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 Daydream(1)
이상하게 마음이 허했다.
가장 두려워했던 것들을 어느 정도 털어냈기 때문일까?
이럴 때일수록 더 많이 담아야 할 것 같은데,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만들어놓은 곡도 제법 되고, 방송 출연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이렇게 바쁘게 일상을 보내는 데도 가슴에는 구멍이 난 것처럼 휑했다.
이유 모를 허전함으로 책상을 박박 긁고 있던 그때, 우진 형이 불렀다.
“환아, 누님 오셨어.”
“누나가요?”
화들짝 놀라 쫓아나가니 단정한 차림의 누나가 서 있었다.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누나 회사는?”
“연차야. 연차 소진하라고 하도 닦달해대서.”
“아하… 돈으로 안 주려고?”
사회생활 경험은 거의 없지만, 이리저리 주워들은 건 있었다.
특히나 전생의 누나를 통해 회사가 얼마나 야박하고 빡빡하게 돌아가는지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다.
“겸사겸사 은행 볼일 보고 너 얼굴이나 볼까 했지.”
오늘 방송 없는 걸 어떻게 알았나 했더니 우진 형을 통해 들었다고 했다.
“온 김에 같이 밥이나 먹자.”
“나 밖에 못 나가는데….”
“다녀와. 팀장님한테 허락받아놨다.”
우물쭈물하는 내 등을 툭툭 두드려준 우진 형.
우리 우진 형이 이렇게 듬직하네.
“멤버들한테 인사하고 가자, 누나.”
“그래. 애들 선물도 가져왔으니까 보고 가자.”
여태까지 누나는 회사에 와도 잠깐 들려서 얼굴만 보고 갔었다.
우리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뜻도 있었고, 누나가 바쁘기도 했고.
누나가 찾아왔다는 게 괜히 신나서 울적했던 마음이 갑자기 붕붕 뜨는 것 같았다.
‘너는 도대체가….’
포잉은 그런 나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근래 내 꼬락서니를 보는 게 힘들었던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최근 멤버들이 어디 아픈 게 아니냐고 캐물을 정도로 맥을 못 추고 있었으니까.
“여기가 내 작업실이고, 저기랑 저기가 준이 형이랑 경환 형 작업실.”
“네가 작업실을 갖고 있다는 게 제일 신기해.”
“나도 그래도 쫌 하거든?”
평소에는 늘 부족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누나 앞에 서니 괜히 치기 어린 말이 툭툭 터져 나왔다.
회사를 돌며 어디에서 녹음했는지, 에단 선생님에게 어디서 뭘 배우는지 쉼 없이 조잘거렸다.
내가 이런 성격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 술술 흘러나와서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 누님!”
“오셨어요?”
“그냥 누나라고 해. 엄청 나이 들어 보이잖아.”
“오랜만에 봬요!”
연습실에 모여있던 다른 멤버들이 나와 누나를 보고 달려 나왔다.
“준이 형이랑 영빈 형은?”
“보컬 룸. 아까 영빈 형이 준이 형 붙잡아 갔어.”
“아하….”
멤버들의 선물이라고 이런저런 화장품을 챙겨온 누나.
늘 되는대로 누나가 주는 대로 발랐던 나는 뭐가 좋은지 몰랐다.
우리 애들도 그런 쪽으로는 무지한 편이라 서포트 팀 누나들이 추천하는 걸 썼고.
제법 큰 쇼핑백에는 멤버들 인원수만큼의 작은 쇼핑백이 들어있었고, 덕분에 멤버들만 싱글벙글했다.
각자 멤버들이 좋다고 했던 걸 전해줬더니 그걸 또 다 기억하고 하나씩 챙긴 모양이었다.
“너무 잘해주지 마. 버릇 나빠진다?”
“네 버릇이 제일 나쁜데 뭘.”
“와, 이렇게 동생을 몰아가고….”
“또또 까분다.”
가볍게 나를 흘겨보던 누나는 멤버들에게 내가 괴롭히면 이르라고 사람 좋게 웃었다.
땀에 흠뻑 젖어있던 멤버들은 연습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그런 우리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누나 앞이라고 다르긴 다르네.”
“난 우리 환이 아닌 줄 알았잖아.”
“내가 뭘.”
부러 뚱한 얼굴로 대꾸했지만, 찬이는 이미 실실 웃고 있었다.
“오늘은 얘 데리고 가서 밥 좀 먹고 올게. 다음에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한 번만 봐줘.”
“가져가세요! 회사에만 잘 돌려놔 주시면 되죠, 뭐.”
“내가 물건이냐!”
자기들끼리 하하 호호하는 게 억울해 한껏 툴툴거려봤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얘들아….
‘포잉, 내가 진짜 이런 취급을 받고 산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 아님?’
‘이렇게 세상에 내 편이 없네, 하하….’
입으로는 한껏 투덜거렸지만, 누나를 만난 것만으로도 지하를 뚫고 들어가던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얄미운 건 얄미웠고.
모자와 마스크를 챙긴 나는 누나를 얌전히 따라갔고, 누나는 예약해둔 한식당으로 나를 데려갔다.
“양식보다 한식이 나을 것 같아서 여기로 왔어.”
“요새는 뭘 줘도 다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활동기 역시 식단 조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나는 이런저런 일로 살이 많이 빠져서 잘 먹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한참 식단 조절하는 멤버들 앞에서 혼자 고기를 뜯을 수는 없기에 같은 걸 먹었다.
정갈하게 담긴 반찬이 나오고 얌전히 밥을 퍼먹던 그때,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던 누나가 물어왔다.
“큰집 소식 들었니?”
“큰집은 무슨.”
“그래도. 어디서 누가 들을지 모르니까.”
나보다 더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내기 싫었을 누나가 갑자기 왜?
“두 분 이혼하셨대. 그리고 큰아버지는 정신병원에 입원하셨고.”
“잘됐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이미 포잉에게 어느 정도 이야기는 들었던 터라 놀라지 않았다.
그들이 불쌍하지도 않았고.
무덤덤한 내 말에 조금 놀란 듯 바라보던 누나는 유심히 내 얼굴을 살폈다.
“난 그 사람들 불쌍하지도 않고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해. 이제 정말 볼일 없는 거잖아.”
“그렇긴 하지.”
누나는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것 같았는데, 무슨 일인지 자꾸만 말을 삼키고만 있었다.
“누나, 무슨 일인데.”
밥 먹던 수저까지 내리고 물끄러미 누나를 바라봤더니, 깨작거리고 좀처럼 먹지 못하던 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환아.”
“응.”
“할아버지 유산 돌려받았어.”
그때부터 누나는 큰어머니가 찾아와서 했던 이야기와 원래 아버지 몫으로 받아야 했던 재산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기에 눈만 끔뻑거리며 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가족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 누나뿐이었다.
외가 식구들과 작은아버지네는 이전 지환의 기억이 남아있어 그저 고마운 사람들일 뿐.
그분들이 애틋하게 여기고 살뜰히 챙겨주고 싶었던 마음은 이해했다.
그렇기에 나도 최대한 그쪽에는 좋은 이야기만 하려고 했었고.
누나는 작은아버지가 많이 애써주셨다는 말을 전하며 큰어머니가 이혼 전 누나에게 작은 건물을 넘겼다고 했다.
상속세까지 정리한 상태로.
“그 여자가?”
“말.”
“…아무튼. 그런데?”
갑자기 건물이 생겼다니 어이없기도 했지만, 애당초 아버지 몫이었다고 하니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이건 나 혼자 어떻게 해야 할 게 아니잖아. 엄밀히 따지면 아버지가 너랑 나한테 물려주신 거라고 생각해야 하니까.”
그 후 이어진 누나의 설명은 이후 발생하는 소득을 어떻게 관리하고 싶냐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난 괜찮다고 누나 쓰라고 했다가 한바탕 크게 혼만 났다.
부모님 유산인데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고, 아무리 형제간이라도 정확히 나눌 건 나눠야 한다면서.
솔직히 큰 관심이 안 생겼다.
전생에는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나도 불로소득 있었으면 좋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종종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봐도 내 몫이라는 느낌은 안 들었다.
그냥 남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어서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냥 누나가 잘 관리해줘. 솔직히 난 저번에 정산받은 것도 대부분 그냥 통장에 있어.”
“넌 아이돌인데 뭐 명품 이런 거 안 사?”
“밖에도 안 나가는데 사서 뭐 해. 방송할 때는 협찬 받은 거 입고 나가.”
시큰둥한 내 반응에 누나는 혼자 답답해했다.
금전 감각이 그렇게 없어서 어떡하냐는 잔소리와 남에게 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 옷차림도 신경 쓰라는 잔소리.
“어휴, 솜뭉치들은 이런 걸 알고 있나 몰라.”
한참을 잔소리하던 누나는 솜뭉치들이 불쌍하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솜뭉치들은 내가 뭘 입어도 잘생겼댔어, 왜 이래.”
“엄마 아빠가 곱게 낳아주셨으니 망정이지. 넌 진짜.”
질색하며 바라보던 누나는 그럼 일단 누나가 알아서 관리하겠다는 말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어린애 보는 듯한 시선이었지만, 크게 틀린 말은 또 아니어서 얌전히 있었다.
그렇게 누나 용건이 끝나고 이번에는 내가 누나를 불렀다.
“누나.”
“왜, 이 화상아.”
“화상이라니 너무하네….”
답답하다는 듯 반찬으로 나온 동치미를 떠먹는 누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허해.”
“마음이?”
“응. 그냥… 다 잘 해결된 것 같은데 이상하게 기운이 안나.”
멤버들에게는 물을 수 없었던 이야기.
길고 긴 시간 괴롭히던 일이 정리되었고, 바로 얼마 전 죽음을 두려워하던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답을 들었다.
늘 무겁게 나와 지환이를 누르고 있던 것들을 털어내면 시원할 줄 알았다.
복수하고 나면 속이 시원하다고 하던데, 그것도 잘 모르겠다.
차마 죽음에 관해 말할 수는 없었기에 공정한의 일을 들어 물었다.
누나는 어떠냐고.
속이 시원하냐고.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누나는, 누나답지 않게 조그만 목소리로 답했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아. 그런데 시원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로 휑해.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누나도 나와 비슷한 기분이라고 했다.
허탈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러면서 너무 오래 아프게 했던 상처라 낫는데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닐까 한다고 덧붙였다.
누나도 지환이, 그리고 나도 10여 년을 가슴에 붙들고 살았던 일이니까.
지환이 기억을 모두 넘겨받던 날, 이 몸을 온전히 내 몸과 기억이라고 느낄 수 있게 되었기에 통증까지도 함께 넘겨받았다.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내것이었다.
“너는 짧은 시간 동안 일이 많았으니 더하겠지. 그런데 지환아.”
한숨처럼 조그맣게 중얼거리던 누나는 촉촉해진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자꾸 억지로 채우려고 하면 더 탈 나. 그냥 평소처럼 일상을 살면서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어느 날 아무렇지 않아질 거야.”
그게 누나가 내린 결론이라고 했다.
자다가도 눈이 떠질 만큼 분하고 화가 났다가도 이제 다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에 눈물이 나기도 했다고.
억지로 바쁘게 움직여도 봤지만 힘들기만 더 힘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될까?”
“응. 괜찮아질 거야.”
태풍처럼 모든 게 휘몰아치고 나니 이렇게 마음이 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상한 건가, 어딘가 잘못된 건가 싶었다.
잘 해결됐으면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난 어딘가 잘못된 사람이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가 하면서.
어렵다.
제대로 내 삶을 살아보려고 했더니 뭐하나 쉽게 손에 쥘 수 있는 게 없었다.
회사 사람들이나 멤버들에게 말하면 또 한없이 걱정할 걸 알아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던 타이밍에 누나가 찾아와준 것.
타이밍 한번 절묘하다 싶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아까처럼 웃음 나오면 웃고, 짜증 나면 짜증도 내고. 투정도 부리고 울기도 하면서 이제는 그냥 감정을 풀어놔도 괜찮아, 지환아.”
조용히 다가와 품에 안아주는 누나는 무척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리고 그제야 누나가 나보다 조금 더 작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늘 나보다 커 보였는데.
조심스럽게 누나를 마주 안은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누나가 그렇다고 하니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응. 그렇게 할게, 누나.”
전생에도 현생에도 늘 누나들이 해준 말은 틀리지 않았으니까.
핸드폰 보고 걷지 말라고, 계약서에 함부로 도장 찍으면 패가망신한다고 했던 전생에 누나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 말 안 들었다가 지금 이 꼴이 났지.
그래서 이번에는 누나 말을 꼭 듣기로 했다.
크게 숨을 한번 내쉬자 누나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린 날, 애틋한 마음을 담아 다독여주었던 것처럼.
그렇게 오랜만에 누나 품에서 어리광도 부리고 투덜거리기도 하고 나니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누나 덕분에 겨우 다시 걸어 나갈 준비가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