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 너나 해(5)
연진과 연희 자매는 언래블 덕질로 급격하게 사이가 좋아졌다.
연희의 독립 후 서먹해졌던 사이가 뜻하지 않은 연희의 덕통사고 이후 돈독해진 것.
부모님은 나이 먹을수록 역시 피붙이밖에 없지? 하고 오해하셨지만.
어쨌든 피보다 진한 전우애라도 다져진 자매는 오늘도 연희의 집에서 만났다.
정확히는 PC방에서 만나 피켓팅에 도전한 것.
집에서 하기엔 불안했기에 같이 만나서 하기로 했다.
그나마 티켓팅 경험이 있는 연진은 먼저 빠르게 세팅한 후 연희를 도왔다.
그리고 시작된 결전의 순간.
몇 번이나 연진이 주의를 준 덕분인지, 아니면 초심자의 행운인지.
연희는 긴장해서 식은땀을 흘리던 것에 비해 첫날은 스탠딩, 둘째 날은 1층 앞줄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비명 같은 외침을 지른 연희는 울기 직전의 얼굴로 동생을 바라봤다.
회사에서는 차갑기로 유명한 연희였다.
늘 자기감정을 드러내면 손해 본다고 생각했던 연희지만, 지금 이 순간은 어째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내 것인지 환청인지.
정말 예매가 된 게 맞는지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간신히 양일 모두 스탠딩으로 잡은 연진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런 언니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언니 얼굴도 놀라웠지만, 둘 다 무사히 양일 예약에 성공했다는 기쁨이 더 컸다.
그 와중에도 연진은 내내 아쉬웠다.
올림픽홀이면 어디든 잘 보일 거라는 생각과는 별개로 좌석이 너무 적었다.
처음 공지가 떴을 때 연진은 무척 걱정했다.
올림픽홀은 해봐야 3천석 일 텐데 초창기부터 언래블 덕질을 해온 연진이 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하다못해 핸드볼 경기장을 대관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커뮤니티에서도 ON 엔터에서 대관 일정을 잡을 때 너무 보수적으로 계산한 것 아니냐는 푸념이 가득했다.
이대로 가다간 일반 예매 때는 자리 없는 것 아니냐는 불안.
콘서트 공지가 공식적 올라온 후로 커뮤니티와 SNS는 매일같이 난리였다.
아닌 게 아니라 얼마 후 전 좌석이 매진되었다.
새로 고침 할 때마다 어쩌다 한두 자리가 있다고 떴지만, 눈에 보이는 포도알은 없었다.
회사에서 일부 좌석은 일반 예매를 위해 빼두었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어쨌든 목표로 했던 양일 모두 예매한 게 어딘가 싶었다.
긴장한 언니를 달래느라 커뮤니티를 보지 못했던 연진은 자신이 얼마나 성덕인지 알지 못했다.
얼마나 긴장한 건지 연희는 예매 후 넋이 나가버렸다.
비틀거리는 연희를 부축해서 연희 집에 도착한 둘은 바로 치킨을 시켰다.
오늘 GIVE 앱 라이브 공지가 있었기에 예매 후 되든 안 되든 일단 같이 보기로 이야기했었다.
“아, 나도 빨리 독립하고 싶다…. 굿즈랑 앨범으로 방 가득 꾸며놓고 싶어.”
“꾸미는 건 그렇다 쳐도 청소 감당되겠어?”
“진열장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동생의 독립 발언에 겨우 정신을 차린 연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사는 게 녹록지 않다는 걸 아직 어린 동생은 잘 모른다.
연희도 혼자 살기 전까지는 몰랐던 이야기였으니까.
정작 그렇게 걱정하는 연희도 벽면 한쪽에 책을 정리하고 언래블 공간을 만들어두었다.
아직 굿즈도 앨범도 많지는 않았지만, 차곡차곡 쌓여가는 모습을 보는 건 꽤 뿌듯했다.
“오늘 라이브에서는 콘서트 얘기 좀 하려나?”
“응원봉이랑 굿즈도 보여주지 않을까?”
평정을 되찾은 연희는 덕질하면서 모니터부터 바꾼 걸 가장 잘한 일이라 느꼈다.
24인치 모니터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덕질할수록 점점 더 크고 선명한 화질로 보고 싶어졌다.
그 후 큰맘 먹고 32인치 모니터를 질러버렸다.
그날의 자신을 다시 한번 칭찬하며 나란히 앉은 자매는 암묵적으로 티켓팅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탓에 괜히 말을 꺼냈다가는 연희가 울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얼마 후 둘의 핸드폰이 울었고, 곧바로 연희는 컴퓨터로 GIVE 앱을 켰다.
화면 가득 보이는 따뜻한 색감의 공간과 둘 줄로 쪼르르 앉아있는 언래블.
“내 새끼들, 오늘도 예쁘다….”
한숨인지 감탄인지 알 수 없는 연희의 중얼거림에 연진은 기가 막혔다.
언제부터 언니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어, 눈앞의 이 사람이 자신의 호적 메이트 맞는지 아주 잠깐 의심했다.
“저거 응원봉 박슨가 봐! 박스 디자인도 예쁘다.”
“정균찡이 배운 변태라는 게 학계 정설이지.”
멤버들은 활짝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품에 얌전히 안긴 박스는 언뜻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새까만 직사각형의 겉면에는 모서리마다 금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 솜뭉치! 우리 응원봉 나왔어요!
- 응원봉!!
“아이고, 얘들아….”
연진은 웃음을 참지 못했고, 연희는 하준과 동기화된 것처럼 똑같이 애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막내들의 흥을 익히 아는 둘은 하준과 작은 환이 저 둘을 정리하겠구나 하며 닭 다리를 들었다.
솜뭉치들도 이제는 하루 이틀 보는 게 아닌 익숙한 광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힘찬을 툭툭 쳐서 자리에 앉혔다.
매서운 지환의 시선에 금방 쭈글쭈글해져서 쪼그려 앉는 힘찬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하찮기도 하고.
반면 세빈이는 흥에 겨워 발딱 일어났다가 금방 하준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에 앉았다.
- 네, 잠시 상황 정리가 있었습니다. 우리 솜뭉치들 이제 익숙하죠?
- 부끄러우니까 방금 일은 잊어주세요.
- 왜 우리가 부끄러워!
- 제발 조용히 해….
한시도 오디오가 비지 않는, 멤버들로 꽉 찬 화면이 무척이나 흡족했다.
와글와글 떠들던 멤버들은 하준이 다시 인사하자고 말하자 금세 입을 다물고, 하준의 선창에 따라 인사했다.
그걸 지켜보던 연희와 연진은 자신도 모르게 멤버들의 인사를 따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함께 풀어나가는 미래.’
유치하다면 유치하고 예쁘다면 예쁜 말.
하지만 그 문장만큼 언래블을 잘 나타내는 말도 없다고 솜뭉치들은 생각했다.
둘은 손에 쥐었던 닭 다리를 내려놓고 화면에 집중했다.
- 네, 우리 솜뭉치들 많이 기다렸죠? 공지 보고 다들 좋아해 주셔서 저희도 너무 기뻐요.
- 아, 오늘 티켓팅이었죠? 힘들었어요? 미안해요. 더 큰 곳에서 했으면 좋았을 텐데.
어떻게 말하는 게 늘 저렇게 다정할까.
하준이 입을 열자 지환이 팬들이 올린 메시지를 받아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얼마나 바빴던 건지 오늘이 선 예매일인지도 몰랐던 듯했다.
잔뜩 내려앉은 눈썹,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동자.
지환이 미안하다며 팬들을 다독이자, 우는소리 하던 팬들은 화들짝 놀라 아니라고 자기들이 더 열심히 응원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 쟤는 진짜….
- 왜요, 힘찬 씨 뭐 할 말 있어요?
- 아니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냥 다 잘못했어요….
소파에 앉아 조곤조곤 말하는 지환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올려다본 힘찬이 중얼거렸다.
그러자마자 힘찬 뒤에 앉아있던 지환이 힘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정히 물었다.
하지만 언래블도 알고 솜뭉치도 알았다.
얼굴만 다정하지 손은 다정하지 않았다는 걸.
- 응원봉, 진짜 기대했어요.
- 앗, 저도요! 저희 진짜 열심히 회의해서 만들었어요!
그런 둘에 시선조차 주지 않던 경환이 자신의 박스를 테이블 위에 탁! 하고 올리며 말하자 옆에 있던 세빈도 손을 들었다.
“역시 우리 곰돌이는 신경 쓰지 않지.”
“얼굴 왜 이렇게 진지해, 귀엽게.”
“손은 왜 드니, 세빈아….”
“우리 막내 몸만 컸지, 아직 애기야, 애기.”
연희와 연진은 나란히 앉아있었지만 대화하진 않았다.
그저 멤버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각자 앓는 소리만 툭툭 내뱉을 뿐.
멤버들의 복작거림 사이 하준은 능숙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반면, 언래블 최약체 하면 지환만큼이나 자주 언급되는 영빈.
그는 이미 진이 빠진 듯, 품 안의 응원봉 박스만이 구명줄이라는 것처럼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저 덩치에 저러고 있는데 왜 귀여워.”
“누가 빨리 우리 빈이 입에 홍삼 넣어줘라.”
왁자지껄 떠드는 아랫줄의 막내 라인을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영빈.
오늘은 막내 라인이 설명하기로 한 건지 경환이 열심히 응원봉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 말이 많지 않았던 터라 귀한 장면이었다.
나란히 앉은 셋은 미리 짠 건지 진지한 얼굴로 라텍스 장갑을 꼈다.
가운데 앉은 세빈이 ‘메스!’하고 외치자 경환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커터칼을 세빈의 손에 쥐여주었다.
물론 진지한 건 아랫줄의 막내 라인뿐이었다.
소파에 앉아 그런 막내들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는 셋.
그 얼굴은 화면을 통해 막내 라인을 지켜보는 솜뭉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손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해.
- 칼날 너무 많이 빼지 말고.
그 와중에 지환은 막내를 향해 걱정이 듬뿍 담긴 말을 계속 건넸다.
진지한 얼굴을 하려던 세빈은 지환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네’하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부끄러운 건지 수줍은 건지 귀는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 너 때문에 진지한 분위기가 안 되잖아!
- 진지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 우리 연습도 했거든!
힘찬의 억울한 외침에 태연히 대꾸하는 지환의 목소리는 세빈에게 했던 것과는 분명한 온도 차가 느껴졌다.
“그치, 우리 작은 환이 찬이를 가만 둘리 없지.”
“중간에 온도 차 어쩔 거야….”
지환과 힘찬이 투덕거리는 사이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던 곰돌이 경환.
혼자 동떨어진 공간에 있는 듯한 평온함이었다.
간신히 박스가 개봉되고 세상 밖으로 나온 응원봉.
- 차근차근 하나씩 설명해드릴게요. 여기 손잡이 부분은 그립감을 생각해서….
막내는 아직 상황극을 포기하지 못한 듯했다.
경환은 양손으로 공손하게 응원봉을 받쳐 들고 있었고, 세빈이는 한 부분씩 집어 가며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응원봉은 다크 네이비의 손잡이로 시작해 투명한 돔이 덮여있는 모습이었다.
돔의 아랫부분에는 떠받치듯 부드러운 물결무늬가 손잡이보다 연한 네이비로 장식되어 있었다.
“저거 바다 표현한 거 같지?”
“응. 우리 애들 여태까지 앨범에 계속 바다랑 물 나왔잖아.”
연희와 연진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응원봉을 품평했다.
- 요기 손잡이부터 여기까지! 저희는 바다, 하늘, 우주를 담고 싶었어요. 그래서 어울리는 색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고요.
- 그 모든 것 안에 저희와 솜뭉치, 이렇게 둘이서 안전하게 있는 모습인 거예요.
- 저희만 해도 여섯 명인데 둘이서라뇨.
-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조금 진지하게 설명하나 했더니, 금방 삼천포로 빠졌다.
돔 안, 중심에 언래블의 로고인 ‘U’자와 그를 둘러싼 끈이 있었다.
“저 로고 볼 때마다 괜히 울컥해….”
“으휴, 우리 애들 착해빠져가지고….”
로고가 정식으로 나타난 건 팬클럽 창단식 때였다.
창단식 때 선보인 언래블의 로고는 언래블과 솜뭉치가 한 몸이라는 뜻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모나거나 삐죽한 구석 없이 모든 선이 부드러웠다.
적어도 서로에게만은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들의 뜻처럼.
연희와 연진은 화면 가득 웃고 떠드는 언래블을 바라보며 그들의 로고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응원봉은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저 언래블이 즐거워하고 행복한 듯 웃고 있다는 것만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