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78)화 (378/456)

378. 가자(2)

어영부영 낑낑거리다 보니 하루하루가 진짜 순식간에 지나갔다.

‘잘 먹겠습니다’ 보느라 새벽 형들 틈바구니에서 버둥거렸고, ‘낭만 가객’ 무대 준비하면서 구슬땀을 흘렸다.

기본 뼈대를 잡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인연’이 생각보다 애매모호해서 어려웠다.

그걸 사람들이 듣고 공감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것도 어려웠고.

오죽하면 영빈 형이 아이디어를 짜내면서, 이럴 거면 절절한 이별을 경험해볼 걸 그랬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해온 사람들이니 연습생일 때 연애했다 잘못 걸리면 독박 쓰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그 정도로 답답해했다.

그랬던 우리가 숨통이 조금 트였던 건, 세빈이의 한마디를 듣고 나서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별을 겪게 되는 무수한 경우의 수들.

그걸 각자 하나씩 생각해서 무대에 녹여보자고.

세빈이는 이사하면서 헤어져야 했던 소꿉친구를 떠올렸다고 했다.

장난감을 서로 주고받으며 이별의 증표로 삼았다던, 자기처럼 귀엽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흐릿할 정도로 너무 오래전 인연인데 아직도 종종 그때의 행복했던 일들이 생각난다고 했다.

찬이는 유독 예뻐해 주셨던 외할머니를 생각했고, 경환 형은 첫사랑을 떠올렸다.

물론 그 첫사랑이 유치원 때긴 하지만.

살면서 겪었던 무수한 이별은 어떨 때는 타의였고, 어떨 때는 자의였다.

사고로 가족들과 생이별 해야 했던 나는 타의에 가까웠고, 자신을 놓아버린 이전 지환이는 자의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런 감정들을 그러모아 머리를 맞댄 무대는 일단 우리 눈에는 그럴싸했다.

그 와중에 틈틈이 ‘파워 아이돌 게임’ 특별 무대를 위해 분홍 팀 멤버들도 만났다.

각자 팀이 찢어지는 바람에 경쟁 비스무리한 분위기로 우리 애들도 불타올랐다.

평소에는 으아아아 하면서 거실 러그 위에서 뭉그적댔는데, 팀별 회의할 때는 팀 사람들끼리 쑥덕거렸다.

이게 제법 긍정적인 효과도 불러일으켰는데, 일단 다 팀이 갈린 덕분에 개개인의 시야가 더 넓어졌다.

보통 때라면 ‘아, 나보다 형이…’, ‘나보단 누가…’ 이런 식이었는데 그런 게 줄었다.

어쨌든 언래블의 이름을 걸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런지 부담이 줄었다고 해야 할까.

평소에는 노래에 크게 욕심부리지 않던 찬이가 제법 또랑또랑하게 말을 하고 있으니 말 다 했지.

콘서트를 앞두고 나와 다른 멤버들이 쥐어짰던 데서 무언가 느낀 건지 고음을 내려 노력하기보다 안정적인 저음에 주력했다.

나는 키스 형이 편곡한 곡을 듣고 다시 한번 키스 형의 능력에 감탄했고, 인하 형의 시원시원한 창법에 반했다.

그 와중에 ‘Origin’ 멤버들이 기죽지 않도록 끌어다 놓고 쿡쿡 찔러 가진 실력을 토해내도록 구슬리기도 했다.

은근슬쩍 우리 팀 아이들을 찔러서 알아보니 다른 팀에 있는 아기들도 열심히 쥐어짜이고 있는 듯했다.

우리 애들이야 그렇다 쳐도 새벽 형들도 골든아워 형들도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잘 못 한다고 그냥 넋 놓고 있는 걸 그냥 내버려 둘 위인들이 아니었다.

제영 쌤이 늘 우리를 쥐어짜면서 하는 말처럼 마른오징어도 쥐어짜면 물이 나올 거라고 믿는 그런 인간들이다.

다행히 이온도 태인도 자기들이 잘하는 장르를 맡아서 하게 되니 의욕적이었다.

솔직히 그 둘을 빼면 우리 팀 사람 중에는 춤이 특기인 사람이 없기도 했고.

키스 형은 편곡과 악기에 특출났고, 인하 형은 노래가 정말 메인인 사람.

경환 형은 작곡, 랩이 특기고 나도 춤은 좀….

처음에는 이 아기들이 너무 의욕이 넘쳐서 난이도가 수직상승 했었다.

그런 아이들을 모습에 키스 형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고, 인하 형은 관절을 두드렸다.

두 형님의 무언의 협박에 시달린 나는 조용히 아기들에게 현실을 알려주었고.

그렇게 바쁘게 뽈뽈대다 보니까 촬영 당일이 되었다.

리허설이 후딱 지나갔고, 지금은 본무대를 위해 각자 자리에 예쁘게 앉아있었다.

그사이 오간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은근한 견제는 늘 겪어왔던 거지만 여전히 질렸고.

그걸 건전한 승부욕으로 포장하는 방송국의 모습은 늘 신세계였다.

역시 제일 입 잘 털고 사람 잘 갈구는 사람들이 모인 게 방송국인 것인가.

그렇게 생각이 이리저리 튀었지만, 긴장감이 모두 해소되진 않았다.

그래도 우리 애들도 이제 제법 방송국 물 좀 먹었다고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기특해서 좀 울컥울컥 심장이 울렁거렸지만, 다행히 이런 마음도 티 내지 않았다.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웃으며 말을 걸기도 했고, 카메라 위치를 기억했고, 서로를 믿었다.

사실 그게 가장 뿌듯했다.

이제는 형들도 동생들을 마냥 어리게 생각하고 걱정하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동생들도 형들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해내려고 했지만, 숨기지 않고 솔직히 의논했다.

그렇게 균형을 찾은 덕분에 준비 과정에서도 리허설때도 각자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문제는 늘 불안해하는 나였지.

하지만 늘 그렇듯 내 요정님이 우진 형 머리 위에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불안감이 많이 줄어들었다.

여차하면 포잉이 어떻게든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

다른 곳을 살피다 우연히 포잉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보며 혀를 차던 요망한 요정님은 금방 새침한 표정으로 고갯짓을 했다.

카메라 신경 쓰라는 얼굴이었다.

그 아래 있던 우진 형은 내가 긴장했나 싶어 걱정한 눈을 하고 있었고.

괜찮다는 의미로 방긋 웃어주고 슬며시 내게 팔을 뻗는 찬이 손을 잡아주었다.

옷자락을 잡으려다 손이 잡힌 찬이는 작게 흠칫했지만, 온기가 전해져서인지 표정이 풀어졌다.

‘괜찮아.’

입 모양으로 벙긋거리자 진지한척하던 얼굴에 덩달아 미소가 떠올랐다.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는 이런 자리에 불려올 만큼 노래와 무대를 인정받았다는 게 중요하니까.

무대 뒤쪽에는 대기하고 있는 여러 팀이 MC들 양쪽에 반구 형태로 앉아있었다.

무대 앞쪽에 지켜보고 있는 방청객들.

‘무사이’ 때 경험이 오늘 경연 준비에 많은 도움이 됐다.

이런 경연 무대는 음악 방송 무대와 달랐고, 콘서트와도 많이 달랐다.

방청객이 있다는 건 봐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지만, 그만큼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따지면 행사 때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우리에게 관심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관심 없는 사람도 골고루 섞여 있으니까.

준이 형의 곧은 시선이 한차례 우리를 스쳐 지나갔고, 눈이 마주할 때마다 우린 웃었다.

남들의 몇 년에 걸쳐서 생길까 말까 한 일을 일 년 사이에 다 겪어버렸더니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었다.

우리는 아마 앞으로도 이렇게 단단하게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를 잡아주고 있을 테니까.

복잡한 머릿속과 달리 출연진 소개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준비 과정에서 이미 다 인사를 나눈 다른 출연진들의 소개와 질의응답에 적당히 호응했다.

윤지선 배우가 최근에 출연한 드라마 얘기도 오가고, 박경욱 선배의 새 앨범 홍보도 은근슬쩍 들어가고.

세진 선배님 특유의 입담으로 한바탕 웃음도 지나가고.

“네, 드디어 그분들이 왔습니다! ‘낭만 가객’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그들! 언래블, 어서 오세요!”

자못 화려하고 어떻게 보면 유치한 멘트 뒤에 우리 이름을 붙었다.

애타게 기다렸다는 말은 60%쯤은 거짓말이지만.

저런 멘트 하나가 우리가 그동안 얼마만큼 덩치를 키웠는지 알게 해주었다.

전에는 ‘기대받는 신인 그룹’, ‘새로운 얼굴’ 등 뉴페이스를 소개하는 멘트가 붙었으니까.

“함께 풀어나가는 미래, 언래블입니다.”

이전처럼 형의 구호가 아닌 눈짓으로 우리 팀 구호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

박자를 세듯 고갯짓 두 번 후 한목소리로 외친 우리 이름.

출연자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쑥스럽다는 듯 웃던 준이 형이 마이크를 들었다.

“너무 과분하게 소개해주셔서 너무 긴장되는데요.”

“에이~! 요새 언래블 이름이 얼마나 자주 들려오는데요.”

“맞아요, 최근에 콘서트도 성황리에 끝내셨죠?”

짧게 최근 근황을 환기해주는 멘트가 오갔다.

여전히 몸 둘 바 모르겠다는 듯, 하지만 당당하게 감사 인사를 하는 준이 형.

쏟아지는 질문에 침착하게 대꾸하는 준이 형과 중간중간 대신 멘트를 받아주는 나와 찬이.

적당히 균형 잡힌 지금의 포지션으로 굳혀지기 전까지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그러고 보면 언래블은 다른 연예인들한테 유난히 사랑받는 걸로도 유명하죠?”

우리 그룹에 늘 빠지지 않는 질문도 있었다.

유난히 다른 연예인들과 친분이 깊은 덕분에 생긴 고정 질문이었다.

“언래블이 워낙 멤버 한 명, 한 명이 착하고 바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뭐라도 하나 더 주고 싶게 생겼어요.”

“1세대 아이돌이 보기에도 그렇단 말이죠?”

“어휴, 전 이제 아이돌로 불리기엔 너무 나이가 많죠. 하하, 근데 언래블은 진짜 바람직한 후배의 표본인 건 맞아요. 주변에서도 다들 그런다니까요.”

저번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은근슬쩍 견제 멘트를 날리던 박경욱이 굉장히 호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는 아직 배울 게 많아서 열심히 배우는 것뿐인데 다들 너무 좋게 봐주셔서 부끄러워요.”

세빈이가 마이크를 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아기 티가 폴폴 나는 얼굴의 세빈이가 얼굴을 붉히면서 말하자 다들 흐뭇한 얼굴이 됐다.

세빈이가 얼굴이 빨개진 건 칭찬에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그런 말을 하는 게 아직 낯선 아가라 그런 거지만.

우리끼리 많이 연습했던 상황이라 멤버들의 대처도 훌륭했다.

역시 우리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그 후로 몇 가지 자잘한 질문이 흘러갔고, 드디어 순서를 뽑는 순간이 왔다.

대기석에 준비된 스크린에 메인 무대와 객석이 스쳐 지나가고 본무대에 있는 MC 곽성호가 잡혔다.

아나운서 출신의 입담 좋은 MC가 객석의 호응을 유도하며 이번 경연의 주제를 설명했다.

이번 경연의 주제는 ‘인연’.

굉장히 포괄적인 주제였지만, 그런 덕분에 가수 입장에서는 편곡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

[사람은 죽기 전에 주마등이라는 걸 경험한다고 하죠. 자기 삶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때 우리는 어떤 노래를 자신의 인생 마지막 노래로 선택하게 될까요?]

또렷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번 주제를 설명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기도 하고 이별을 경험하기도 하죠. 그래서 울고 웃고 추억을 곱씹으면서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떠올립니다. 그렇게 선정된 이번 주 주제는 바로 ‘인연’!]

커다란 몸짓이 메인 스크린을 가리켰고, 거기에는 제작진이 준비한 곡명이 하나씩 떠올랐다.

원작자의 무대가 짧게 나오고 그때마다 객석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6곡이 화면에 주르륵 지나간 뒤, 곧이어 오늘 출연자들 소개가 이어졌다.

짧은 인사 영상과 각자 곡을 전달받았을 때의 영상.

물론 정말 전달받았을 때 찍은 영상은 아니었다.

전달받고 무대 구성 짜다가 불려가서 인사 영상 찍을 때 같이 찍은, 그러니까 연출된 장면이었다.

저거 찍던 날이 경환 형이랑 찬이가 장난치다가 애꿎은 영빈 형이 넘어져 크게 혼났던 날이었다.

허리 삐끗해서 병원에 다녀와야 했던 영빈 형의 얼굴이 무척 슬펐지.

준이 형과 팀장님에게 한바탕 혼난 뒤에 찍은 영상이라 그런지 경환 형과 찬이가 좀 시무룩해 보였다.

잘 포장된 덕분에 경연에 대한 걱정으로 보였지만.

힐끔 당사자들을 확인해보니, 영빈 형은 해탈한 듯 웃고 있었고, 주범 둘은 준이 형 눈치를 보고 있었다.

으휴, 이놈의 인간들.

출연진에게 매칭된 곡명이 커다란 화면에 보란 듯이 적혀있었고, 그 모습에 방청객들은 환호했다.

그 기세를 몰아 진행된 첫 번째 순서를 뽑는 MC 곽성호.

[첫 번째로 무대를 보여줄 사람은…!]

삽시간에 긴장한 모든 출연진, 그리고 흥미로운 얼굴을 한 대기실의 MC들.

세빈이가 간절한 얼굴로 내 손목을 쥐고 있었고, 찬이도 다시 내 손을 잡았다.

아랫줄에 앉은 우리 어깨를 윗줄에 앉은 형들이 붙들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던 그때.

[아이돌 신화의 첫 장을 열었던 그룹! 카운트의 박경욱!]

나는 속으로 우리 포잉 님을 외쳤다.

첫 번째는 꼭 피했으면 했는데!

이렇게 우리 요정님을 믿었더니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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