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 낙하(3)
전날도 몇 시간 못 잤던 터라 다들 피곤했지만, 차에서 내린 후부터는 영업용 미소를 장착했다.
이제 제법 경험을 쌓은 태가 나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의자에서 조느라 헝클었던 머리를 서로 정돈해주고 곧이어 도착한 서포트 팀의 가희 누나가 최종 점검을 해주었다.
사전 약속된 해당 업체의 회의실에는 우리 인원에 맡는 음료와 간단한 스낵이 준비되어 있었다.
적어도 우리가 이들에게 준비하고 맞이할 정도는 된다는 듯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허니비 때는 거의 완료된 계약이었고, 정말 가서 얼굴만 비추고 끝났던 터라 이런 경험은 또 생소했다.
이번 광고는 최근 젊은 층에서 인지도를 쌓고 있는 스포츠 의류 쪽.
저렴한 가격에 가격 대비 뛰어난 품질과 과감하고 매력적인 디자인으로 사랑받는 브랜드라는 평이었다.
팀장님과 실장님의 브리핑, 그리고 포잉이 나름대로 찾아본 정보에 따르면 후한 점수를 줄 수준이라고.
먼저 출발했던 실장님과 실무자들 간의 회의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때쯤 우리가 도착하면 된다고 하셨다.
“어서 오세요, 이번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는 도찬서 팀장입니다.”
“안녕하세요, 언래블입니다.”
“안녕하세요!”
준이 형의 선창 후 이어진 우리의 인사.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의 도찬서 팀장님은 우리에게 앉으라고 권유한 뒤 이런저런 내용을 물어보셨다.
“다들 키가 어떻게 되죠? 프로필상 키보다 더 커 보이는데.”
“혹시 선호하는 브랜드가 있나요?”
“가장 인상 깊은 문구 같은 게 있을까요?”
등등 우리 신체조건과 그 밖의 다양한 질문을 빠르게 쏟아냈다.
당황한 우리가 우진 형을 바라보자 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하나씩 성실히 답해드렸다.
민감한 문제가 아닌 취향의 영역인 문제를 물어보셔서 당황스러웠지만, 어려울 건 없었으니까.
나는 도착하자마자 회사를 둘러봐야겠다고 자리를 비운 포잉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포잉이 오면 그때부터 사람들의 속마음을 확인해볼 생각이었고.
“아, 질문이 너무 좀 그랬죠? 다른 게 아니라 촬영 때 사용할 의상 때문이에요.”
그 대답을 듣고 더 어리둥절해졌다.
보통 광고는 준비된 의상을 입고 찍었다.
개인적 취향이 반영되는 경우는 드물었으니까.
조금 특이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 우리 실장님과 회사 관계자인 듯한 사람들이 들어왔다.
“왔니?”
“네!”
다정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신 실장님은 자연스럽게 하준 형 옆에 착석하셨다.
모르는 공간이라 불안했던 우리에게 든든한 대장이 생긴 것 같은 기분.
조금 긴장한 듯 보였던 준이 형의 얼굴도 한결 편안해졌다.
이후 이어진 사측의 설명.
우리를 광고모델로 발탁하게 된 이유도 들을 수 있었다.
민감할 수 있는 이슈를 언제나 긍정적인 모습으로 해결해나간 것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스포츠 브랜드명 자체가 고대 그리스어의 희망을 뜻하는 단어 ‘앙퀴라’라고 했다.
언래블의 여태까지 행보와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가 잘 통할 것 같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며 도찬서 팀장님이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물론 그 아래 있는 여러 숫자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지 않았다.
아직 최고 상한가를 치기 전에 침 발라 놓을 목적인 게 뻔하다는 우리 팀장님 얼굴이 떠올라 웃음을 참기도 했다.
실제로 이름을 나누고 소개받은 회사 사람들의 속마음은 무척 다양해서 재밌기도 했다.
금전적인 이익, 앞으로의 화제성 등 비즈니스적인 요소는 이미 생각했던 것들이지만 호기심을 보이는 건 또 달랐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 대한 호기심, 우리 개인에 대한 호기심 등.
그간 대놓고 가십거리를 묻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속으로 떠올릴지언정 직접 묻지 않았다.
이어진 회의 내내 둥실거리고 떠다닌 속마음들은 다행히 버티기 힘들 만큼은 아니었다.
야근하기 싫다는 몹시 현실적이고 슬픈 중얼거림도 있었고, 술이 땡긴다는 멘트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공감했다.
나도 빨리 우리 애들이랑 맥주 한잔하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미팅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온 우리.
다들 피곤함에 찌들어 있던 터라 간신히 개인 연습만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연습실 가득한 행거를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 이게 다 뭐에요?”
“뭐긴, 광고주님 선물이지.”
“헐….”
눈이 휘둥그레진 멤버들은 숙소보다 익숙한 연습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찬이와 세빈이는 눈을 번뜩이며 행거에 빠르게 달라붙었다.
“이거 그럼 다 저희 옷이에요?”
“응. 협찬인 줄 알았는데 너희 다 입으래. 대신 자주 입어달라고 하더라.”
신난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서포트 팀의 두 누님은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번뜩였다.
“그래서 어제 그걸 다 물어본 건가?”
“와, 그래도 이건 좀….”
어제 무서울 정도로 우리 취향과 평소 의상에 관해 묻던 도 팀장님이 떠올랐다.
선호하는 색상이나 브랜드, 신체 사이즈 등을 이상할 정도로 캐묻더니.
“전에 패션쇼 할 때 협찬 들어온 거 이후로는 이렇게 많은 건 처음이네요.”
“후후, 그건 협찬이었잖아. 이번엔 다 너희 거야!”
희주 누나는 일찍부터 의상을 분류해둔 건지, 찬이와 세빈이에게 한쪽 행거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 입을 만한 거 이쪽으로 빼놨어. 얘들아, 이리 와서 입어보자!”
옷이 많아진 건 감사하지만, 막내들과 눈을 번뜩이는 누님들의 시선이 무척 무서웠다.
자기도 모르게 슬금슬금 뒤로 빠지던 경환 형은 어느새 다가온 우진 형에게 붙들렸다.
“형?”
“자, 경환이 여깄습니다.”
가장 먼저 잡혀간 경환 형.
평소 옷차림이 늘 검정 티와 츄리닝이라 사방에서 원성을 샀던 우리 형.
오늘 아무래도 제일 오랜 시간 시달릴 것 같았다.
“환아.”
“네? 저요?”
“그래. 당장 이리 와.”
정정.
거기에는 나도 포함된 모양이었다.
* * *
한참 동안 여러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착용감과 의견을 말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나중에 우진 형을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현재 인기 있는 라인과 곧 출시할 새로운 라인의 의상들이라고.
활동량이 많은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잡은 터라 실제 연습 때나 평상복으로도 입고 피드백을 줘야 한다고 했다.
그럼 그렇지, 회사에서 무료로 이렇게 많은 의상을 건네줄 리 없었다.
광고 사진과 영상은 아직이었다.
콘서트를 앞두고 준비 중인 터라 회사와 일정을 조율 중이라고.
하지만 광고주님은 평소에도 입으면서 자체 리얼리티에도 노출되길 원한다고 했다.
일상에 스며드는 광고 효과 어쩌고 하면서 설명을 해주셨는데 사실 기억에 남는 건 없었다.
그저 옷이 갑자기 많아졌고, 숙소에 이 많은 옷을 다 쌓을 곳이 있는지가 걱정됐을 뿐.
다행히 누님들이 평소에도 입기 편할 것 같은 옷들만 따로 빼주셨다.
그렇게 한바탕 옷으로 전쟁을 치르고 나니 이상하게 기분이 간질거렸다.
우리가 그래도 좀 컸다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기분?
나만 그런 건 아니었는지 맏형들 얼굴에도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때.
“우리 오랜만에 GIVE 앱 켤까?”
“지금?”
“응. 옷 선물 받은 김에 자랑하자!”
찬이는 지금 당장 새 옷을 입고 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는지 준이 형과 세빈이를 붙들고 꼬시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옷에 가장 관심을 많이 두는 우리 막내 둘이 불이 붙은 모양이었다.
솜뭉치들과 대화하는 GIVE 앱은 아무리 틈나는 대로 해도 부족했다.
더 자주 보고 싶고, 대화하고 싶고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으니까.
하지만 GIVE 앱은 우리가 임의로 진행하기 어려웠기에 하준 형의 얼굴에는 고민이 가득했다.
“일단 광고인 걸 노출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도 여쭤봐야 하고 팀장님한테 물어볼게.”
“우와!!”
“여쭤본다고. 안될 수도 있다니까?”
신난 찬이가 준이 형을 붙들고 둥기둥기 이상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슬며시 거리를 벌린 나는 영빈 형 옆에 붙어 안쓰러운 눈으로 준이 형을 바라봐주었다.
옆에 있어봤자 휘말릴 게 너무 투명하게 보여서 어쩔 수 없었어, 형….
그렇게 기운 넘치는 찬이에게 붙잡힌 준이 형은 벌써 피곤해 보였다.
누님들을 도와 옷을 모두 갈무리한 우리는 숙소에 가져다 놓고 입으라는 의상을 구경하며 준이 형을 기다렸다.
“형, 이거 입으면 진짜 얼굴 살겠다.”
“색이 잔잔하니 예쁘긴 하다.”
“말하는 거 봐…. 어르신이세요?”
연분홍색 반팔 티를 들고 경환 형 몸에 대보는 세빈이, 덤덤한 얼굴로 색이 예쁘다고 하는 경환 형.
이런 장면을 보고 있자니 참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빈이는 의외로 까만 티를 챙겼고, 내게는 회색 바탕에 검정 포인트가 들어간 티를 밀어주었다.
“막내야, 형은?”
“형은 당연히 이거죠!”
영빈 형은 형들 챙기는 막내가 기특했던지 한마디 했다가 소매에 하얀색 포인트가 들어간 주황색 티를 받았다.
딱 봐도 영빈 형 취향이 아니었지만, 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 안 입는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그러게 왜….”
“조용히 해.”
차마 막내의 손길을 거절하지 못한 영빈 형은 조용히 손안에 티를 구깃거렸다.
“얘들아.”
“네!”
막내의 취향이 듬뿍 담긴 세심한 옷 배분에 웃는 사이 준이 형이 돌아왔다.
“아직은 광고 받은 거 노출하지 말라고 하셨어. 그냥 입고 촬영하는 건 괜찮고. 아, 그리고 콘서트 관련 언급 금지.”
일정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팬들에게 알리고 있지만, 직전까지 비공개인 경우도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광고는 그런 모양.
게다가 ‘낭만 가객’ 출연도 아직은 비밀이었다.
가끔 실수하는 찬이 때문에 팀장님이 GIVE 앱 촬영을 제한했기에 걱정했지만, 다행히 허락받은 모양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꽂히자 당황한 찬이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꼭 오늘은 실수 안 하고 잘할게.”
제법 진지한 얼굴을 하고 약속이라고 외치는 모습에 다들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어휴, 저놈의 시키.
준이 형이 우리를 대표로 찬이와 약속해주었다.
이번에도 스포 요정이 되면 멤버 모두의 응징을 받기로 한 것.
그렇게 신나서 옷을 갈아입던 우리가 간과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으니.
오늘이 그 삑삑이 운동화를 신고 촬영했던 분량이 업로드되는 날이라는 것이었다.
* * *
“안녕하세요, 언래블입니다.”
“솜뭉치들 잘 지냈어요?”
“보고 싶었어요!”
보안을 위해 GIVE 앱 방송을 줄여야 했던 터라 몇 주 만에 켠 것 같았다.
빠르게 늘어나는 접속자와 하트 수, 솜뭉치들의 인사에 우리는 활짝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화면을 통해 팬들을 만나는 건 늘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팬이었을 때는 습관처럼 행동했던 모든 것들.
라이브를 켜고, 하트를 클릭하면서 화면을 보던 모든 것들을 누군가 날 위해 해주고 있다는 것.
이런 간질간질한 기분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기 힘들 것 같았다.
“개인 연습하기 전에 솜뭉치들 보고 싶어서 켰어요!”
“자주 못 와서 미안해요. 더 자주 오도록 노력할게요!”
자주 보고 싶다는 예쁜 말과 뭐 하고 있었는지 묻는 말들.
그사이 어그로는 늘 있는 것들이라 이제는 우리 애들도 제법 태연하게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로 갑자기 보인 멘트에 다들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네? 삑삑이…?”
“벌칙이요? 그거 오늘이었어?”
“하, 하하.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언제 그 영상들을 본 건지 솜뭉치들은 그 운동화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선물 받은 운동화는 가지고 있냐는 둥, 귀여웠다는 둥 다양한 메시지가 불붙은 듯 퍼져갔다.
이 운동화에 대해서는 다 같이 침묵하기로 했기에, 우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모른척하기 시작했다.
이미 빨갛게 변한 영빈 형과 세빈이 얼굴.
유일하게 타격이 적은 찬이와 경환 형만 멀쩡해 보였다.
솜뭉치들, 우리 놀리는 게 그렇게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