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 Sixth Sense(2)
* * *
“최근에는 답답한 일 없었나요?”
“네. 일도 잘되고 있고, 만나는 사람들도 친절하고요.”
힘찬은 찬영의 질문에 최근의 일을 떠올려봤지만, 다행히 별다른 일은 없었다.
멤버들과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가장 답답했던 지환과의 관계도 이제는 서로의 합의점을 찾아가고 있는 단계였다.
어느 선까지 서로 관여할 것인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지 선을 그어줘야 할 문제인지.
그 외 다른 멤버들과는 여전히 열심히 부딪히고 서로 조각을 맞추고 있었다.
와그작거리는, 혹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은 모형을 서로 맞추는 일.
힘찬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입체적인 모형을 서로 맞추는 일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가장 즐거웠던 일은 역시 콘서트인가요?”
“아, 콘서트 정말 재밌었어요. 힘들긴 했는데….”
힘찬은 찬영에게 이전과 달리 즐거움을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
어떤 점이 힘들었는지, 그리고 어떤 부분이 자신을 행복하게 했는지.
찬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보면 힘찬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유난히 감정 조절이 어려울 때도,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서 주체하기 어려울 때도.
가끔 의도치 않게 힘찬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져도, 무기력해져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할 때도.
조바심내지 않고 무섭지 않게 힘찬의 상태에 관해 질문 해줬다.
성인 남성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도 이제는 거의 없어졌다.
편안한 말투와 익숙한 얼굴이 주는 효과일까?
아니, 그보다는 찬영이 자신들을 깊이 이해하고 벽 없이 마주하는 태도가 가장 클 것이라고 힘찬은 생각했다.
찬영은 언제나 힘찬이 지금 느끼고 있는 기분이 무엇인지, 그 기분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차근차근 짚어줬다.
그리고 그것들이 나쁜 게 아니며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해주었다.
힘찬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풀어서 몇 번이나 이야기해 주었다.
가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할 때는 여러 도구를 이용하기도 했다.
사람을 그리기도 했고, 나무나 집을 그리기도 했다.
몇 가지 단어를 놓고 선택하기도 했고.
부담스럽지 않게, 놀이에 가까운 형태로 다가왔기에 이것들이 하나의 테스트라는 걸 알아도 거북하지 않았다.
평가를 위한 시험이 아니라, 자신을 찾기 위해 진행하는 것들이라는 걸 이해했다.
“선생님.”
“네?”
짙은 눈동자가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힘찬을 향하고 있었다.
“선생님이랑 대화할 때면 가끔 하준 형이나 지환이가 생각나요.”
“오, 칭찬인 거죠? 둘 다 무척 잘생겼잖아요.”
가볍게 윙크하며 농을 건네는 모습에 힘찬은 웃어버렸다.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말투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주는 모습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대화할 때면 시종일관 진지하게 마주하는 눈 덕분일까.
힘찬도 알 수는 없지만 정말로 찬영은 그들과 닮았다.
그날 상담도 온화한 공기에 감싸여 포근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힘찬이 오늘도 한결 후련해진 마음으로 나섰고, 정리가 끝나자 얼마 후 경환이 들어왔다.
“경환 군, 오랜만이죠?”
“네. 잘 지내셨어요?”
덤덤한 목소리가 여상스럽게 안부 인사를 건네왔다.
“네. 무척 잘 지냈답니다. 얼마 전부터 고구마를 키우고 있는데 쑥쑥 잘 자라는 게 무척 기특해요.”
본래 상담사는 자신의 신상에 관련된 이야기를 삼간다.
하지만 찬영은 어른에게 불신이 깊은 소년들의 경계를 낮추기 위해 아주 작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좋아하는 책, 키우는 식물, 좋아하는 음식 등
소소하게 공유하는 일상을 통해 그저 자신도 한 명의 사람일 뿐이라고.
더불어 나도 나를 알려줄 테니, 이야기해보지 않을래? 하는 신호였다.
힘찬과 경환에게는 이런 대화 방식을 주로 사용했다.
찬영은 겉모습과 달리 경환과 힘찬, 이 둘은 자신이 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셈을 철저히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에게 한 가지를 얻으려면 찬영도 한 가지를 건네주어야 했다.
“식물을 키우는 게 안정에 도움이 될까요?”
“꼭 도움 된다고는 할 수 없어요. 누구나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생명을 키우는 건 그만큼 책임감이 필요해요.”
최근 경환은 자신이 예전과 달라지고 있는 상황에 불안감을 느꼈다.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이전보다 낮아진 스스로가 낯설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으로 보였다.
찬영은 그런 경환에게 사람을 믿는 데엔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다고 솔직히 이야기했다.
지금 친분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처럼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말 악한 사람도 있으니까.
다만, 마음이 조금은 놔도 된다고 판단했기에 변해가는 게 아니냐고 경환의 선택을 지지해주었다.
변화는 천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된다.
하지만 자각하는 순간은 찰나인지라 누구나 평소와 다른 자신을 깨달으면 당황한다.
불안감은 삽시간에 퍼지고,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까지 두렵게 만든다.
찬영은 경환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으며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알려주었다.
언래블의 대부분 멤버들이 그랬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고, 그것을 두려워했다.
정확히는 그것으로 벌어질 상황이나 다른 사람에게 끼칠 피해를 걱정했다.
특히나 서로에게.
찬영은 늘 그것이 안타까웠다.
처음부터 언래블이 가진 특유의 결속력을 우려했다.
외부의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건 이해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누군가 한 명 흐트러지면 이 집단 자체가 휘청일까 염려되었다.
다행히 서로가 서로의 약한 점을 잘 보듬고 있었지만, 상담사로서 찬영은 늘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다행인 건, 멤버들 모두가 이제는 찬영에게 질문하는 걸 꺼리지 않았다.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걸 피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상담은 진척이 있는 것이니.
* * *
세빈은 최근 재준의 시선이 무척 거슬렸다.
뒤에서 욕한 걸 들키고, 한차례 일이 있었던 사람이지만 세빈은 나름대로 그를 이해했다.
더군다나 먼저 사과하려 애쓰기도 했으니까.
그러면서 세빈은 친구의 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건지.
곰곰이 생각해봐도 세빈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동갑은 없는 듯했다.
그냥 같은 반 사람, 아는 사람만 있었다.
DCL을 제외하면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전부 훨씬 형들이어서일까?
세빈은 형들이 더 편했다.
그래서 이제는 딱히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적당히 관계를 유지하는 건 할 수 있지만, 언래블의 형들만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재준이 자꾸만 시야에 걸렸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서 쳐다보면 재준이 있었다.
무언가 늘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로 쳐다봐놓고 정작 시선이 마주치면 도망가버렸다.
저 얼굴은 꼭….
“뭐 마려운 강아지?”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온 말에 세빈이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혼자 조그맣게 중얼거린 말이라 들은 사람은 없었다.
“환이 형 없어서 다행이다.”
세빈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힘찬과 어울리다 말이 옮아버린 듯했다.
지환의 표현을 빌리자면, 힘찬은 종종 점잖지 못한 표현을 하곤 했다.
방금 세빈이 무심코 내뱉은 말도 처음에 힘찬이 욕설을 섞어 말했었다.
그 말을 들은 지환이 기함하며 힘찬에게 삼십 분간 설교했고, 옆에 있던 세빈까지 덩달아 그 이야길 들어야 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지환은 그길로 둘을 끌고 하준에게 달려가서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로 하소연했다.
눈썹을 꿈틀거리던 하준은 힘찬과 세빈을 붙들었고, 추가로 삼십 분간 더 혼이 났다.
늘 그런 식이었다.
어쩌다 험한 표현이나 욕설이 나오면 하준과 지환은 곧 세상 망한다는 말을 들은 얼굴이 되었다.
그 덕에 세빈은 형들 앞에서는 조금이라도 거칠 거나 험한 표현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평소 말투가 은연중에 묻어나오는 법이라며 하준과 지환은 틈만 나면 멤버,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물론 세빈은 아주 가끔은 형들 놀린다고 모른 척 험한 말을 툭 내뱉기도 했지만.
그건 그거고 재준이 자꾸 시야에서 얼쩡거리는 건 신경이 쓰였다.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든가.”
세빈은 재준을 냉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살갑게 굴지도 않았다.
그냥 같은 반 동급생.
그 정도로 대했건만, 재준은 아직도 세빈의 눈치를 봤다.
가끔은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섰다.
세빈에게 할 말이 있으면 와서 하겠지 하고 내버려 두고 있었지만, 슬슬 지쳤다.
그때 일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은 건가 했지만, 그때 일은 정말 에피소드처럼 그냥 흘러가고 끝났다.
언래블측에서 아무런 모션을 취하지 않았으니까.
마냥 팔랑거리는 형님들 챙기기도 벅찬 세빈은 재준까지 신경 써줄 여력이 없었다.
필요도 못 느꼈고.
한숨을 푹 내쉰 세빈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아는 척하는 같은 반 애들에게 적당히 손을 흔들어 인사를 남기고 빠른 걸음으로 교문을 향했다.
교문으로 가는 내내 뭔가 평소보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는 늘 시끄러우니까.
하지만, 그때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세빈이 왔어? 우리 막내가 제일 먼저 왔네?”
“?”
왜 내가 우리 막내인 것인지.
왜 가영 형이 우리 학교 앞에 있는 것인지.
세빈은 갑자기 눈앞에 뿅 하고 나타난 가영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아니, 말문이 막혔다는 게 더 맞겠지.
“형 보니까 막 반가워서 말문이 막혀?”
“널 보니까 기가 막힌 거겠지.”
서늘한 말투에 고개를 돌리니 키스도 있었다.
“어…. 어쩐 일이세요?”
우리 학교 앞에 형들이 왜 있어요?
라는 질문 대신 다행히 정상적인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이야, 세빈이도 여기 다니는구나. 나도 여기 졸업했는데. 선배님, 해봐. 선배님.”
가영과 키스만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한데 갑자기 골든 아워의 하겸도 뿅 하고 튀어나왔다.
방금까지 머리를 아프게 했던 재준이나 다른 문제들이 싹 날아가 버렸다.
세빈은 다 모르겠고, 그냥 빨리 지환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형, 나 좀 구해줘요….’
* * *
“아니, 알만한 어른들이 거기서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거기 다니는 애들도 대부분 알 거 다 아는 애들이잖아.”
“그냥 아는 거랑 당사자들이 학교 앞을 지키고 있는 거랑 같아요?”
말도 없이 학교 앞으로 차를 끌고 온, 이 시한폭탄 같은 형님들 덕분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학교에서 무슨 말이 돌지 벌써 귀가 따가운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짧은 사이 무슨 일을 겪은 건지 우리 소중한 막내는 날 보자마자 울망울망한 눈을 했다.
시커멓고 커다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막내를 구출하고 차로 다 밀어 넣고 나니 절로 기운이 쭉 빠졌다.
“아니, 세빈이 이제 우리만큼 큰데 우리가 왜!”
“맞아! 세빈이 나보다 크다고!”
“아, 모르겠고. 내 새끼 놀라게 하지 마요.”
세빈이랑 엇비슷한 키의 하겸 형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곧 180cm를 눈앞에 둔 우리 막내는 어쩐지 늘 그 키보다 작아 보였다.
워낙 얼굴이 아기 같아서 그런 걸까?
“그래서 왜 온 거예요?”
한바탕 시끌시끌한 형님들을 조용하게 만들기 위해 한창 찬이와 장난치던 가영 형에게 물었다.
하겸 형은 운전하고 있으니 안되고, 그 옆에 앉은 키스 형도 죄가 없을 테니 패스.
키스 형은 나서서 사고치는 타입은 아니니, 세비 형이 안전장치로 함께 보낸 게 아닌가 싶었다.
“와, 이제 이렇게 형을 홀대한다고?”
“맞아. 이유 없이 동생들 보고 싶어서 올 수도 있지!”
가영 형과 운전석의 하겸 형이 떠들었지만, 그런 얕은 수작에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내가 형들을 하루 이틀 보나?
“형들, 각 팀 동생들 학교 앞에 찾아간 적 있어요?”
내 질문에 꿀 먹은 경환 형마냥 입을 다문 둘.
둘이 얌전해지자 키스 형이 한숨과 함께 상황을 이야기했다.
“오리진 애들 데뷔한 건 기억하지?”
“네. 알죠. 투표도 해줬는걸요.”
투표했다는 내 말에 가영 형이 피식 웃었다.
“이런저런 회사 사정 때문에 골든 아워랑 우리가 프로그램을 하나 찍게 됐는데, 거기 오리진 애들 좀 넣어달라고 청탁이 들어왔거든.”
“어허, 청탁이라니. 협조 요청이라고 하자.”
아무래도 JC 엔터에서 띄우려고 여기 찔러넣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언래블 불러 달라고 했어.”
“그거랑 지금 납치가 무슨 상관이에요? .”
부루퉁한 내 질문에 가영 형의 눈이 위험하게 반짝거렸다.
뭔가, 당장 저 형에게서 도망가야 한다는 촉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