빠르게 대응하느라 정신없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 소현도, 정윤도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애들한테 가볼게요….”

“부탁해요, 소현 팀.”

정윤은 대표에게 보고할 서류를 챙기며 휴대폰을 들었고, 소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후면 촬영 갔던 애들이 도착할 테니, 놀라지 않도록 조심히 이야기해야 했다.

워낙 토끼나 사슴처럼 작은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순둥이들이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설마 이 일은 연관 없겠지?”

무거운 걸음으로 터덜터덜 걷던 소현은 문득 지환의 일이 떠올랐다.

“불, 불이라….”

성수라도 사다 뿌려놔야 하나 싶어 혼자 피식거리던 소현은 종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올 때 피로회복제 좀 사다 달라고.

아무래도 또 야근해야 할 것 같았다.

“집에 가고 싶다….”

* * *

“드디어 명계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구먼.”

“진작에 그럴 것이지.”

포포는 뚱한 얼굴로 툴툴대는 포잉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그치들은 자기 영역에서 꼼짝도 안 하려는 것들이라 이 정도면 굉장히 빠른 대응이었다.

소원 요정들도 자기 계약자 일이 아닌 이상에는 굉장히 느긋했다.

하지만 포잉은 그 사실은 홀랑 잊어버린 듯 명계의 늦은 일 처리를 탓하고 있었으니.

계약자가 생기기 전에는 자기 숙소에서 꼼짝도 안 하던 놈이 이러는 게 웃기기도 해서 포포는 포잉의 머리를 톡 건드렸다.

“그쯤 해두어라, 이 녀석아.”

“아, 왜요! 제가 틀린 말 했어요? 진즉 자기들 실수 파악하고 수습했어야죠. 그랬으면 내 계약자가 고생할 일도 없었을 텐데.”

그동안 제법 쌓인 게 많은 듯 우르르 말을 쏟아내던 포잉에게 포포가 천천히 답했다.

“계약자와 그 주변 아이들이 걱정되는 건 알겠다만, 감정적으로만 대처할 일이 아니야.”

포잉은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포포를 흘겨봤다.

장로 한 명이 가서 깽판을 쳐도 명계 측에서 꿈지럭대자, 결국 포포까지 가서 한바탕 뒤엎었다고 들었다.

얼핏 들은 바로는 명계의 궁 중, 손님들이 머무는 궁의 지붕이 날아갔다고.

담당자가 영혼이 훌쩍 떠나버린 듯 해롱해롱한 상태로 부서진 건물 잔해를 붙들고 울었다고 했다.

유서 깊은 건물이었나보다 하고 대충 한 귀로 듣고 흘려보냈다.

포잉의 양심을 찌르기엔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네에, 뭐. 두 번 이성적이면 명계를 부수겠어요.”

“크흠.”

포포도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던 것을 알기에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직접 가실 거예요?”

“내가 마무리하기로 했으니, 내가 가야지.”

“정말 괜찮겠어요?”

타락한 소원 요정이 난동을 부리는 일이 처음은 아니다.

긴 세월 동안 역사 이래로 묻어버린 이야기는 제법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계약자가 더 미쳐 날뛰는 일은 드물다.

그때 미련을 남기는 것이 아니었는데.

포포는 유리가 자라온 시간을 안다.

마음 여리고 순했던 작은 아이.

틈만 나면 포포의 머리 위나 앞발에 앉아 노래하듯 재잘거렸다.

착하기만 했던 유리가 감당하기에는 계약자의 원한이 너무 깊었던 걸까.

나란히 타락해버린 여자와 유리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기에 포포는 가슴이 아팠다.

그들의 계약을 끊은 것도, 여자의 영혼은 명계 보낸 것도, 유리의 처벌을 집행한 것도 포포였다.

“네 계약자는 어쩌고 있느냐.”

포잉은 포포의 눈동자가 슬픔으로 일렁이는 걸 알면서도 못 본 척했다.

말을 돌리는 걸 알면서도 포잉답지 않게 순순히 물러났다.

“지금은 괜찮아요. 잘 타일러 놨거든요.”

포잉은 자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피해 보는 것 같아 괴로워하던 지환을 떠올렸다.

그런 계약자에게 포잉은 이건 자연재해나 사고 같은 것일 뿐 그의 탓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더군다나 잘못이 있다면 애당초 소원 요정의 잘못 아니냐고.

지환의 슬픈 얼굴은 더 보고 싶지 않다.

포잉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곧.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