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 낙하(4)
꼬까옷을 자랑하며 우리의 멋짐을 열심히 보여주려 했던 계획은 무참히 실패했다.
솜뭉치들은 하나 된 마음으로 홍옥처럼 붉어진 우리 얼굴을 보며 즐거워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단결이 잘되는 걸까?
오죽하면 세빈이는 솜뭉치들을 향해 울상이 된 얼굴로 물었다.
- 서로 다른 장소에 있는 거 맞아요? 다 같이 막 우리 보고 놀리고 있는 거 아니죠?
세상 억울한 얼굴이 된 세빈이.
소리 귀엽지 않았냐고 뻔뻔한 얼굴로 되묻는 찬이.
빨갛게 익은 얼굴로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인 우리 영빈 형.
늘 그렇듯 담담한 얼굴로 자기가 분홍색이 잘 받는 줄 몰랐다고 하는 경환 형.
오늘도 그런 멤버들을 해탈한 스님처럼 인자한 얼굴로 바라보던 준이 형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닌 듯 각자 할 말만 하는 상황에 내 정신까지 아득해졌다.
간신히 상황을 정리하는 내게도 테이블에서 발딱 일어나던 모습이 귀여웠다는 놀림이 있었지만….
다행히 잘 넘어갈 수 있었다.
나중에 내 얼굴도 영빈 형만큼 빨갛게 변했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겨우 흥분한 솜뭉치들을 다독이고, 정신 줄 놓으려는 멤버들을 챙기고.
마지막으로 타이틀곡의 짧은 소절과 안무를 보여주고 GIVE 앱 라이브를 끝낼 수 있었다.
원래도 마지막에는 앨범 활동 끝난 걸 아쉬워하는 팬들을 위해 짧게 라이브를 보여주기로 이야기 해두었다.
매일 매일 연습 끝나면 기어 다녀야 할 정도로 연습했던 덕분일까.
허둥지둥했던 멤버들은 곡을 준비하자는 말에 바로 대형을 잡았다.
실수 없이 끝내서 간신히 체면치레를 한 우리는 활짝 핀 얼굴로 또 보자는 말을 건네며 GIVE 앱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솜뭉치들을 이기긴 힘들겠죠?”
“적이냐, 이기게….”
시무룩해진 막내의 질문에 찬이가 툴툴거렸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아는 준이 형은 막내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포기하면 편해. 원래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거랬어.”
“그럼 우리가 맨날 지는 게 맞네!”
“솜뭉치들 의견은 또 다를 것 같다만.”
짧은 대화에 힘을 얻은 막내가 살아났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 실없이 웃어버렸다.
좋다.
우리는 매일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건 각자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고, 팀과 함께하는 사람들, 우리 팬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금방 신나서 숙소 가자고 폴짝거리는 우리를 바라보던 포잉은 평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저 한숨이 세상만사를 포기한 듯한 한숨처럼 들렸지만, 어쩔 수 없지 뭐.
한껏 놀림당하였던 사실을 금방 잊어버리고 신나 하는 멤버들이 내 눈에는 마냥 귀여웠으니까.
긍정적인 게 좋은 거 아니겠어?
* * *
숙소로 돌아와 흐느적거리는 멤버들 사이에서 대본을 넘겨보던 나.
공부할 때는 되도록 방해하지 않는 멤버들이지만, 오늘따라 자꾸만 눈치를 보는 게 이상했다.
“왜?”
“으응?”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막내들뿐만 아니라 우리 곰돌이 형님도 그렇고, 맏형들까지 무언가 궁금한 눈치였다.
“그, 영화 있잖아.”
“네.”
앞으로 꽤 많은 일정이 남았지만, 내가 나올 분량은 대부분 끝나가고 있었다.
“촬영 곧 끝나?”
“저 나오는 부분은 미리 좀 당겨서 찍는다고 하셔서 곧 끝나요.”
“그렇구나….”
무언가 아직 할 말이 남은 표정의 준이 형.
멤버들은 내가 진우 형과 같은 영화에 출연한다는 소식에 밥차와 간식 차를 보낼 정도로 응원해주었다.
멤버들이 보내고, 팬분들이 보내주시고, 다른 배우님들 팬분들이 또 보내주시고.
덕분에 공식 SNS에 홍보 겸 자랑도 했고, 이미 기사도 몇 번 내보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때는 마냥 좋아만 했는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들여다보던 대본을 접고 자세를 바로 하자, 덩달아 나만 쳐다보던 멤버들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뭐에요, 혹시 나만 모르는 무슨 문제 있어요?”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내가 바쁘다고 나한테만 말을 못 한 게 있는 건가?
슬며시 덩치를 불리는 걱정을 꾹 누르며 멤버들을 바라보자 준이 형이 나서서 다독였다.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음, 그냥 우리끼리 그런 말이 나와서.”
“어떤 말이요?”
“오해하지 말고 들어. 알았지?”
무슨 말을 하려고 준이 형이 저렇게 뜸을 들일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연기에 더 몰두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말이 나왔어.”
“네?”
개인 활동이 많아지면 팀 활동에 지장이 가게 될 테니 그 부분을 걱정하나 했더니,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가 각자 잘할 수 있는 것들이 조금씩 다르잖아. 그래서 서로 더 밀어주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고.”
“네.”
얌전히 이어지는 준이 형의 말을 듣자, 영빈 형이 준이 형 뒤에서 슬며시 웃었다.
영빈 형은 종종 저렇게 나나 멤버들을 바라보며 기특하다는 듯 홀로 웃었다.
“저번 드라마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현장에 계신 분들이나 다른 배우분들이 칭찬을 많이 한다고 들었어. 드라마 때 네 연기를 놓고 반응도 엄청 좋았고.”
준이 형이 차분히 하나씩 이야기를 늘어놓자 막내의 얼굴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아이고, 난 배우로 전향할 생각 없는데.
자꾸 내 눈치를 보는 것으로 보아 우리 세빈이는 내가 배우 되겠다고 할까 봐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네가 그룹 활동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고 있지만, 네가 더 잘 할 수 있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건 없을까 했거든.”
“이미 충분히 많이 도와주고 있거든요!”
가만히 놔두면 대화가 어디까지 갈지 알 수 없어진 나는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양반들이 도대체 무슨 고민을 하는 거야!
“저는 새로운 거 하는 것도 좋고 다 좋은데 언래블이 제일 우선이에요! 우리 팀 활동이 제일 중요하니까 이상한 생각 말아요.”
정색하고 단정 짓는 내 말에 막내들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맏형들은 아직 근심이 남은 얼굴이었다.
“우리가 네 발목을 잡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워서 그래.”
“전혀요.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예요?”
정색하고 이야기를 하자 조금 멋쩍은 얼굴을 한 준이 형이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배우실의 실장님과 우리 실장님의 이야기에 내가 언급되는 걸 우연히 들었던 일.
다른 직원분들이 지나가면서 내 앞으로 들어오는 연기 쪽 일이 많이 늘었다고 했던 일 등.
그 사람들은 어른이면서 그렇게 말조심을 못 하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은 우리 애들이 어떤 상처를 입을지 생각도 못 하고.
준이 형이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할 정도면, 다른 멤버들도 오다가다 한 번씩은 들었다는 말일 텐데.
“진짜로 저 배우로 전향할 생각 없고, 무조건 우리 일이 먼저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요.”
우리 애들도 참 우리 애들다웠다.
다른 팀은 개인 활동 늘면 시기 질투 때문에 문제라는데 개인 활동 더 잘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고민하다니.
이렇게 순두부 같은 아이들을 어쩌면 좋나 싶어 이 일은 꼭 팀장님에게 의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단호한 내 대답에 평소에 표정 변화가 많지 않던 경환 형까지 슬그머니 웃는 걸 보면 다들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이래서 개인 활동하기 싫었는데….
눈치 보던 막둥이를 불러다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덩치만 컸지 아직 애기인데 벌써 그런 생각을 하다니.
“저는 개인 활동하러 나가는 것보다 작업실에서 곡을 만드는 게 더 재밌어요. 제가 그쪽은 재능이 부족해서 아직 더 좋은 곡은 못 만들고 있지만.”
“무슨 소리야, 이번에 새벽 형들 타이틀 가사도 네가 써놓고.”
“그건 멜로디가 워낙 좋았고요.”
영빈 형의 타박에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멜로디가 너무 좋아서 듣자마자 가사가 술술 써졌다.
가영 형이 직접 썼어도 잘 썼을 거라는 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알고 있었다.
“연기도 새롭고 재밌는데 너무 머리 아파요. 진짜 생각해야 할 것도 너무 많고 어려워요. 그렇다고 다른 게 쉽진 않지만.”
“많이 힘들어요?”
“그래도 보람은 있으니까.”
손때묻어 새까맣게 변한 대본과 거기 적힌 메모를 슬쩍 쳐다본 세빈이는 질린다는 얼굴이 됐다.
아직 말랑한 볼을 쭉 잡고 늘렸더니 아프다고 울상이 되어서도 내 손을 잡아빼진 않았다.
이렇게 예쁜 내 새끼 두고 내가 어디를 가.
솔직히 팀 전체가 전부 잘되면 좋지만, 아이돌은 대개 특정 멤버가 개인 활동으로 이름을 알려서 점점 더 소문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예능에 그렇게 목을 매는 이유도 다 그것 때문이니까.
“그래, 우리 환이가 우릴 너무 좋아하는 걸 또 잠시 잊었네.”
“아니, 그렇게 막 좋아하는 건 아닌데요?”
“다 알아. 어이구, 이렇게 우리 좋아서 죽고 못 사는 게 그동안 어떻게 참았어?”
“와, 또 말이 그렇게 된다고? 나만 그래?”
단호한 내 의사 표현에 조금 놀랐던 멤버들도 금방 평소 얼굴로 돌아왔다.
이렇게까지 강하게 내 의사를 말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뒤늦게 쑥스러움이 물밀듯 몰려들었지만, 이미 멤버들은 먹이를 문 하이에나 같았다.
“아, 쫌!”
“그럼 우리 환이 우리랑 노예계약, 아니 종신 계약해야겠다.”
“잠깐만, 노예계약이라니!”
“지환이가 언래블 공식 노예가 되는 건가.”
“저기요, 님들?”
낄낄대는 찬이와 옆에서 쿵짝이 맞아 종이까지 들고 오려고 들썩이는 경환 형.
세빈이는 펜을 찾아야 한다고 일어나려다 기어코 나한테 등짝을 얻어맞았다.
좋다고 한바탕 낄낄거리며 러그 위에서 난리를 피운 멤버들.
나만 우리 팀 소중히 여기는 거냐고 소릴 질러도, 하나같이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놀려댔다.
어떻게 이렇게 누구 하나 몰아가는 솜씨들이 일품인지.
‘리더 몰이 시작한 거 님이었음.’
‘이런 게 업보구나….’
초반에 멤버들 사이에서의 어색한 느낌이 싫어서 준이 형을 놀리며 낄낄댔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 뒤로 멤버들은 몰이의 참맛을 알아버렸고, 틈만 나면 누구 하나 몰아서 짤짤짤 털기 바빴다.
그제야 준이 형에게 눈빛으로나마 미안함을 전했지만, 준이 형의 얼굴은 평온했다.
저 형, 지금 좋아하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던 기력까지 몽땅 뺏긴 후에야 이 빌어먹을 장난도 끝났다.
대본을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지친 몸을 러그 위에 누이자, 영빈 형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래도 환이가 이제 자기 의사를 제대로 말하는 것 같아서 형은 기쁘다.”
“맞네. 혼나고 싸운 보람이 있는데?”
“앞으로 잘할 테니까 이제 그만 해요….”
아직 기운이 남은 찬이가 옆에서 쿡쿡 찔러대고 귀찮게 굴어 발로 밀어버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다고 굴러가면서고 깔깔대는 게 어찌나 얄밉던지.
하지만 마음속 한편으로는 직접 말로 꺼내서 표현했다는 게 후련하기도 했다.
늘 혼자 속으로 고민하고 계산하고 이리저리 재보기 바빴으니까.
그러다 멤버들을 속상하게도 했고, 오해를 사기도 했다.
언래블은 앞으로도 점점 더 높이 올라갈 텐데 그걸 내가 어떻게 해보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걸 뒤늦게서야 깨달은 거고.
“이제 자자. 또 금방 일어나야 해.”
“아, 왜 맨날 놀 때는 시간이 금방 갈까.”
“연습할 때도 시간은 금방 가.”
“하루가 매일 짧아!”
언제나처럼 해산을 외치는 준이 형과 툴툴거리며 자리를 정돈하는 멤버들.
어차피 앞으로도 이 사람들은 쭉 나와 함께 할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알려주기도 할 거고, 화도 내줄 테니까.
“다들 잘 자요!”
“좋은 밤!”
파란만장했던 하루가 이렇게 또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