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 Lonely(3)
“환아, 정말 잘했어.”
“그래, 저번보다 더 좋아진 것 같은데?”
우진 형과 진우 형의 칭찬에도 내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모니터링을 하며 확인한 내 모습이 어색하게 보였던 건 기분 탓일까?
작가님이 그려내려던 ‘도한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고, 어설프게 내가 만든 한겸은 색이 옅었다.
울적해진 얼굴을 감추려 했지만, 더 잘하고 싶었던 욕심 탓인지 좀처럼 잘 안 되었다.
“다음에는 더 잘할 거예요.”
감독님도 작가님도 제법이라며 칭찬해주셨지만, 그 말은 자신들의 생각보다 내가 괜찮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건 잘했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이미 많은 경험을 쌓은 배우분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다.
어려운 역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가닥을 잡기 힘들 줄은 몰랐다.
내가 너무 멍청했다.
다른 생각을 할 게 아니라 더 많이 연습하고 고민했어야 했는데.
한숨을 삼키려고 했을 뿐인데 자꾸만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씁.”
그마저도 진우 형이 미간을 좁히며 손가락을 튕겨 내 이마를 때리기 전까지 모르고 있었다.
“아!”
“아프라고 때린 거야. 너 찬이한테 입술 물지 말라고 뭐라고 해놓고 네가 물고 있으면 어떡해.”
평소와 달리 찌푸린 형의 표정에 팽팽하게 당길 듯이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가 슬쩍 늘어졌다.
“지금 다시 찍는다고 더 잘 해낼 자신 있어?”
“…아뇨.”
“그럼 환이 네가 지금 해야 하는 게 뭐야?”
“연습이요.”
“그렇게 잘 아는 놈이 죽상하고 앉아있냐.”
무엇 때문에 내가 이러고 있는지 짐작한 진우 형은 한결 풀어진 얼굴로 천천히 이야기해 주었다.
아는데,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도 어떻게 할 수 없어 복잡하게 들끓던 생각들이 화들짝 놀라 숨어버렸다.
한결 가벼워진 머릿속에 이마를 문지르다 말고 웃어버렸다.
“넵, 선배님. 더 연습 많이 해오겠습니다!”
“오냐, 기대한다?”
“아니, 기대는 하지 마, 형….”
진우 형 덕분에 평소의 컨디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감독님과 작가님, 다른 분들의 피드백을 메모해두었으니, 숙소에서 되새겨보면 무언가 얻는 게 있을 듯했다.
그래, 내가 아무리 스킬빨로 쭉쭉 성장한다고 해도 경험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내가 다른 신인 배우보다 조금 더 수월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시스템.
처음에는 한 자릿수로 시작했던 연기 스텟은 어느새 작곡만큼 훌쩍 커져 있었다.
물론 쉽게 숙련도를 쌓은 건 아니었다.
연기 연습하다 자잘하게 다치기도 많이 다쳤고, 코피를 쏟기도 했다.
하필이면 멤버들이랑 다 같이 스케줄하러 이동할 때 쏟아서 한바탕 난리가 나기도 했었다.
좁은 차 안에서 찬이가 소리 질러서 가뜩이나 어지러웠던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었지.
더군다나 연기 수업을 해주시는 미연 선생님은 엄한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수업뿐만 아니라 늘 다양한 숙제를 내주셨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특정 배우의 연기를 분석하는 숙제는 늘 있었던 거라 새로울 건 없었다.
하지만 동물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숙제와 나이프류를 조사하는 건 생소한 일이었다.
선생님은 평소엔 다양한 분야의 연기를 보고 익히도록 도와주셨다.
하지만 배역이 정해지면 그 역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수업을 해주셨다.
걸음걸이에 대해 고민하는 내게 동물의 움직임을 참고하라고 해주신 것도 선생님이었다.
주로 사용하는 무기가 나이프라는 걸 아시고는 어디서 소품을 구해오셔서는 틈날 때마다 쥐고 움직여보라고 하셨고.
게다가 이번엔 액션 장면을 대비해 몸을 쓰는 법과 운동까지 하고 있었다.
점점 더 바쁘게 움직이느라 분신술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요새 운동 열심히 한다더니 좀 태가 나는 것 같기는 하네.”
“진짜요? 저 근육 너무 안 붙는다고 쌤이 우울해하셨는데.”
회사로 돌아가려는 나를 따라 나온 진우 형의 칭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운동에 취미를 못 붙인 이유 중 하나는 열심히 해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미미해서였다.
물론 몸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같은 운동을 해도 찬이와 나는 결과가 너무 달랐다.
“어깨도 더 반듯해지고, 팔도 단단해졌네. 전에는 말랑거렸는데.”
“말랑… 이요? 그래도 저 운동 쉬진 않았는데….”
형의 칭찬에 슬금슬금 올라가던 광대는 말랑거렸다는 한마디에 다시 바닥을 향했다.
이러니 내가 운동을 하고 싶겠냐고.
“보조제는 잘 챙겨 먹고 있어?”
“네. 쌤이 먹으라고 한 건 다 먹고 있어요. 그 덕에 근육이 좀 붙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단단해졌다는 말에 괜히 내 팔을 쓱쓱 문질러본 나는 얼른 표정을 관리했다.
너무 바보같이 웃었는지 포잉이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요정님은 나한테만 너무 엄해….
“나중에 합 맞춰보자.”
“넵! 저 연습 진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아까 시무룩 해했던 날 위해 평소보다 더 많은 칭찬을 해주는 형에게 씩씩하게 답했다.
섬세하고 온순하게 생긴 형의 얼굴에 그를 닮은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또 연락할게. 막히는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알았어요. 형, 조심히 들어가요!”
가영 형보다 듬직한 느낌을 주는 진우 형의 모습에 역시 형은 이런 느낌이지, 하고 감탄했다.
나도 꼭 세빈이한테 이런 형이 되어줘야지.
* * *
소현은 오랜만에 멤버들과 간단하게라도 대화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에도 마주칠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만, 가끔은 일 얘기가 아닌 편안한 대화를 나누며 속마음을 들으려 했다.
사무실을 나선 소현의 시야에 마침 휴게실에 앉아있던 힘찬의 널따란 등짝이 보였다.
소현은 진지한 얼굴로 작은 종이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는 힘찬의 모습에 슬쩍 다가가 말을 붙였다.
“힘찬이, 뭐해?”
“팀장님, 안녕하세요! 메뉴 고르고 있어요.”
“응?”
널따란 어깨가 오늘따라 진지해 보여 뭐에 저렇게 집중하고 있나 궁금했다.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의외의 것.
“환이한테 줘야 하는데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요.”
“하, 하하….”
소현은 급격하게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지만 애써 버텼다.
그래, 먹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이어트 식단으로는 늘 부족할 법도 했다.
“매번 이렇게 적어서 주는 거야?”
“한 달에 한 번씩 환이가 걷어요. 환이까지 우리가 6명이니까 다 같이 4개 정도씩 적어서 주고 있어요. 그럼 환이가 아침이나 저희 쉴 때 그중에서 해주거든요.”
힘찬은 드물게 진지하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종이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메뉴 하나하나 적은 이유와 먹어본 메뉴가 얼마나 맛있었는지를 쉬지 않고 말하는 힘찬.
소현은 여태까지 힘찬이 그렇게 적극적이고 매끄럽게 무언가를 설명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었다.
“그래…. 맛있는 거 먹는 거 중요하지.”
어찌나 진지한지, 언뜻 보인 종이는 힘줘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적은 듯 연필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우리 지환이가 애들 키우느라 참 고생이 많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킨 소현은 힘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고 세빈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세빈아, 여깄었네.”
평소에 늘 붙어있던 작은 연습실이 아닌 보컬 룸에 있던 세빈.
개인 연습 중이었던 듯, 앞에는 화성학 관련 책과 메모 등이 놓여있었다.
“연습은 잘 돼 가니?”
“어렵긴 한데 영빈 형이 많이 도와줘요.”
훌쩍 자란 세빈은 어느새 소현이 시선을 올려야 할 만큼 커졌다.
지환이 이런 세빈을 보고 가끔 슬픈 표정을 짓곤 했다.
아무래도 지환은 키가 더 안 자랄 모양인지 팀 내 최단신이 되어있었다.
“다행이네. 레슨이 더 필요하면 선생님께는 팀장님이 말씀드려 놓을게.”
“앗, 그러면 조금 더 생각해보고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동그랗게 뜬 눈에는 기대와 기쁨이 어려있었다.
연습벌레인 세빈은 늘 배움을 갈구하듯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아했다.
막내가 이렇게 기특하게 자라고 있다는 게 뿌듯했던 소현은 어깨를 두드려주며 물었다.
“우리 세빈이 필요한 거 있니? 요새 여기저기서 세빈이 칭찬이 자자하던데, 팀장님이 선물해줄게.”
연습을 위한 교재나 옷 같은 걸 원하지 않을까 했던 소현은 의외의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에어프라이어?”
“네! 혹시 그거 비싼가요?”
아주 좋은 게 아니면 무난하게 사줄 수 있을 만한 가격이긴 했지만, 대답이 의외였다.
‘혹시 요리 프로에 욕심이 생겼나?’
‘세빈이는 요리시키면 안 될 것 같은데….’
이전 출연했던 프로그램과 언래블 스토리의 내용이 소현의 머릿속을 스쳤다.
심장이 빨리 뛰는 것처럼 급격하게 초조함과 불안함이 몰아쳤다.
‘안돼! 요리에는 관심 가지지 못하게 해야 해.’
소현은 숙소의 안전과 멤버들의 건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팀장님이 선물해줄 수는 있는데… 이유 물어봐도 될까? 요리 배우고 싶은 거면 학원을 알아봐 줄 수 있는데.”
되도록 요리에는 흥미를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듬뿍 담아 세빈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쑥스럽다는 듯 우물쭈물하던 세빈은 교재와 메모장을 슬그머니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말하기 어려운 걸까 싶어 질문을 바꿔볼까 하던 소현은 메모장을 이리저리 구깃거리던 세빈의 대답에 허탈해졌다.
“아니, 저 말고 환이 형이… 그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거든요.”
“지환이가?”
“네. 저번에 숙소에서 쉴 때, 밥해주면서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요.”
“아이고, 너한테 상을 준다니까.”
기특하게도 다른 멤버를 챙기는 세빈의 모습에 소현은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멤버들은 대체로 자기 능력을 키우는 데는 부쩍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외에 무언가를 대가가 주어지는 것들에는 개인보다 팀을 우선시했다.
“그거 있으면 형이 간식도 만들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래, 그럼 숙소에 세빈이 이름으로 팀장님이 선물해줄게.”
“네! 감사합니다! 역시 팀장님이 최고예요!”
소현이 안타까운 마음에 한 말을 부정의 의미로 알았는지 실시간으로 쪼그라들던 세빈.
흡사 빵빵하게 솜이 가득 찬 인형이 짜부라들어 쪼글쪼글해지는 것 같아 보였다.
부쩍 몸이 단단해진 세빈이지만 아직도 얼굴은 아기 같았다.
덕분에 종종 이렇게 어린 태가 나는 행동들을 할 때마다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렇게 자기감정 표현이 확실해진 건 확실히 좋은 일이다.
마냥 애기 같던 애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 걸 보니 기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소현은 다음 연습을 하러 가는 세빈의 등을 토닥이며 응원해주었다.
아직 촬영장에서 돌아오지 않은 지환을 제외하면 다섯 명이 회사에 있었다.
최근 바쁜 일정에 비하면 드물게 모두가 회사에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오늘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려고 나선 것도 있었고.
다섯 명 중에 두 명이 둘 다 지환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서 소현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주 애가 애를 키우네.”
“팀장님, 안녕하세요.”
“그래, 경환아. 안 그래도 너 찾고 있었는데.”
회사 복도 한복판에서 홀로 중얼거리는 소현이 이상해 보였는지, 경환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소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요?”
“응. 이번 믹테 반응이 좋았잖아. 그래서 칭찬도 해줄 겸, 필요한 게 있나 이야기도 듣고 싶었고.”
본 앨범 발매 전, 경환의 믹스 테잎 발표는 분위기를 달구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팬들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좋은 반응이 끊이질 않았다.
C.I라는 래퍼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나름의 결론과 앞으로 방향성을 잘 드러낸 곡이라는 평이 있었다.
세빈이 쓴 가사도, 피처링에 지환이 함께 한 곡도 좋았지만, 소현은 개인적으로 경환의 솔로곡이 좋았다.
칭찬이 싫지는 않았는지 늘 덤덤했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필요한 게 있냐는 소현의 질문에 경환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무언가 단어를 찾는 듯 홀로 눈을 끔벅였다.
“어, 그러면 에어프라이어요?”
“너도?”
“네?”
“아냐, 음. 그거 말고 다른 건?”
“딱히 없어요.”
산만한 곰돌이가 방긋 웃었다.
에어프라이어 안 사주면 큰일 나겠다 싶었던 소현은 도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당장 가장 좋은 에어프라이어가 어떤 게 있는지 찾아달라고.
소현은 하준과 영빈에게 필요한 게 있냐고 묻기가 두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