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49)화 (349/456)

349. 너나 해(4)

“어땠어?”

“에?”

지환은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야 한다고 밥도 안 먹고 버티더니 촬영이 끝나자마자 입안 가득 핫도그를 물고 있었다.

평소에 웅얼거리는 것조차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던 애가 이렇게 뭉개진 발음이라니.

진우는 그런 동생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늘 깔끔하던 지환의 입 주변에 설탕에 뭉개진 케첩과 빵가루가 묻어있었다.

진우는 재빨리 그 모습을 찍었고, 화들짝 놀란 지환이 안된다고 허우적거렸지만 굴하지 않았다.

“안 풀게. 형들이랑만 볼게.”

“그게 제일 무섭거든요!”

급히 물을 마시더니 평소 발음으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 음료수를 권했지만, 마지막 양심이라고 생수를 들이켰다.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리는 게 그답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하하, 절대 SNS에는 안 올릴게. 걱정하지 마.”

“아, 진짜!”

발을 동동 구르던 지환은 차마 진우의 핸드폰을 뺏지는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아마 진우가 아닌 힘찬이었다면 벌써 난리가 났으리라.

“촬영 끝낸 기분이 어떤가 궁금해서.”

“말 돌리는 거 아니죠?”

“그럼. 첫 영화 촬영이었잖아.”

배우답게 표정 관리 하나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진우는 금방 평소처럼 자상한 형의 얼굴이 되었다.

평소에는 병든 병아리처럼 시들시들하다가도 한 번씩 바짝 촉을 세우는 지환을 알기에 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진우를 이번은 넘어가 준다는 듯 흘겨본 지환.

진우는 휴지로 입가를 털어주며 씩 웃었다.

‘아직은 형한텐 안된다.’

불퉁한 표정으로 진우를 바라보던 지환은 언제 투덜거렸냐는 듯 금방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환은 제 생각을 말할 때면 언제나 깊이 고민하고 말했다.

단어 하나, 하나를 골라 언제나 말에 진심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장난칠 때조차 비속어 한마디를 내뱉지 않는 조심스러운 아이였다.

“솔직히 엄청 걱정했거든요. 제가 경험이 적잖아요.”

“드라마 한 편, 영화 한 편이면 적긴 하지.”

경험이 적다고 이야기하는 지환의 눈썹이 아래를 향해 추욱 처져있었다.

지환은 자신 없어 할 때면 꼭 저렇게 시무룩한 얼굴이 되곤 했다.

그러면서도 결국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 아래 얼마나 많은 노력이 숨어 있을까.

“물론 좋은 선생님들이 계속 도와주셨고 공부한다고 했지만, 그렇게 막 단기간에 잘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응.”

진우는 말하면서 점점 느려지는 지환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멀티플레이가 불가능한 지환은 이렇게 고민하면서 답할 때는 걸음이 느려졌다.

걷는 것까지 참 공지환답다 싶어 그 몰래 웃었다.

“최대한 노력했는데 마지막 촬영을 하고 나니까 뭔가 시원섭섭해요.”

잠시 걸음을 멈춰선 지환은 어딘가 쓸쓸한 얼굴로 웃었다.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과 큰 짐을 벗었다는 마음. 그 두 가지가 자꾸 왔다 갔다 해요. 어렵네요.”

“우리 지환이가 배우 다 됐네.”

“네?”

진우는 지환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진우가 보는 지환은 뭐든지 잘하는 애였다.

밥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작사, 작곡, 이제는 연기까지.

그런데도 늘 모든 게 어렵다고 자는 시간을 쪼개가며 몰두하는 기특한 동생.

아직 부족하다고 여기고 늘 노력하는 건 기특했지만, 진우는 그런 지환이 한편으로는 걱정이었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너무 낮게 보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니까.

진우는 지환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를 조금이라도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형도 늘 그런 생각을 해. 매번 고심해서 역을 고르고, 크랭크 인에 들어가고 무대에 오를 때면 걱정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늘 따라오는 거니까.”

“형이요?”

가뜩이나 큰 눈이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커졌다.

그렇게 연기를 오래 해왔고 잘하는 형도 걱정하냐는 뉘앙스였다.

지환과 이야기할 때면 더 기분 좋은 게 이런 부분이었다.

한없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다가도 한 번씩 상대방을 굉장히 대단한 사람처럼 대해준다.

그런 마음에 꾸밈이 없고 진심이라는 게 절절히 느껴져서 더없이 뿌듯해진다.

“그럼. 나보다 더 오래되신 선배님들도 아직도 무대가 즐겁고 무섭다고 하시는데 뭐.”

댕그란 눈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헤퍼졌다.

진우는 지환의 머리를 헝클며 시원시원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예전에 내가 한참 슬럼프에 빠져서 허우적댈 때, 경주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해주셨어. 연기라는 게 하면 할수록 더 어렵고 무섭다고. 그러면서도 거기서 못 헤어나오는 사람들이 배우라고.”

윤경주.

윤경주가 출연하는 작품은 망하든 망하지 않든 돈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 따라붙을 정도로 독보적인 연기자였다.

그녀는 남배우, 여배우 할 것 없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원로 배우이고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지환을 가르친 김미연과는 일생의 라이벌이라는 호사가들의 말과 달리 절친한 언니 동생 사이였다.

“너도 알다시피 형은 어릴 때부터 연기 하나만 했잖아.”

“네….”

“그래서 좀 머리가 컸을 때는 자신만만했거든.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당연히 계속 사랑받을 줄 알았어. 뭐, 다들 흔히 하는 착각이지.”

진우는 지환에게 10대에 겪었던 슬럼프와 좌절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그래도 하는 동안 재밌었지?”

“…네.”

어려웠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재밌었다고 말하는 지환의 얼굴이 발그랗게 물들었다.

“네가 앞으로도 연기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그게 뭐든 간에 한계를 정해놓지 마. 지환아.”

뜨끔한 얼굴로 진우의 눈치를 살피는 지환.

늘 자신 없어 하는 지환을 알기에 진우는 그 부분을 지적했다.

그냥 좋으면 지금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서 하면 된다고.

숨거나 피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학생, 연예인, 직장인뿐만 아니라 누구든 모두가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들고 어려운 건 마찬가지라고.

“네가 어떤 길을 가든지 형이 늘 응원할게. 넌 분명히 잘 해낼 테니까.”

진우는 진심을 듬뿍 담아 겁 많고 걱정도 많은 어린 동생을 다독였다.

늘 한걸음 물러나 지켜보던 지환이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게 기특했다.

그래서 이왕이면 자신을 믿고 더 당당했으면 했다.

“…네. 고마워요, 형.”

“알면 잘해라, 나중에 형 실버타운 보내주냐?”

이 작은 머리통은 또 열심히 생각에 빠지겠지만, 지금은 한결 후련해 보였다.

기분이 나아졌는지 지환은 진우의 농담에 슬그머니 웃더니 꿈에 나올까 무서운 말을 꺼냈다.

“가영 형이랑 같은 실버타운으로 모실게요.”

“와, 그건 심했다!”

나란히 걸으며 농을 주고받던 진우는 이왕이면 다음에 또 지환과 함께 연기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 * *

“저번에 했을 때보다 이번이 더 힘든 것 같아요….”

“그 와중에 자리 잡은 쟤는 뭐냐, 진짜.”

“우리 몰래 연습했어?”

콘서트 관련 공지가 올라오고 얼마 후, 드디어 팬클럽 선 예매 날이 다가왔다.

지난번, 우리의 예약 시도를 담은 VCR을 팬들이 꽤 좋아했다는 걸 기억한 회사는 한 번 더 해보자고 했다.

첫 콘서트니까 직접 시도해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냐는 말을 하면서.

그 말에 전의를 불태운 건 역시나 막내들이었다.

경환 형은 표정만 봐서는 알 수 없었고, 영빈 형은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의외로 준이 형은 이번에는 꼭 성공할 거라고 열의를 불태웠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익숙한 비명과 컴퓨터와 싸우는 소리.

“어? 나 한 거 같은데?”

그 와중에 경환 형이 어딘가 맹해 보이는 얼굴로 우리를 쳐다봤다.

역시 될놈될인가 하는 준이 형의 한탄.

경환 형은 자기가 잡은 자리를 유심히 보더니 언제 취소해야 하냐고 물었다.

보통 예매는 입금 기한 내에 입금되지 못한 자리가 자동으로 취소되어 풀린다.

그게 새벽 두 시였던가.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예매자가 취소하면 자리가 바로 떴던 것으로 기억했다.

오래된 기억을 더듬으며 이야기하다 보니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왜요?”

“넌 왜 그렇게 잘 알아?”

“그거야 당연히….”

멤버들뿐만 아니라 우진 형이나 회사 분들이 쳐다보는 시선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공부했죠. 왠지 또 할 것 같았거든요.”

“아, 치사해! 왜 너 혼자 공부하냐!”

경험으로 안다고 말할 수 없었던 나는 공부했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속으로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나와 경환 형이 예매했던 자리는 바로 취소 버튼을 눌렀다.

그 와중에도 미련 넘치는 얼굴로 계속 페이지를 새로고침하던 찬이와 세빈이는 우리 손에 끌려 나와야 했고.

‘하여튼 너는.’

‘그래도 잘 넘어갔잖아….’

‘그렇게 허술한 대답에도 잘 넘어가는 애들이라 다행인 줄 아셈.’

‘왜! 나름 신빙성 있는 대답이었는데!’

언제쯤 철두철미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거냐는 포잉의 타박이 이어졌다.

이렇게 헐렁하게 사는데 인생 2회차인 게 안 들키는 게 더 신기하다는 포잉.

처음에는 여러 번 실수할 뻔했었다.

포잉은 그때부터 자기 전에 날 붙들고 혹독하게 훈련했고.

멀티가 안되니 아예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자신에게 말 걸지 말라는 포잉.

그렇게 포잉과의 대화는 몇 가지 규칙을 세우고 적응하면서 조금씩 괜찮아졌다.

역시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었다.

언제까지 바짝 긴장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긴장의 끈이 풀리는 순간이 사고 나기 가장 좋은 순간이라고 하더구나, 계약자 놈아.’

‘네…. 조심하겠습니다요….’

어떻게 또 내 마음을 알았는지 치고 들어오는 포잉.

얌전히 수긍하고 조심하겠다고 빌어야 했다.

그때, 준이 형이 시끌벅적한 멤버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발 물러나 포잉과 이야기를 나누며 멤버들의 난장판을 구경하던 나도 형을 도왔고.

연달아 실패해서 시무룩해진 막내들을 열심히 달랜 우리는 다음 촬영을 위해 움직여야 했다.

이번에는 응원봉 실물을 솜뭉치들에게 보여주는 GIVE 앱 라이브.

미리 세팅된 휴게실에 들어선 우리는 직원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모든 멤버가 다 같이 응원봉 개봉 영상을 찍고 싶어 했기에 회의실에서 하기엔 좋은 각이 안 나왔다.

반원으로 앉아서 찍으면 나오기야 하겠지만 너무 멀게 보이니까.

그런 우리 의견을 들은 팀장님은 휴게실 중 한 곳에 있는 소파를 활용하자고 하셨다.

일부는 소파에 앉고, 일부는 바닥에 앉아 진행하자는 것.

소품을 배치하고 배경 이미지를 준비하는 고생을 모르지 않았기에 우리 모두 공손히 감사 인사를 했다.

“아, 긴장된다. 예쁘겠지?”

“당연하죠. 우리가 얼마나 머리 쥐어짰어요.”

응원봉 디자인에는 우리도 의견을 보탰다.

회사에서는 기존 아이돌 응원봉을 참고해서 여러 가지를 궁리했다.

점차 응원봉의 디자인이 다양해지고, 기능이 추가되면서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원격조종 기능도 필수였고, 발광도 너무 약하면 안 됐다.

그 발광의 유지 시간도 문제지만.

예쁘게 한다고 너무 세밀한 디자인을 넣으면 유지력이 문제였다.

콘서트장은 전쟁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평소에 수리받기도 어려워 대부분 콘서트장에서 A/S 부스를 마련해두는 실정이니 튼튼해야 했다.

온갖 의견이 오가고 전쟁 같은 회의 끝에 겨우 정해진 응원봉.

실물은 우리도 오늘 처음 보는 거라 다들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각자 품에 응원봉 박스를 하나씩 껴안고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방송이 시작되고 솜뭉치들이 들어오자 더는 기쁨을 참지 못한 멤버들, 아니 막내들.

“솜뭉치! 우리 응원봉 나왔어요!”

“응원봉!!”

찬이와 세빈이가 응원봉 포장 박스를 들고 흔들며 잔뜩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

“얘들아, 인사부터 해야지….”

애달픈 준이 형의 목소리와 이마를 부여잡는 영빈 형.

메시지 창에는 빵 터진 솜뭉치들의 웃음만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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