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 가자(1)
“이걸 굳이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봐야 해요?”
“그럼. 당연하지!”
이제는 가영 형이 숙소에 쳐들어오는 게 낯설지 않다.
이렇게 적응해 버린 내가 슬프지만, 멤버들은 형들이 들고 온 온갖 먹거리에 넘어가 버렸다.
이렇게 참 한결같은 내 새끼들 같으니라고.
‘저기서 더 크려는 거 아님?’
‘그만 커도 되지 않을까…. 안 크는 건 나뿐인데.’
피자를 반기는 막내 라인의 모습에 포잉은 나를 힐끗 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콩나물도 아닌 것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니, 포잉 눈에도 멤버들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반면, 자라지 않는 나를 보며 어딘가 잘못된 게 아니냐며 건강식품을 찾아오기도 했었고.
그리고 그 걱정은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인 듯했다.
‘뭐, 좀 덜 커도 속이 잘 크면 되지. 괜찮아, 포잉.’
‘쯧, 이래서야 평생 쪼그만 병아리 같겠구나, 계약자 놈아.’
툴툴거리는 말 안에도 따스한 걱정이 묻어났기에 그냥 웃었다.
우리 포잉은 내 모든 것에 관여했고 나는 그것들이 기꺼웠다.
쏟아져 내리는 커다란 애정이 매일 매일 느껴지는데 그게 싫은 사람도 있을까?
곡을 만들 때도, 개인 연습을 할 때도, 단체 연습을 할 때도 그 외에 모든 시간을 지켜보고 조언해주었다.
곡을 들을 때는 어떤 느낌인지, 뭐가 더 좋은지, 연습할 때도 어디에서 자주 틀리는지 등.
어딘지 모르게 우진 형이 생각나기도 해서 개인 매니저냐고 놀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네가 오죽 부실하면 자기가 이렇게 잔소리하냐고 되려 더 뭐라고 했지만.
포잉 생각에 피식거리고 웃는 내 모습을 본 건지 세비 형이 내 옆에 앉았다.
“이제 포기한 거야?”
“넹?”
뜬금없는 이야기에 되묻자 세비 형은 큰 손으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저거 포기한 거 같아서.”
“하, 하하….”
세비 형이 턱짓으로 가리킨 건 가영 형이었다.
이제는 형만큼 큰 세빈이를 여전히 어린애 다루듯 옆구리에 끼고 뺨을 조물딱대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오해를 바로잡아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가영 형이 이상한 건 포기한 지 오래라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저 인간한테 신경 쓰기 시작하면 화병 생기니까 그냥 내버려 둬.”
영빈 형과 준이 형 사이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던 키스 형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
좌 키스, 우 세비라니.
연행되기 딱 좋은 포지션이라 이유 없이 불안했다.
“시작한다!”
주변에서 무슨 난리가 나든 지 자기 길을 걷는 경환 형이 전투적으로 피자를 해치우다 외쳤다.
아무리 팀장님이 허락했다지만 오늘 경환 형은 폭주하는 것 같았다.
피자, 햄버거 오랜만이긴 하지만 내일 괜찮을까…?
좁은 숙소 안에서 이리저리 복닥거리며 놀던 우리 애들과 새벽 형들이 모두 거실에 모여앉았다.
활기찬 느낌을 주는 오프닝 영상에는 알록달록한 색으로 ‘잘 먹겠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오늘, 드디어 우리가 참여했던 분량이 방송하는 날이었다.
“경환이가 제대로 활약했다면서?”
“밥값 했죠.”
세비 형의 물음에 경환 형은 내 얼굴을 살피더니 씩 웃으며 답했다.
“형, 이거 봐요. 오늘을 위해 아껴둔 사진임!”
“뭔데?”
찬이는 우리 채팅방을 열어 꽃무늬 몸빼 바지를 입고 개선장군처럼 전복을 들고 있는 사진을 공개했다.
이상한 자세로 자는 걸 내가 찍어서 올렸던 사진, 화구 앞에 쪼그려 앉은 사진, 전복 들고 온 사진 등.
새벽 형들은 각자 다른 포인트에서 신기해하며 사진을 살펴보더니 찬이에게 핸드폰을 달라고 했다.
“이런 건 공유해야지. 진우가 안 그래도 오늘 오고 싶었는데 못 왔다고 아쉬워하더라.”
찬이에게 핸드폰을 받아들고 무인도 패밀리 단체방으로 사진을 공유했다.
앗 하는 사이에 공유된 사진에 말릴 틈도 없었다.
이럴 때는 누구보다 빠른 가영 형.
“이야, 바지 짧은 거 봐. 우리 경환이가 다리가 참 길어?”
“전복 저거 네가 잡은 거야? 진짜?”
세비 형은 경환 형의 다리 길이에 감탄했고, 키스 형은 손바닥만 한 전복에 놀랐다.
가영 형이 히죽거리며 찬이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는 모습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경환 형 사진만 있으면 모르겠지만, 내 사진도 있었으니까.
기다렸다는 듯 진우 형이 보내는 메시지로 핸드폰이 울기 시작했다.
“야, 얘 기다리고 있었나 봐. 누가 보면 전화 온 줄 알겠네.”
“안 그래도 모임 가기 싫어서 투덜거리던데.”
진우 형은 차기작 때문에 그쪽 사람들과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다.
숙소에 가고 싶은데 타이밍이 안 맞는다고 한참을 투덜거렸고, 그런 진우 형을 달래는 건 내 몫이었으니….
원래 오늘 숙소에 오려던 우진 형은 새벽 형들이 온다고 했더니 도망쳤다.
그사이에 자기 같은 민간인이 끼어있을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런 형을 바라보던 우리에게 평소처럼 인자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가버렸다.
새벽 형들과 잘 지내는 듯하면서도 부담스러워했던 우진 형을 우리는 이해했다.
우리한테 좋은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를 버렸다는 미약한 배신감은 늘 그렇듯 금방 사라졌다.
일찍 퇴근하는 게 형한테도 좋지, 뭐.
“저 섬에는 그럼 촬영진이랑 너희 말고는 아무도 없는 거야?”
“그렇대요. 원래는 어르신 한 분이 혼자 사신대요.”
발랄한 배경음과 피곤함에 찌든 듯한 세 남자의 모습이 첫 화면이었다.
부스스한 얼굴로 이불 속에서 꿈지럭대던 형님들.
별채에 있던 진성 형이 가장 먼저 일어나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와, 진성 배우님 이렇게 풀어진 거 처음 봐.”
“평소에는 형이 좀 깍듯한 이미지죠.”
나도 처음엔 마냥 그런 형님인 줄 알았지.
이틀 밤을 함께 지내면서 좀 더 날것의 모습을 본 덕에 후후, 하고 웃어넘겼다.
우리가 온다는 소식에 한껏 신난 형님들의 모습과 오전 일과를 보내는 모습.
그리고 드디어 창백한 얼굴로 배에서 내린 우리가 나타났다.
“갈 때는 제대로 챙겨입고 갔네?”
“그럼요. 가서 일하다 옷 버린다고 형님들이 따로 챙겨준 거예요.”
트레이닝복을 입고 일하려 했지만, 그걸 협찬으로 안 오수 형님이 여분으로 챙긴 게 있다며 옷을 주셨다.
바닷물이라 옷이 삭는다면서.
흐느적거리며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도착한 우리와 버선발로 마중 나온 오수 형님.
오자마자 바쁘게 돌아다니는 우리 모습이 어쩐지 낯설었다.
“아무래도 환이 네가 일복이 좀 있는 것 같아.”
“저요?”
도착하자마자 밥할 거리는 챙기는 날 보던 키스 형이 픽 웃으며 말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형을 바라보자 옆에 있던 세비 형이 말을 받았다.
“어디 가든 자꾸 밥하고 밥을 안 할 때는 애들 뒤치다꺼리를 하지.”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가 맨날 사고만 치고 다니는 것 같잖아요.”
“그럼 아니야?”
손에는 피자를, 눈은 화면을 향하고 있던 찬이가 불퉁한 목소리로 툴툴댔지만, 형들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환이랑 있으면 뭔가 일이 자꾸 늘어나긴 해.”
평소보다 풀어진 얼굴로 느긋하게 있던 준이 형이 한마디 던지자 사방에서 한마디씩 쏟아졌다.
“…와, 억울해. 그동안 먹이고 챙겨놨더니 이렇게 날 버린다고?”
짐짓 서운하다는 듯 투덜거리자 가영 형의 손길에서 도망친 세빈이가 슬며시 내 옆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형, 저는 그래도 형 편이에요.”
“진짜, 내가! 하. 그래 형한테는 우리 막둥이밖에 없네.”
감동한 내가 세빈이를 껴안으려 했지만, 기특한 소리를 속닥거려놓고 잽싸게 몸을 빼고 도망갔다.
우리 애가 날 피해?
충격받은 내 얼굴에 경환 형과 찬이는 좋다고 웃어댔다.
앞으로 저 인간들은 밥 없다, 진짜로.
“형이 안아줄까? 우리 병아리?”
가영 형이 양팔을 벌리며 자기 가슴을 탕탕 치길래 그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았다.
뭐래, 진짜.
“너는 저기 있으나 여기 있으나 비슷한 것 같다?”
“제 말이요….”
화면 속 나는 부지런히 텃밭에서 채소를 챙기고 있었다.
꼼꼼하게 살피는 내 모습 아래로 예의 그 알록달록한 자막이 떠올랐다.
- 신선한 재료가 요리의 비법이라는 소년 요리사(19세) 공지환
이게 무슨 근본 없는 자막이야?
“진짜 저렇게 말했어?”
“말했겠어요?”
“근데 되게 그럴듯한데?”
텃밭을 살피다 닭장을 슬며시 피해 가는 내 모습이 흘러나오자 또다시 자막이 떠올랐다.
- 그런 지환의 유일한 고민거리는 조류 공포증.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
복작복작했던 거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멤버들과 새벽 형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고, 그 시선은 모두 한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저 조류 공포증 없어요!”
발끈한 내가 외쳤지만,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듯했다.
“왜 이해한다는 듯이 보는 건데요!”
우리 애들도, 형들도 모두가 훈훈한 척 웃으며 내 외침을 무시했다.
그 후로 형님들 사이에서 전복 탐지기로 불린 경환 형의 모습이 흘러나왔다.
경환 형의 컨셉은 순박한 어촌 청년인 듯했다.
전복을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는 잘생긴 우리 경환 형.
“진짜로 저걸 해내네. 너 가수 하기 싫어지면 나중에는 내려가서 살아도 잘 살겠다.”
가영 형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 화면 속 전복과 자기 옆에 있는 경환 형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우리 소중한 래퍼에게 이상한 바람 넣지 말아요.”
“나중에 50, 60 돼서도 랩 할 건 아니잖아.”
“할 수도 있죠, 뭐.”
가볍게 흘러가는 화면 속 시간처럼 TV 앞의 우리도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중간중간 형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긴 했지만, 영상으로 보이는 나는 꽤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저 때까지는 좋았지.”
한편으로 끝날 줄 알았던 우리 분량이 생각보다 더 많이 나왔다.
끝날 때쯤 됐는데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왔으니.
“다음 편에도 나오는 것 같은데?”
“저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의아해하는 세비 형에게 경환 형이 답해주었다.
“장르가 바뀌어요.”
“장르가?”
경환 형의 대답과 동시에 본편이 끝나고 짤막하게 흘러나오는 예고편.
비바람을 헤치고 마당에서 고군분투하는 진성 형과 내 모습.
그와 대비되는 방 안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세 사람.
잠들기 전까지는 어촌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같았는데, 눈을 뜨고 나니 재난 영화가 되었다.
“역시 환이가 뭔가 몰고 다니는 게 틀림없다.”
참지 못한 나는 결국 가영 형에게 쿠션을 집어 던졌다.
* * *
“요새 언래블이 많이 바쁘다던데~.”
“바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이돌 대선배인 박경욱의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에 씩씩하게 대답하는 우리 찬이.
“어휴, 경욱 씨, 후배 괴롭혀?”
“괴롭히다뇨, 너무하세요. 후배들이 오해하잖아요.”
그런 경욱에게 농을 던지는 사람은 윤지선 배우님.
주변을 둘러싼 쟁쟁한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애들은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었다.
눈치싸움 같은 은근한 견제도, 말의 행간 사이에 숨은 작은 가시도 열심히 피해 가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으니.
“나 좀 긴장되는데. 요새 언래블 엄청 잘나간다던데, 같이 붙으면 어떡해.”
“저야말로 선배님이랑 붙을까 봐 무서워 죽겠어요.”
무사이에서 안면을 터 둔 세진 선배님이 옆에 앉아 우는소리를 하셨다.
어허, 이분이 어디서 밑장빼기를.
“맞아, 세진 선배님 무대 올라가면 완전 무서워지는 거 다 알아요!”
세진 선배님은 넉살 좋은 성격으로 무사이 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주셨던 분이라 좋은 기억이 남아있었다.
“그때도 준비 너무 못했다고 하셔놓고 엄청 멋지게 노래하셨잖아요. 저 들으면서 눈물 날 거 같아서 참느라 엄청 고생했어요.”
무사이에서 남자친구에게 프로포즈하는 여성 사연자분의 무대를 했던 세진 선배님.
소중한 누군가와의 동행을 노래했던 그 모습.
노래를 듣는 내내 바람 부는 청보리밭처럼 새파랗고 드넓은 초원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능청을 떠는 세진 선배님께 볼멘소리를 내자, 눈을 동그랗게 뜬 선배님은 이내 크게 웃으셨다.
“이야, 진짜 너희도 잘 컸네. 어휴, 진짜. 조금 천천히 커 줘. 그래야 나 같은 사람들도 선배라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지.”
세진 선배님은 그때보다 훨씬 얼굴들이 좋아졌다며 우리 어깨를 두드려주셨다.
진짜 조그맣고 작았던 아이들이 일 년 만에 훌쩍 다 커서 온 것 같다며 아쉬워도 하셨고.
웃으며 세진 선배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스태프들이 다가와 마이크를 최종 점검했다.
곧 스탠바이 한다는 말에 다시 긴장이 몰려왔다.
드디어 ‘낭만가객’의 촬영 날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