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12)화 (312/456)

312. 아주 NICE(4)

나는 지웅이에게서 이 세계의 지환이를 봤다.

비록 지환이에게는 누나가 있었지만, 서로의 마음이 애처롭게 비틀려 있었다.

지웅이에게도 윤상혁이 있었지만 오해가 만든 단절은 뼈가 시리다 못해 가루가 될 지경이었고.

어쩌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연기를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임지웅’에게 빠져들었었다.

그때는 표면적인 지환이밖에 몰라서 몰입하는 게 더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저 텍스트 위의 글자로만 ‘임지웅’을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내게는 ‘지환’과 ‘지웅’ 둘이 꼭 쌍둥이처럼 닮아있었으니까.

“음, 제가 말하는 게 스포가 될지도 모르는데, ‘별도시’ 보셨죠…?”

“풋, 다 봤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쭉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어요.”

스포일러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기에 말하다 말고 나도 모르게 눈치를 봤다.

직접 알아갈 때의 즐거움을 위해 이야기를 고이 아껴두는 사람들을 존중해야 하니까.

내 반응이 재밌었는지 웃음이 뚝뚝 묻어나는 작가님 목소리가 여태까지보다 조금 더 높아졌다.

자꾸 웃으시니 괜히 부끄러워져서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이제 안 놀릴게요. 그러니까 계속 말해봐.”

아직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잔뜩 흘러넘쳤지만, 약자인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너무 많이 지쳤을 것 같았어요, 그때쯤의 지웅이가. 친부모는 없느니만 못했고, 몸은 멀쩡하지 않았어요. 그것도 부모 때문에 생긴 장애였잖아요?”

“그렇지.”

수많은 질문과 답변, 고민 끝에 내가 만든 지웅이의 서늘한 얼굴이 떠올랐다.

온기 한 점 허락하지 못한다는 듯, 매섭고 날 선 행동.

“겨우 친구가 생겨서 밝아지려고 하는 타이밍에 걔가 사실은 날 기만하고 있다는 걸 알게 돼 버려요. 물론 그건 오해였지만.”

불쌍한 지웅이.

지웅이는 사막 한복판에 녹지 않는 얼음으로 둘러싸여 오가지도 못한 채 갇혀있는 것 같았다.

날개가 없으니 날아서 벗어날 수도 없는 그런 감옥.

목이 타는 듯 말라도 눈앞의 얼음은 녹지 않았고, 좁디좁은 공간은 누울 수조차 없는 그런 감옥.

“지웅이 모친이 미쳐서 목을 졸랐을 때, 지웅이는 반항하지 않아요. 그때 죽지 않은 건 순전히 덜컥 겁을 먹은 엄마가 손을 놨기 때문이죠.”

다시 생각해도 세상이 지웅에게만 너무 가혹했다는 생각에 말이 많아졌다.

그냥 적당히 대답할 생각이었는데.

조심스럽게 호흡을 고르며 복잡했던 마음을 다잡았다.

이 사람은 내가 마음껏 터놓고 이야기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니까.

이곳에 처음 들어와 느꼈던 손잡이의 차가운 금속 특유의 느낌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없고, 끝도 보이지 않아서 그래서 포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남은 선택지가 없었잖아요. 전 지웅이가 자살 당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마지막 장소로 학교를 고른 건 그나마 가장 의미 있는 공간이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요.”

“어떤 사람들은 지웅이가 학교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학교를 고른 것 같다던데. 그건 잘못된 해석인가요?”

이제는 아예 즐겁다는 듯 질문을 던지는 작가님 표정에 나도 모르게 불퉁하게 답했다.

“놀리지 마세요. 작가님도 아시면서.”

작가가 다 드러내지 않은 이야기는 독자의 영역이다.

그 이면의 이야기를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것도 독자들의 특권이니까.

이 이야기를 해준 게 한 작가님이었다.

지웅이에 대해 파고들수록 그 이면의 모습을 마음껏 상상하라며 들려주셨던 이야기였다.

괜히 떠보는 듯, 놀리는 듯 질문을 던지는 작가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툴툴거린 것.

금방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 작가님은 더없이 포근한 얼굴로 날 바라보셨다.

“다행이네.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네? 걱정이요?”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어리둥절해 하자 본인이 고민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해 주셨다.

“나는 이 역을 이야기상에만 남겨둘까 했어요. 어설프게 연기하는 건 용납이 안 되는데, 배우가 연기하다 너무 몰두해서 트라우마라도 남으면 곤란하니까.”

“아….”

지웅이 못지않게 이번 배역도 전생에 나라를 열 번쯤 팔아먹은 것처럼 불행했다.

그래서 소현 팀장님이 못마땅해한 것도 있었고.

“김 감독은 ‘임지웅’을 보고 완전히 꽂힌 것 같았는데, 나도 애 키우는 엄마다 보니까 좀 걱정스러웠거든요. 근데 지금 보니까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인 배우 중에도 역에 너무 몰입해서 극이 끝나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아마도 나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을 작가님은 배역이 내게 상처가 될까 걱정되었던 모양이었다.

작품의 완성도만 추구하느라 배우를 소모품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다.

실제로 진우 형은 내가 연기를 배운다는 말에 꼭 피해야 할 감독 이름을 알려주기도 했고.

진우 형이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회사에 말을 꺼낸 것도 두 분을 믿기 때문이었던 듯했다.

괜히 가슴이 콩닥거리는 기분이었다.

시원시원한 미소를 머금은 작가님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다시 소개할게요. 박수영이에요. 잘 부탁해요, 우리 도한겸 군.”

도한겸.

그 이름은 내가 이제부터 알아가야 할 새로운 내 배역의 이름이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더 많이 공부해서 꼭 잘 해내겠습니다.”

작가님께 허락받은 기분이라 소현 팀장님이 좋아했던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고생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 * *

지환의 미팅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곧 돌아온다는 연락이 전해졌다.

하준은 홀로 일정을 따온 동생이 기특하면서도 언래블이 그에게 짐을 지우는 게 아닌가 우려스러웠다.

아직 몸을 더 회복했으면 좋겠는데.

태연한 얼굴로 연습에 복귀한 지환은 그사이 살이 더 빠져서 안쓰러웠다.

본인은 더 잘생겨지지 않았냐고 재롱을 부렸지만, 그게 백 퍼센트 진심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본 직후부터 그렇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니까.

언제나 그렇듯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며 멤버들을 모아온 하준은 이동을 준비했다.

오늘은 스튜디오 촬영이었고, 잠시 미뤄두었던 컴백에 맞춰서 올릴 영상과 사진을 찍어야 했다.

컨셉 포토는 이미 모두 완료된 후였지만 회사에서는 조금 다른 걸 해보자고 했다.

이 앨범이 멤버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신인상 수상 후 멤버들의 마음 변화는 어떤지, 서로에게 어떤 의미 인지 등등.

조금 낯간지럽지만, 팬들이 좋아할 만한 인터뷰와 사진을 준비해두자는 것.

질문지를 먼저 확인했던 하준은 멤버들에게 이 내용을 전달하며 잔소리도 잊지 않았다.

“너무 들떠서 아무 말이나 하지 말고. 이건 조금 진지하게 가자고 하셨으니까 지금부터 고민해봐.”

“난 언제나 진ㅈ…! 읍!”

“좋아, 경환이 너는 그렇게만 해.”

오늘도 팔랑팔랑 까불거리는 찬이는 경환에게 맡겨두었다.

보통은 지환이 먼저 단속하는 편이었지만, 지환이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티저 영상에서 입었던 잠옷이 오늘의 의상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하준은 짙은 남색에 소매 위로 하얀색 줄이 들어간 잠옷이었고, 경환이 베이지색 바탕에 체크무늬 잠옷을 입었다.

영빈은 옅은 회색에 하얀 도트무늬 잠옷을, 그리고 세빈은 연한 하늘색의 살랑거리는 느낌의 잠옷이었다.

온통 새하얀 흰색 잠옷을 입은 힘찬은 자기 짝꿍만 지각이라며 툴툴거렸다.

“우리도 잠옷 이런 거로 바꿀까?”

“새벽 형들이 준 잠옷 입어. 아주 깜찍하겠네.”

“그 말 그대로 이른다?”

지나치게 귀여운 잠옷을 선물 받은 터라 원래가 무던한 찬이나 경환이는 집히는 대로 입었지만, 다른 멤버들은 봉인 중이었다.

선물해준 건 고맙지만, 그저 마음만 받고 싶은 선물이었달까.

이어진 개인 촬영은 침대에서 진행되었다.

이리저리 뒹굴뒹굴하며 마구 헝클어둔 침구 위에 대자로 누워있는 모습.

이불을 얌전히 목 끝까지 덮고 제 몸만 한 베개를 끌어안은 모습.

이불을 둘둘 말아 베개 대신 끌어안고는 침대 끝부분에 웅크리고 누운 모습 등.

평소 멤버들의 잠버릇을 그대로 재현해서 한 컷씩 찍어야 했다.

“…이건 나라도 조금 부끄러운데.”

“솜뭉치들이 컨셉이라고 생각해주겠죠?”

경환의 입에서 부끄럽다는 말이 나오자 하준은 새삼스럽게 더 부끄러워졌다.

세빈이는 벌써 불안한지 회사 직원분을 붙들고 꼭 컨셉 포토라고 적어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잠버릇이 딱히 없는 영빈은 다른 나라 이야기를 보는 듯 여유로웠지만, 그렇지 못한 멤버들이 더 많았으니까.

하준도 얌전히 자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까발려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잠버릇이라는 게, 그만큼 가까운 사이의 사람만 알 수 있는 것들이어서 그런 걸까?

그 후 짝꿍과 함께 촬영을 이어갈 때쯤 지환이 도착했다.

“나도 짝꿍 생겼다!”

“아, 최힘찬 얼굴 보니까 회사로 돌아가고 싶어졌어.”

“헐? 너무해!”

“농담이지, 나 말고 널 회사로 보내고 싶어졌어.”

지환이 스튜디오로 들어오자마자 찬이는 신나서 달려가 투닥거렸다.

동갑내기 둘의 장난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우진 형.

하지만 희주 누나는 딴짓을 용납하지 않았다.

“환아, 너 이럴 때가 아냐. 빨리 의상 갈아입어야지.”

“아 참, 저거 입으면 되죠?”

한쪽에 놓인 힘찬과 똑같은 하얀 잠옷.

빠르게 갈아입고 온 지환이 메이크업을 손보는 사이 다른 팀들이 촬영을 마쳤다.

하얀 잠옷을 입은 하얀 얼굴의 지환.

멤버들은 불쑥 지환이 쓰러지던 날이 떠올라 지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날 지환은 지금보다 더 색이 없는 얼굴로 텅 비어버린 것처럼 순식간에 툭 하고 쓰러졌었다.

자신도 모르게 하준의 어깨를 꽉 잡은 경환, 지환에게 달려가려는 세빈의 손을 움켜쥔 영빈.

그리고 실제로 지환에게 달려간 힘찬까지.

모두가 같은 장면을 떠올렸다.

“뭐야, 왜 이래?”

“넌 밀가루냐, 사람이냐.”

힘찬은 자기도 모르게 지환의 몸을 더듬으며 안도했다.

그때처럼 차갑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숨통이 틔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달려든 힘찬의 행동에 지환은 미쳤냐는 듯 힘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옷도 하얀색이라 너 얼굴만 동동 뜬 거 같아.”

“달걀귀신?”

“이봐요, 여러분?”

자신들의 긴장을 감추기 위해 되는 대로 한마디씩 던지는 멤버들.

지환은 그런 멤버들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지환은 다행히 평소의 모습이었고, 평소처럼 멤버들에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하준은 순식간에 요동치던 마음이 정리되는 것을 느끼며 멤버들을 한 명, 한 명 다시 눈 안에 담았다.

이미 깊은 어둠을 헤치고 성장했던 멤버들이다.

언래블은 틀림없이 이번에도 잘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마음을 단단히 붙들었다.

상담 선생님과의 최근 상담을 떠올린 하준은 버릇처럼 손목시계를 확인하려다 한숨을 내쉬었다.

의상 갈아입을 때 벗어둔 탓에 손목이 허전했다.

* * *

“제가 첫 번째에요? 으, 왠지 이상해.”

별도로 세팅된 룸에 들어온 힘찬은 자신이 왜 첫 번째냐며 신기해했다.

인터뷰는 보통 리더부터 나이순으로 진행하는 게 익숙했던 터였다.

낯선 공간을 탐색하듯 한 바퀴 둘러본 힘찬은 이내 평소의 웃는 얼굴로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오, 뽑기로 하는 거예요? 음. 저는 세빈이는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 세빈이는 놀릴 것만 많거든요. 좋은 이야기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막내는 원래 놀리는 게 맛이라며 싱글벙글하던 힘찬.

“히스 형이네요.”

다행히 힘찬이 뽑은 종이에서는 히스의 이름이 나왔다.

“그냥 제가 생각하는 히스 형에 대해 말하면 되는 거죠?”

스태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듬이라도 타듯 고개를 부드럽게 살랑이던 힘찬이 방긋 웃었다.

“히스 형은 섬 같은 사람이에요.”

힘찬이 정의한 영빈은 의외의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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