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79)화 (379/456)

379. 가자(3)

경연의 특성상 중간쯤이나 마지막쯤이 가장 좋았다.

지든 이기든 분량은 어쨌든 확보되고, 사람들 이미지에도 그럭저럭 남고.

물론 첫 타자가 말도 안 되게 멋진 무대를 뽑아내면 그건 그거대로 큰 이슈가 되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 모든 대중에게 사랑받을 만한 풀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각자의 영역에서 사랑받는 그런 사람들.

방송국에서 매번 사람들 뽑는 건 참 기가 막히게 뽑는다 싶다.

한편으로는 그런 사람들 틈에 우리가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이제는 어느 정도 기본 인지도를 먹고 들어갈 수 있는 그룹이라고 아예 땅땅 못 박아준 거나 마찬가지니까.

박경욱의 무대는 화려했다.

다른 말로는 무대에 돈을 좀 썼다는 뜻이었다.

방송국에서 모든 비용을 대주는 게 아니다 보니 무대가 화려할수록 개인적으로 밀어 넣은 금액이 크다는 이야기였다.

이제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도 낯설지 않은 걸 보면, 나도 좀 때가 탄 건가?

속으로는 온갖 생각을 다 하고 있었지만, 무대에 아예 신경을 끄지는 않았다.

어떤 무대라도 보고 배울 게 있다는 게 에단 쌤이 내게 가르쳐준 것 중 하나였으니까.

멋진 무대든 망한 무대든 분명히 보고 배울 것들은 있었다.

아이돌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넘으려면 우리가 그만큼 더 빨빨거리며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됐다.

그게 우리가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습에 매달리는 이유이기도 했고.

절절한 연주를 고급 스피커가 빵빵하게 쏟아냈다.

그 가운데 쇼맨십 넘치는 가수와 가창력 넘치는 가수가 마주 보며 애절하게 서로를 그리워하는 가사를 노래했다.

지인 찬스를 사용한 박경욱은 본인의 부족한 가창력을 다른 가수를 통해 적절히 메꿔냈다.

하지만 적어도 내 귀에는 원곡이 더 좋아서 아쉽기만 했다.

이래서 다른 분들의 곡을 쓰는 건 늘 위험부담이 컸다.

특히나 히트친 노래는 더 무섭다.

잘해도 본전이고 못하면 쪽박이니까.

따로 곡을 정할 수 없는, 방송사가 정해준 곡을 노래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안다면 건방지다고 후드려 맞고 먼지가 되게 까일 생각들을 하며 나름의 감상을 적어 내렸다.

다른 건 몰라도 리스너로서의 나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진지하게 노래를 듣던 사람이니까.

라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열심히 정신을 분산시키며 자꾸만 멤버들에게로 돌아가려는 시선을 붙잡았다.

이제는 우리 애들보다 나 자신을 걱정하는 게 더 필요하다는 걸 알지만 버릇처럼 자꾸만 멤버들을 살폈다.

우리 애들은 나보다 언제나 더 잘했고, 열심히 했고, 뛰어나니까.

이제는 내가 더 잘해야 할 텐데.

이런 내 모습이 여태까지는 긴장한 신인, 팀워크가 좋은 신인 그룹의 모습으로 예쁘게 잘 포장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안 되는 상황이 왔다.

다른 가수가 노래 부르는데 그쪽에 집중 안 하면 건방진 놈이 된다.

이건 따로 팀장님에게 피드백 받은 사항이라 기를 쓰고 고치려고 하고 있지만, 늘 그렇듯 습관은 고치기 힘들다.

무대 끝나고,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치고, 준이 형이 우리 차례에 열심히 소감을 말하고.

그렇게 차근차근 시간이 흘러 세진 선배님 차례가 됐다.

데뷔 직후 본 무대로 세진 선배님의 여유로운 무대 장악이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았던 우리는 바짝 긴장했다.

찬이는 얼마나 긴장했는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바로 옆에 있는 내게 들려왔다.

으휴, 이놈의 모지리.

괜찮다고 슬쩍 토닥여주는 내 손도 아주 조금 떨리긴 마찬가지였지만.

세진 선배님은 유쾌한 성격만큼이나 파워풀하고 긴 호흡의 보컬로 유명했다.

어지간한 사람은 호흡곤란으로 뒤로 넘어갈 만한 길이의 애드립이 가능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어떤 무대를 꾸밀지 다들 기대했었다.

경연의 특성상 리허설은 서로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아예 도착 시각을 나눠서 지정해주는 치밀함까지 가진 제작진.

심지어 실제 무대를 보기 전까진 서로 어떤 무대를 꾸몄는지 비밀이었다.

덕분에 서로 어떤 무대를 준비하는지 넌지시 떠보는 공작도 꽤 많았고.

“와, 이건 반칙이지….”

여태까지 무대에서는 서로 적당히 연기 섞인 감탄을 쏟아냈다면, 지금은 다들 한 방 맞은 얼굴이었다.

세진 선배님은 힙합으로 곡을 바꿔버렸다.

원곡은 가족의 소중함을 노래하는 노래였다.

철없던 어린 시절의 방황을 후회하면서 늘 지켜주던 가족을 이제야 깨닫는다는.

옛날 감성이라 지금 시대에는 올드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던 그런 곡.

그런 노래가 처음부터 힙합이었다는 듯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처음엔, 몸의 핏을 훌륭하게 살려낸 바지 정장 차림의 선배님 모습에 어떤 무대일까 싶었다.

재즈풍으로 편곡을 했을까, 정도만 상상했던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또각거리며 무대를 울리는 구두 소리와 무대 뒤에서 쏟아져나온 댄서들, 절로 어깨가 움찔거리는 경쾌한 멜로디.

원작자가 들어도 이건 새로운 곡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신선한 충격.

다들 입을 떡 벌리고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고, 아직 무대를 하지 않은 우리와 다른 선배님은 마른 침을 삼켰다.

아마 지금 본무대에서 기다리고 있는 윤지선 배우도 비슷한 심경이 아닐까?

그렇게 사람들 혼을 쏙 빼놓은 세진 선배님은 무대가 끝나자 후련한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자신의 무대에 만족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한바탕 폭풍이 거칠게 지나간 자리.

나는 다음 무대가 우리가 될 것 같다는 걸 직감했다.

뽑기라 조작은 없다고 들었고, 실제로도 그런 것 같지만 어쩐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어차피 두 팀밖에 안 남기도 했고.

그리고 불길한 촉은 언제나 잘 맞아떨어져, MC의 즐거운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무대는 언제나 강렬한 컨셉으로 무대를 장악한 그룹입니다!]

그 한마디에 멤버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 같으면 달달 떨었을 텐데.

무대를 향하는 멤버들의 얼굴에 가벼운 긴장감은 돌았지만,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소란스러웠던 마음은 언제나 그렇듯 한군데 모인 서로의 손과 구호로 차분해졌다.

“We are?”

“We‘re ‘Unravel’!”

* * *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배정된 곡이 lulu 선배의 이별이었다.

내가 커버송으로 올렸던 곡이고, 어린 친구들과 불렀던 그 곡.

그래서 더 난항을 겪었다.

내가 한 번 멤버들과 한번 불렀던 곡이라 어떤 포지션을 잡아야 할지 걱정되었으니까.

우리는 원곡의 분위기를 살리기로 했다.

약간의 개사를 거치고 우리 방식대로 편곡하긴 했지만, 워낙 이 곡 자체가 가진 감성이 좋았다.

보드랍고 예쁜 노랫말로 서러운 울음을 감추려는 듯한 그런 원곡의 느낌이.

어떤 상황에서 나온 곡인지 알기 때문에 더 슬프게 다가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 모습보다 노래가 더 크게 보이길 바랐다.

여태까지의 이미지를 잠시 미뤄두고 새로운 모습도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대중들이 언래블의 한계를 긋지 않기 바래서.

그랬기에 첫 시작은 희미한 조명과 안개였다.

아련함이 포인트라 그간 무대에서 주로 입어 온 제복이 아닌, 슬랙스와 실크 셔츠로 의상을 준비했다.

대기실에서는 전부 재킷을 입고 있었기에 이 의상을 제대로 본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의상은 멤버들에 체형과 각자 컨셉에 맞게 준비되어 여태까지 죽어라 땀 흘리며 만든 몸 선이 은은하게 보였다.

검정 슬랙스에 은은하게 빛나는 진줏빛 실크 셔츠는 아이돌의 정석이나 마찬가지였다.

준이 형은 품이 약간 남는 셔츠의 단추를 세 개쯤 풀었고, 바지 안으로 셔츠 단을 넣어 마무리했다.

영빈 형은 평소보다 훨씬 단정하게 목까지 단추를 여몄고, 허리에는 허리띠 대신 끈으로 묶었다.

경환 형은 가장 깔끔했다.

목까지 채운 단추와 상체 핏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는 사이즈의 셔츠.

목에도 정석 같은 까만 넥타이가 있었다.

찬이는 아예 가슴 앞쪽에 단추가 없는 셔츠였다. 허전한 목에 가는 실크 천을 둘렀고.

세빈이는 준이 형과 같은 타입의 셔츠에 목에는 아무 장식 없는 새까만 가죽 초커로 포인트를 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전처럼 하늘거리는 셔츠를 입히려는 누나들에게 도망쳤고, 그나마 무난한 셔츠를 받았다.

하지만 결국 크라바트까지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도 짙은 남색에 얌전한 타입이라 눈물을 머금고 달았다.

유난히 내게는 자꾸 화려하고 레이스 같은 게 많은 의상을 몰아주려고 해서 피곤했다.

내 이미지는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는 건지, 원.

희미한 조명 아래 실루엣만 드러낸 우리의 시작은 영빈 형과 찬이의 화음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만들어준 그대가, 가장 꿈 같은 날 떠나가네요.]

누구나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사는 소중한 어떤 인연.

역설적으로 곁에서 사라진 후에야 제대로 알게 되는 그 소중함.

반려동물, 친구, 사랑, 가족 등 한계를 두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이별해야만 했던 모든 인연을 떠올리길 바랐다.

그것이 다툼이든, 오해든, 혹은 죽음이든.

풍부한 울림을 가진 영빈 형의 목소리가 허스키하게 울리는 찬이 저음과 만나 쓸쓸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가장 귀했던 그 눈빛, 한 번의 숨보다 당연했던 눈빛이]

[4월 내렸다던 눈처럼 흔적도 없어요.]

안개 낀 숲을 헤매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뿌연 무대 위를 천천히 걸었다.

시작을 이끌어가던 영빈 형과 찬이가 중심을 잡고 있었고, 나머지 멤버들은 천천히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멤버들의 몸을 타고 오르는 드라이아이스 효과 덕분에 우리는 더 한없이 연약해 보였다.

어느새 무대 중심에 선 둘을 제외한 우리 네 명은 그 둘을 가운데 가둬둔 것처럼 네 모서리 끝에 서 있었다.

[그대가 있었기에 홍안의 시절이었다는 걸]

나와 세빈이가 대각선 방향에서 중심을 향해 걸어가며 한 구절씩 노래를 시작했다.

[그대가 있어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다는 걸]

중심의 안개가 옅어진다 싶다가도, 가운데로 다가가던 우리 손짓에 따라 다시 뿌옇게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나와 세빈이 손이 영빈 형과 찬이 어깨에 닿는 그 순간, 모든 멤버가 노래를 시작했다.

[이렇게 지나버린 후에야 깨달아요.]

가볍게 닿은 손길, 그리고 휘청이는 듯한 안무와 함께 정해진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는 둘.

한 구절씩 노래가 이어질 때마다 우리는 모였다 흩어지면서 무수한 인연을 표현했다.

간절하게 노래하며 모인 인연이지만, 결국 떠나보내야 했던 인연들.

그건 자의든 타의든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혼자 남는다.

그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채로.

처음에는 화려한 퍼포먼스를 구상하기도 했지만, 노래가 주는 메시지와 어울리지 않아 폐기했다.

그래서 세진 선배님의 무대가 더 대단하게 느껴졌고.

감정을 쏟아내는 호소력 짙은 노래가 아니라 그저 담담하게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한 노래로 만든 건 그 때문이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결국 떠나간 존재가 아니라 남은 사람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마냥 쓸쓸하지 않기를 기원했다.

1절의 이야기가 이미 벌어진 상황, 후회 그리고 남겨진 사람의 슬픔이라면, 2절은 내 몫의 추억을 소중히 끌어안는 법이었다.

희미했던 조명이 또렷해지고, 안개가 물러가기 시작했다.

조명을 받은 실크 셔츠는 은은하게 빛을 뿌렸고, 멤버들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감돌았다.

[당신의 삶이 내 매일에 남아있고]

[가슴 속 작은 방에 당신의 자리가 생겼네요.]

모이면 어느새 다시 흩어져야 했던 멤버들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서로에게 모여들었다.

의상을 장식하던 부드러운 끈들이 잔상처럼 남아 흔적을 남겼다.

[연약한 날갯짓이 안타까워 나비가 싫다던 당신은 없지만]

[이제 난 나비를 보며 당신을 떠올릴 수 있게 됐네요]

마주 본 멤버들의 얼굴 가득한 뿌듯함과 만족감이 이미 승패는 의미 없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러니까 언래블은 언제나 슬픔보다는 희망이 더 취향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희망을 좋아해 줬다.

무사히 무대를 끝낸 우리에게 쏟아지는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그것들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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