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9. Sixth Sense(1)
섬에서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구른 우리가 밖으로 나올 때는 다시 아이돌이 되어있었다.
원래 예정보다 하루 더 있어야 했지만, 그만큼 우리도 많이 나올 테니까 괜찮겠지?
한밤중에 숙소에 도착했고, 아직 잠들지 않고 기다려준 멤버들과 신나게 이야기도 나눴다.
세빈이는 날 보며 우리 형이 꼬질꼬질해져서 왔다고 심란한 얼굴을 한 건 조금 충격이었지만….
너무 더워지기 전에 출연했던 게 되려 다행이라는 말과 섬에서 무얼 했는지 묻는 멤버들.
경환 형과 나는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는지 몸짓 발짓 섞어가며 설명했다.
전복을 캐고 불을 피웠던 경환 형은 찬이와 세빈이에게 자기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자랑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이렇게 입고?”
“야, 저거 생각보다 엄청 편해!”
하지만 순순히 들어줄 우리 애들이 아니었다.
채팅방으로 보냈던, 오수 형님이 준 몸빼 바지를 입은 경환 형 사진을 내민 찬이.
그 뒤로는 거실이 또 시끄러워졌다.
“안 다치고 잘하고 와서 다행이네.”
“가서 내내 밥만 했어?”
“종일 밥하고 김치 담그고 그랬죠, 뭐.”
“우리 형 뺏어가면 안 되는데.”
준이 형의 따뜻한 눈빛, 영빈 형의 걱정을 들으며 세빈이 안마를 받는 이 순간.
거기서 그 고생을 한 건 이 순간을 위해서였나보다.
“아이고, 우리 막둥이 손도 야무지지.”
“형, 되게 할아버지 같아.”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던 나를 바라보는 막내의 시선이 이상했지만, 괜찮다.
으르렁대던 셋째와 다섯째도 어느새 얌전히 우리 주변에 앉아 있었다.
어휴, 이놈의 인간들.
그래도 역시 집이 최고네.
* * *
“여러분의 인생 마지막 날, 딱 한 곡을 들을 수 있다면 무슨 곡을 듣고 싶으세요?”
‘낭만 가객’ 작가님과의 인터뷰.
이제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 모두와 한꺼번에 진행한 게 아니라 한 명씩 따로 불러서 물으셨다.
“으음…. 저는 저희 데뷔곡이요.”
“잊을 수 없는 곡이긴 하네요. 무척 머릿속에 강하게 남았나 봐요?”
“네. 그 한 곡, 그 앨범을 위해 노력해왔던 날이 늘 생생해요.”
갑자기 툭 떨어진 이 세상에서 내 의견이 들어간 첫 번째 노래.
그 노래 덕분에 새벽 형들과도 더 친해졌고, 누군가에게 우리 노래라고 말할 수 있는 곡이 생겼다.
아직도 처음 노래가 나왔을 때, 첫 안무가 완성되었을 때,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을 때가 선명하다.
얼마나 긴장했었는지, 멤버들의 표정은 어땠는지.
다른 멤버들도 각자 이야기했을 테지만, 내게는 ‘I‘m OK’가 가장 가슴 깊숙이 남아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
“다른 멤버들은 무슨 곡 이야기했어요?”
“비밀이에요.”
“진짜요? 궁금한데….”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궁금하다고 어필했지만, 작가님은 웃고 말았다.
나중에 방송을 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쳇, 역시 이 바닥 사람들은 쉽지 않아.
멤버들에게 물어도 말해주지 않을 것 같았기에 얌전히 체념했다.
“이번에 언래블이 도전할 노래는 회사에서 따로 알려드릴 거에요.”
“어떤 노래가 될지 너무 궁금해요.”
“저도 언래블이 어떤 무대를 만들지 무척 기대돼요. ‘무사이’ 때처럼 신선하고 멋진 아이디어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작가님은 시종일관 상냥하고 차분한 어조로 설명해주셨다.
다정한 말투만큼 사람의 긴장을 풀어주는 게 없었으니 그런 면에서 작가님은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
“작가님 덕분에 엄청 긴장했던 마음이 좀 풀렸어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언래블이 무대 장인인 건 다들 알고 있는데요, 뭐.”
“아직 멀었죠. 다들 좋게 봐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덕분에 이렇게 꿈꾸던 프로그램에도 나올 수 있게 됐잖아요.”
주거니 받거니 서로 얼굴에 금칠도 좀 해주고 사회생활을 하는 시간을 보냈다.
개별 인터뷰 후, 단체로 모인 우리와 몇 가지 질문을 더 나누고 사진도 찍었다.
아마 예고편에 쓸 것 같은 그런 사진.
그렇게 작가님이 돌아간 후,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 팀장님에게 달려갔다.
“팀장님! 저희 뭐해요?”
“어떤 거예요?”
“어련히 안 알려줄까 봐 이렇게 뛰어왔어?”
“궁금하니까요!”
찬이는 기운차게 달려가 팀장님께 매달렸고, 팀장님이 휘청거리자 경환 형이 붙잡았다.
아이고, 얘들아….
나날이 기운차지는 멤버들 때문에 팀장님은 기운이 달리는 것 같았다.
찬이과 세빈이가 옆에서 종알거리는 모습에 준이 형이 끼어들어 둘을 자제시켰다.
이러다 팀장님 넘어지기라도 하면 다칠 수도 있으니 뛰지 말라고.
준이 형의 훈계로 얌전해지는 막내들 모습에 경환 형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거기서 뭐 해…?
요새 들어 부쩍 형님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경환 형.
애잔한 눈으로 경환 형을 바라봤지만, 내 눈빛을 어떻게 곡해한 건지 시선이 마주치자 형이 씩 웃었다.
이미 늦은 것 같은데, 음…. 그래, 형, 기운 내.
평소와 같은 시끌벅적하고 요란한 분위기가 지나가고, 팀장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미 ‘낭만 가객’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던 우리.
평소 인기 있는 연령층은 어떤지, 어떤 화가 인기가 좋았는지, 기사 반응은 어떤지 등.
평소처럼 회사는 우리가 출연할 프로그램에 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주었다.
예전에 팀장님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정치질이고 영업이고 그건 회사가 알아서 하니까 너희는 너희 일만 하면 된다고.
회사에서 수집한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시면서도 굳이 그 너머를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하는 말들.
현실을 모르고 망상 속에서 사는 건 안 되지만, 굳이 진창에 발을 넣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중에 조금 더 깊숙이 알아야 할 때가 되면 그때 알아도 된다고.
그 말을 누군가에게 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팀장님은 어떤 시간을 보내야 했던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팀장님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는 생각.
언젠가는 우진 형에 대해 알아가는 만큼, 팀장님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졌다.
누군가의 인생이 궁금해지다니, 나도 정말 많이 변했네.
생각에 빠져 멤버들과 팀장님을 보는 동안에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이거 저희가 부를 수 있을까요?”
“너무 애틋한 사랑 노랜데.”
이번에 우리 몫으로 건네받은 곡은 발라드가 사랑받는 시기, 그 전성기를 이끈 곡이었다.
“감정이 되게 깊어야 하는데, 영빈아, 가능하겠어?”
“편곡 가능한 거죠?”
“응. 원곡 재현하는 건 아니니까.”
이제는 우리도 무대를 고려하며 다양한 의견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회사에서 진행하는 회의에 참여했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법을 훈련받았다.
우리끼리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우리 뜻을 이해한 정윤 실장님이 도와주신 부분도 많았다.
실장님과 팀장님은 단순히 우리가 의견만 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내려는 의견에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하고 얼마나 타당한지도 알아야 한다고.
앨범 제작과 콘서트에 참여하면서 들어가는 비용, 제작 과정, 외부 업체 선정 등 많은 것들을 설명해주셨다.
우리에게 실무자들만큼 깊은 지식과 업계의 분위기를 알길 바라는 건 아니라고.
다만, 너희가 의견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맥락을 알아야 한다며 지난 시간 내내 우리를 훈련하셨다.
가끔은 혼나기도 하고 칭찬받기도 하면서 우리는 제법 이런 시간에 익숙해졌다.
“분위기부터 좀 잡아보자.”
팀장님과 우진 형이 참석한 가운데 우리는 우리끼리 머리를 맞댔다.
훈련받고 나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일차적으로 우리끼리 무엇이든지 해 보려고 한다는 것.
그 후 다른 회사 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해야 다른 사람에게도 설명할 수 있다는 걸 배웠으니까.
다들 한 번 이상은 다 들어본 곡이라 원곡의 분위기를 살릴지, 다른 방향으로 바꿀지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다.
“그러면 일단 이렇게 요청해본다?”
“응. 그게 제일 나을 것 같다.”
“아직 시간 있으니까 다른 의견 생기면 그때 다시 말하자.”
원곡은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헤어진 연인의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였다.
우리는 ‘헤어진 연인’이 아닌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인연’으로 가닥을 잡았다.
원곡 그대로 가는 건 어떻게 해도 원곡자인 선배님의 감성을 뛰어넘을 수가 없을 테니까.
실제로도 원곡 가수가 이 곡으로 활동하기 직전에 결혼을 약속했던 사람과 헤어졌다고, 그래서 더 몰입했다는 인터뷰가 있었다.
어휴, 우리는 그런 사랑조차 해 본 적 없는데 어떻게 그 마음을 이기겠어?
“자,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병아리들은 다른 일 하러 가라.”
“네에….”
흡족한 얼굴로 우리 모습을 지켜보던 팀장님은 우리 의견이 정리된 종이를 팔랑이며 웃으셨다.
열심히 몰두했던 만큼 다들 진이 빠진 듯했지만, 다음 일도 중요한 일이라 기합을 넣었다.
언래블 1주년을 위한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는 터라 멤버들 얼굴에는 다시 슬금슬금 미소가 차올랐다.
어딘가 못된 장난을 꾸미는 장난꾸러기 같은 그런 미소가.
“자아, 어디까지 했지?”
연습실에 동그랗게 모여앉은 우리 사이에서 준이 형이 핸드폰을 꺼냈다.
“편지는 다 써서 우진 형에게 넘겨놨고, 단체 사진도 찍었고. 보자….”
준이 형의 핸드폰에 우리가 어떤 깜짝 파티를 하고 싶은지 적어놨던 일정이 떠올랐다.
“파티에 음식이 빠지다니.”
“그건 어쩔 수 없지. 저번에 쿠키 굽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잖아.”
찬이는 여전히 솜뭉치들과 맛있는 걸 먹을 수 없는 게 아쉬운 듯했다.
모든 팬을 한자리에 모을 수도 없었고, 일부에게만 혜택을 줄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영상으로 찍거나 사진을 만드는 것뿐.
나도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그 결과 당일 GIVE 앱 생방송뿐만 아니라 꽤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회사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마침 올해 6월 10일은 일요일.
금, 토, 일 3일간 다양한 영상과 이벤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럼 오늘 할 거는 퀴즈 문제 만드는 건가?”
“공지는 나중에 올리는 거죠?”
“응. 정답자 추첨해서 보낼 상품은 뭐였지?”
금요일에는 우리가 미리 낸 문제를 맞힌 팬들을 대상으로 추첨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답 풀이도 같이하고.
“팀장님이 전에 모아놨던 미공개 사진으로 뽑아서 보내준다고 했어요.”
“우리가 사인만 하면 되겠네.”
콘서트 굿즈 제작할 때와 그 이전에 찍었던 사진 중 아까운 게 제법 많다고 했다.
B급이라고 분류하긴 했지만, 아쉬웠던 그런 사진들.
그런 사진들을 출력해서 그 위에 우리가 직접 사인을 해서 보내는 것.
이런 소소한 것들을 보내야 하는 게 아쉬웠지만, 분란이 될만한 일은 최대한 없어야 한다는 게 공통 의견이었다.
그 때문에 사진은 당첨자들이 받은 이후 공식 카페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었다.
어차피 당첨자들이 온라인에 공개할 가능성이 크니 화질 높은 원본으로 회사에서 공개하기로 했다.
“나 아직 잊지 않았다. 그날 솜뭉치들이 보냈던 문제들….”
“아, 그 테디 베어 문제.”
언래블에 관련된 문제를 낼 생각이었지만, 준이 형은 평소보다 기합이 더 들어가 있었다.
처음, 푸른 음악 노트에 고정 출연이 되었던 날.
우리 팬들이 직접 보낸 문제 중에 뽑았다던 그 문제들.
그날 극악한 질문의 난이도 때문에 준이 형은 혼이 나간 얼굴을 했었다.
그때 ‘살려주세요’라고 한 짤이 아직도 준이 형과 찬이 방에 걸려있었다.
차마 팬이 준 걸 버릴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우리는 양반이지. 우리 관련 문제잖아.”
“시간도 넉넉하게 주고요.”
“그러니까 난이도를 조금 높여도 괜찮겠지?”
어느새 으흐흐 하고 음산한 웃음을 흘리는 멤버들.
‘너희 어디 아픈 거 아님?’
‘아냐, 그냥. 음, 좋아서 저러는 거야.’
포잉은 이상하게 웃는 멤버들을 바라보며 진지한 얼굴로 어디 아픈 게 아니냐고 물었다.
팬들이 우리를 놀리는 걸 좋아하는 만큼, 우리도 솜뭉치들을 놀려보겠다는 그런 마음.
차마 팬들을 향해 복수하려는 거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