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 Lonely(2)
“후우… 저 괜찮아요?”
“어, 완전 괜찮으니까 가만히 좀 있어.”
오늘 촬영에 준비를 돕기 위해 함께 와준 희주 누나.
누나는 몇 번째 되묻는 내 모습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순순히 답해주었다.
평소보다 훨씬 긴장한 듯한 나를 달래기 위함이라는 걸 알지만 좀처럼 긴장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은 처음으로 진우 형과 함께 호흡을 맞춰보는 날이다.
전생에 나는 ‘여진우’라는 배우가 연기하는 모든 역할이 좋았었다.
어느 영화에서는 동네 바보였고, 또 다른 영화에서는 비정한 살인마이기도 했다.
자신에게 고정적인 이미지가 생기는 게 두려워 늘 다양한 시도를 한다던 인터뷰가 기억에 오래도록 남았었다.
그때는 무작정 부럽고 멋있다고만 생각했다.
어떻게 늘 다른 사람을 연기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가장 컸고.
반면, 지금 내가 아는 ‘여진우’라는 사람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섬세하게 타인을 배려해주는 사람이다.
늘 새벽 형들과 우리 사이에서 부드러운 완충지대가 되어 주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고, 온기 가득한 시선을 나누어준 사람.
그러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아직 ‘도한겸’이라는 인물을 모두 이해할 수 없어서 더욱더.
그동안 열심히 다른 배우분들의 연기를 보고 대본을 읽고 작가님과 감독님에게 질문했다.
그렇게 노력했어도 어느 정도 알겠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하아….”
“왜 한숨이야, 무슨 걱정 있어?”
준비된 의상과 메이크업이 끝난 내가 대본을 쥐고 한숨을 내쉬던 그때, 진우 형이 다가왔다.
걱정이 가득 담긴 시선에 괜히 쑥스러워져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었다.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형은 굳이 캐묻지 않고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오늘 잘 부탁해. 최대한 형이 잘해볼게.”
“저도 진짜 열심히 할게요.”
형의 이런 모습이 정말 좋았다.
말하지 않으면 굳이 캐묻지 않지만, 그 모습까지도 존중한다는 듯한 형의 태도.
진우 형의 이런 모습은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믿어주고 지지해 줄 것처럼 보였다.
굳은 다짐을 하며 마음을 최대한 가라앉혔다.
NG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잘하고 싶었다.
이상하게 노래도 연기도 작곡도 한 뼘씩 더 알아갈수록 그만큼 더 욕심이 자랐다.
딱히 무얼 욕심내며 살아온 적 없었기에 나는 욕심이 없는 사람인가 보다 했었는데.
어쩌면 나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욕심낼 것들을 찾지 못했던 건 아닐까?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는 무기력 때문에 스스로 한계를 그어뒀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조금씩 더 많은 세상을 알아갈수록, 내가 나를 정말 몰랐다는 걸 깨달았다.
‘포잉, 응원해줘.’
‘새삼스럽게 무슨.’
‘해줄 거잖아.’
우진 형의 머리 위에서 뚱하게 나를 바라보던 포잉이 앞발을 휘휘 흔들었다.
사람이 하는 행동을 고양이가 하니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응? 환아, 왜?”
“아니에요. 형, 저 다녀올게요!”
우진 형은 내가 뜬금없이 형 쪽을 보고 웃자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포잉을 보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부디 내가 열심히 배워왔던 것들이 도움이 되길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 * *
나, 그러니까 한겸은 양부의 명령을 위해 폐광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버려진 폐광.
그곳은 양부가 시킨 일을 처리하고 뒷수습을 하는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가 잠들어 있었다.
계약자들이 거래의 대가를 두고 가기도 했고, 대가를 치르지 않은 이들이 잠들어 있기도 했다.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또렷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안개에 잠긴 듯 흐리멍덩했고, 그나마 가장 선명한 건 어떤 어린 소녀의 얼굴과 양부의 얼굴이었다.
소녀는 내 손을 붙들고 울고 있었는데, 그 손이 무척 작았다.
양 볼이 빨갛게 물들 정도로 애처롭게 울고 있어 나는 어쩔 줄 몰랐던 것 같았다.
예전에 한번 양부에게 소녀에 관해 물었지만, 양부는 밖에서 놀다 만난 아이가 아니냐며 웃고 말았다.
어릴 때 나는 말썽꾸러기였다며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친부모가 버린 나를 우연히 발견한 게 지금의 양부라고 했다.
양부가 날 발견한 곳은 산속이라고.
어린애 혼자 돌아다니기 위험한 깊은 산속에서 울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했다.
부모님은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날 놓고 갔다며 숨을 할딱이며 울더니 쓰러졌다고.
그렇게 심하게 앓고 나더니 기억을 잃어버린 내가 양부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고 했다.
그 후로도 종종 양부는 어릴 때 기억이나 친부모에 대해 기억이 나는지 물었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때마다 고개를 가로저었고, 양부는 측은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자신은 날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늘 둘이 함께 있자고 해주었다.
‘버림받는다’라는 건 무척 두려운 일이다.
그런 나는 양부를 위해 살기로 마음먹었고, 무엇이든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다.
곤란해하던 양부도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하고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나를 길렀다.
양부에게는 훈련을 받는 어린아이들이 몇 명 있었지만, 그들과 나는 대우가 달랐다.
소리 내지 않고 걷는 법, 칼을 쓰는 법, 통증을 참는 법 등 많은 것들을 배웠다.
같이 자란 아이 중에는 독립해 나간 이들도 있었고, ‘일’을 하다 사라진 이들도 있었다.
조금씩 자라 양부의 일이 불법적이며 옳지 못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내게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내게는 양부에게 버림받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는 내 아버지였으니까.
폐광은 원래 있던 길 외에도 우리가 만든 몇 개의 길이 더 있었다.
그중 하나에 의뢰인이 요청한 물품을 두고 오토바이가 있는 곳으로 향하던 때였다.
본능적으로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느껴지는 인기척이 없었건만.
꼬리는 떨어내거나, 불가능하다면 제거해야 했다.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어 움직이던 나는 걷는 것으로는 상대를 떨쳐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이동 수단이 있는 곳으로 틀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피로에 찌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애잖아.”
후줄근한 옷차림이었다.
목이 늘어난 흰 티에 츄리닝 바지, 때 탄 운동화.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몸은 잘 단련된 이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양부는 자신과 같은 업을 가진 이들은 대부분 발걸음 소리가 없다고 했다.
인기척을 숨기는데 능하고 자신을 숨기는 게 익숙하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을 본능적으로 찾아내는 나는 대단한 재능이 있는 거라고 했고.
상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내가 가진 것과 흔적이 될만한 것들이 무엇인지부터 파악했다.
주머니에 있는 작은 종이쪽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노래 가사에 불과했지만, 저 사람에게는 넘기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이 좋은 편이었고, 최악의 순간들에도 언제나 나를 살린 건 이 예감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 감을 믿어야 했다.
“꼬맹아, 너 되게 수상한 거 알지?”
피로에 찌들어있었던 그의 얼굴에 광기와 닮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 형아가 며칠째 뺑이쳐서 힘들거든? 얌전히 말 듣자.”
스스럼없이 가까이 다가오는 그와 주변 풍경을 한눈에 담으며 여러 가지를 떠올렸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인 듯 낡은 가로등은 힘겹게 깜박이고 있었다.
가느다란 그 빛은 낯선 저 남자에게 더 가까운 게 다행이라면 다행.
하늘이 돕는지 구름이 많아 달빛조차 희미한 밤이었다.
익숙한 긴장감이 근육을 바짝 조여왔다.
어쩌면 오늘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진짜 제대로 공부했네.”
“내가 뭐랬어, 기대된다고 했잖아.”
박수영 작가는 그렇게 여진우가 노래를 부르던 첫 대면 장면을 구경하기 위해 현장에 나와 있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던 지환은 현장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얼굴에서 조금씩 표정을 지워나갔다.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폐광에서 빠져나오는 지환은 확실히 평소와 달라져 있었다.
자신은 인상이 좋지 않아 더 많이 웃으려고 노력한다던 지환.
덕분에 촬영장에서는 늘 환한 빛을 뿌리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그랬던 아이가 지금은 어둠에 녹아든 것처럼 아무런 색도 갖지 못한 듯 보였다.
“저 걸음, 저거 엄청 연습했겠네.”
“아주 깜찍한 구석이 있어, 우리 한겸이.”
지환은 평소와 다른 걸음걸이로 걷고 있었다.
어차피 사운드는 음향 쪽에서 잡아낼 텐데도 자신의 기척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 듯했다.
통통 튕기는 것처럼, 혹은 고양이가 걷는 것처럼 사뿐사뿐 걸었다.
배역에 맞게 걷는 습관까지 바꾸는 건 경험 많은 배우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는데.
“전에 그러더라고. 진우가 평소랑 다르게 걷는 게 신기하다고.”
“허, 그걸 보고 저렇게 했다고?”
수영의 말에 김찬성 감독은 기특하다는 듯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희미한 광기가 느껴졌다.
‘이 인간 스위치 눌렸네.’
수영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같은 장면을 세 번째 재촬영을 요청하는 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첫 번째는 감독이 끊었고, 두 번째는 지환의 부탁이었다.
무언가 잘 안됐다고 생각한 건지 무척 죄송하다는 얼굴로 다시 해도 되냐며 고개를 숙여왔다.
지환이 말하기 무섭게 진우도 한 번 더 해보자고 말했고.
‘쟤 진짜, 하.’
여진우의 색다른 모습에 수영은 기가 찼지만, 배우들이 더 잘해보려고 하는 건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다시 시작되는 두 배우의 연기를 지켜보던 수영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 * *
“지환이는 앞으로도 연기를 적극적으로 밀어야 할까?”
“엥? 왜요?”
소현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도연이 갑자기 왜 그러냐며 되물었다.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어라 중얼거리던 소현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환이가 운동을 열심히 한대.”
“네?”
“PT 쌤이 제발 좀 붙잡아달라고 했던 지환이가 제 발로 운동하러 간다니까?”
소현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번 배역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액션 장면이 있다는 점이었다.
액션씬은 많은 훈련이 필요했고 숙달된 배우들도 종종 사고가 나곤 했다.
그렇기에 배우들이 훨씬 많은 ON 엔터에서도 늘 액션이 있는 극에는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액션씬은 잘 되기만 하면 꽤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지만,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배우도 아이돌도 모두가 몸이 재산인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지환이 해보고 싶다고 했기에 허락했고, 무술 감독의 지도 외에도 개별 연습을 시켰다.
기초체력이 부족한 지환은 훈련을 버거워하더니 체력 단련을 위해 제 발로 PT 쌤을 찾아갔다.
그 말을 우진에게 전해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래도 결국엔 지환이가 하고 싶어 하는 일로 밀어주실 거잖아요.”
도연은 피식거리며 나사 빠진 듯 구는 소현에게 대꾸했다.
“맞아. 그건 그렇지.”
일을 많이 해서 돈을 많이 벌어오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오래오래 함께 일하는 게 더 이득이었다.
소현은 언래블이 장수 그룹이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깊은 한숨을 내쉬며 추욱 쳐지는 소현.
“딴짓 다 하셨으면 이제 일하세요, 팀장님. 아까 요청하신 거 메일로 보내놨어요.”
“너무해, 내가 언제 딴짓했어….”
소현은 툴툴거리면서도 마우스 위에 손을 얹었다.
경쾌한 마우스 클릭 소리와 함께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소현.
그 모습을 확인한 도연은 꾸벅 인사를 남기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차피 오늘도 일찍 퇴근하긴 그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